소설리스트

28. 침대는 내가 고른다고 했잖아. (28/81)

28. 침대는 내가 고른다고 했잖아.2021.06.06.

그녀를 감싸는 따뜻한 품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로비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거겠지. 리아는 자신을 설득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태호는 한참 후에야 그녀를 안은 팔을 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완전히 놓아준 건 아니었다. 그는 리아의 허리에 감싸듯 팔을 두르고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방금 그거 뭐야?”

“차에 타서 설명해줄게.”

리아도 차를 가져왔지만, 잠자코 태호를 따라갔다. 굳이 차 두 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거니와,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한남동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 안에 오르자, 태호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도 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설명해. 아까 왜 그랬는지…….”

“맞불 놓은 거야.”

“뭐? 맞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리아는 완전히 태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도로 앞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 사진들이 기사화된다고 해도, 너랑 나, 뜨겁게 로비에서 끌어안는 모습, 한두 사람이 목격한 게 아니야. CCTV에도 찍혔을 거고.”

그러니까 그런 사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곧바로 애정행각을 벌일 만큼 두 사람 사이가 견고하다는 것을 증거로 남겼다는 거다. 누가 구미호 아닐까 봐, 완전 고단수다.

“이미 기자에게는 너와 정 대리, 직장 동료이기 전에 대학 선후배 사이라고 말해두었어. 요즘 세상에 남사친 있는 게 이상할 건 전혀 없으니까.”

“그런데 아깐 왜 그렇게 행동한 거야? 너, 선배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아주 무례했어.”

젠장, 그걸 몰라서 물어? 태호는 운전대를 꽉 움켜쥐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내 여자’라는 말을 입에서 꺼내는 순간, 리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내가 뭘 어떻게 행동했는데?”

태호는 짐짓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그러자 리아는 태호가 그랬던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완전 산 채로 잡아먹을 것처럼 선배를 노려보던데!”

“……난 원래 경쟁 상대에 있는 사람들, 다 그렇게 쳐다봐.”

경쟁 상대라서? 선배가 주원식품에 근무하기 때문에? 태호는 다른 뜻으로 말했지만, 리아는 경쟁사에 근무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태호가 질투심에 휩싸여 민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사심으로 강수미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면 몰라도 그가 민훈에게 그럴 리 없었다.

“그나저나 어젠 온종일 어디 갔던 거야?”

“급한 업무가 있었다고 말했을 텐데…….”

“그럼 쭉 사무실에 있었던 거야?”

“사무실 비슷한 곳.”

‘그게 어딘데?’라고 물어보려던 리아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어디에 있었든 무슨 상관이랴. 꼬치꼬치 캐묻고 싶진 않았다. 그가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되겠지. 그나저나, 정말 하릴없는 기자인가 보네? 리아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경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재벌 2세인 강태호와 결혼하면서 잠시 타인의 시선을 끌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직은 일반인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기자가 지극히 평범한 자신을 몰래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을까? 그러고 보니 아까 보여준 사진도 망원 렌즈로 찍은 게 아닌,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리아는 또다시 태호에게로 질문을 던졌다.

“왜 기자가 내 뒤를 밟았을까? 난 연예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는데…….”

마침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자, 태호는 차를 세우고 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리아는 파란불로 변해 차가 출발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거 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닐지도 몰라. 혹시 누군가 너의 약점을 잡으려고 날 미행했던 건 아닐까?”

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동의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리아와 민훈이 서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질투심에 상황판단이 느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당연한 거 아닌가? 민훈을 향한 자신의 분노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차가 한남동에 도착하자, 태호는 시동을 끄며 말했다.

“하여간 앞으론 조심해.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웬만하면 정 대리와 단둘이 있는 거 피해. 특히 오늘처럼 단둘이 점심을 먹거나, 사무실에 남아서 야근하거나.”

그 말이 리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안전벨트를 풀던 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렸다. 하, 웃기지도 않아. 응가 묻은 댕댕이가 겨 묻은 댕댕이 나무란다더니…….

“뭐라니? 그러는 너는 그래서 지금까지 강수미와 단둘이 있곤 했어?”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난 강수미와 단둘이 있었던 적 한 번도 없어. 항상 남 비서가 옆에 있었지. 확인하고 싶으면 확인해.”

“지금 나 보고 남 비서가 하는 말을 믿으라고? 그는 네 사람이야. 내 사람이 아니라.”

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어.”

차에서 내리려는 리아의 팔을 태호가 황급히 움켜잡았다. 그러다 보니 힘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았는지 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단번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미안.”

깜짝 놀란 태호는 곧바로 팔을 놓았지만, 리아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잡혔던 팔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태호는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리아 앞에선 가끔 충동적으로 되긴 하지만, 확실히 오늘은 평소보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거셌다. 민훈과 즐겁게 데이트하는 모습을 본 후유증이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감정을 통제 못 하는 자신이 못마땅한 태호는 크게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리아의 눈에는 그녀에게 신경질을 내는 것으로 보였다. 지금 여기서 누가 화내야 하는 건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더는 네 말 듣고 싶지 않아.”

리아는 그렇게 차갑게 한마디 던지고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호는 선뜻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 없었다. 차에 남아, 조금은 혼자 감정을 내리누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 리아가 사라진 쪽을 말없이 바라보던 태호는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과 통화 연결이 되자, 태호는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만 묻죠. 그 사진, 본인이 직접 찍은 겁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 기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저도 제보받은 겁니다.]

“누구한테서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도 아는 사람입니까?”

[죄송합니다.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할 필욘 없을 것 같군요. 이미 답이 됐으니까.”

우 기자가 뭐라고 묻기 전에 태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후우.”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의 예상이 맞았다. 기자가 아니라, 누군가 제보한 것이다. 그 상대가 누구인가는 우 기자의 입을 통해 들을 필요는 없었다. 누가 봐도 뻔하니까. 주원식품과 KJ푸드의 관계가 회복되길 꺼리는 사람, 한 사장이 제보한 게 틀림없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계획한 일을 한 사장이 눈치챈 건 아니겠지?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는 태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 그날 밤, 태호는 잠들기 전까지 게스트룸으로 오지 않았다. 그동안 서재에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방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침에 리아가 일어났을 때, 옆자리에 잔 흔적이 있는 걸로 봐선 그래도 각방을 쓰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태호 차로 퇴근한 탓에 그녀의 차는 아직도 회사 주차장에 있었다. 택시를 부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노란색 스포츠카가 리아 앞에 멈추며 동시에 조수석 유리창이 내려갔다.

“새언니, 오늘 차 없어요?”

믿기지 않았지만, 스포츠카의 주인은 태희였다. 리아는 서둘러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불안해서였다. 숫자는 아침 7시 50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했나? 리아는 한 번도 이 시간에 깨어 있는 태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태희는 손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요, 내가 회사까지 바래다줄게요.”

마다할 이유가 없기에 리아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차에 타는 순간, 숨 막힐 정도로 강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태희의 화려한 차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혹시 밤새우고 지금 들어온 거? 아니라 다를까, 태희가 곧바로 이실직고했다.

“참, 새언니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 깜빡했어요. 새언니가 저번에 작은오빠 대학교 때 클럽 다녔단 말 해준 덕분에 저 자유롭게 클럽 갈 수 있게 됐어요.”

“그래요? 잘됐네요.”

리아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나이 또래에는 클럽 가는 게 대단한 일이겠지만, 리아에겐 그리 크게 특별할 게 없었다. 그보단 어젯밤 태호와 벌인 언쟁이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왜 자꾸만 둘 관계가 삐거덕거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루에는 수십 번 냉탕과 온탕을 드나드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누군가 그녀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매우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인지, 그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버렸다. 아직도 냉전 중인가? 힐끗 리아를 훔쳐보던 태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 며칠, 새언니와 작은오빠 사이에서 찬바람이 쌩쌩 부네. 태희는 드레스를 고르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냉전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한 번도 싸우는 걸 본 적 없는 큰오빠 내외와 달리, 리아와 태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언제나 상냥한 소정보다 까칠한 리아에게 더 끌린다는 거다. 그래서일까? 태희는 저도 모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새언니, 오빠랑 싸웠죠? 그래도 속상해하진 말아요. 부부싸움은 물로 칼 베기라잖아요.”

“칼로 물 베기겠죠.”

리아는 기분 상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실수를 정정해주었다. 그러자 태희는 둘째 손가락을 들며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물로 칼 베기. 칼로 물을 벤다는 건 칼로는 물을 벨 수 없으니까, 아무리 칼로 그어도 물은 다시 하나가 된다는 의미겠지만, 물로 칼 벤다는 건, 예를 들면 뜨겁게 달군 칼을 물에 담가야 단단해지잖아요. 그러니까 부부싸움을 해야 두 사람 사이가 단단해진다는 뜻이에요.”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결국엔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의미는 뜻깊게 다가왔다. 사이가 단단해진다고? ……글쎄? 리아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드디어 신혼집으로 옮기는 날이 다가왔다. 리아와 태호는 간단하게나마 강 회장 내외에게 인사를 한 후, 각자 회사로 출근했다. 고용인이 두 사람의 짐을 옮겨놓을 예정이고, 둘은 퇴근 후 따로따로 갈 계획이었다. 그날 저녁, 리아와 태호의 차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집 앞에서 맞닥뜨렸다. 월요일 작은 언쟁이 있는 이후로, 두 사람 아직 서먹서먹한 상태였기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선 리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혼 전에 이미 한 번 와보았었지만, 그새 손을 보았는지 몇 군데 달라진 점이 있었다. 제일 먼저 침실 안으로 들어가던 태호는 곧 제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뒤에 선 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이건?”

리아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태호를 지나쳐 침실로 들어섰다. 역시……. 침실 가운데에 놓인 침대를 바라보는 리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곧바로 태호를 향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침대는 내가 고른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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