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2021.06.02.
사진 속에서 리아와 민훈이 다정하게 웃으며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사진 밑에 적힌 날짜가 오늘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오늘 점심에 찍힌 것 같다. 또 다른 사진에는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뮤지컬 극장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의 날짜는 결혼하기 몇 주 전이었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리아와 민훈이 잠시 사귀었다는 건 이미 아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사진으로 보게 되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다른 남자에게 미소 짓는 리아를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뚫어지게 사진을 노려보던 태호는 한참 후에야 본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메일 내용은 간단했다. <기사화하기 전에 이사님과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메일을 보냅니다. 메일 보시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 데스크에 기사를 넘길 예정입니다.>
“흐음.”
태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메일 아래에 적힌 우 기자의 연락처를 노려보았다. ‘팩트 폭’이라면 이름만 인터넷 신문이지, 뉴스보다는 연예인 가십이나 헛소문을 다루는 지라시 양성소나 다름없는 곳이다. 수준 미달의 기자까지 그가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홍보실에 넘기면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리아와 연관된 일이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태호는 메일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음 몇 번만에 바로 연결되었다.
“KJ푸드 강태호입니다.”
[아, 강 이사님. 신속히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가 수화기 저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보낸 사진, 기사 내보내도 되겠습니까? 원래대로라면 그냥 내보내겠지만, 아무래도 아내분과 상대분이 일반인이다 보니 조심스럽군요.]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데스크에서 퇴짜놓은 기사였다.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을 건드려봤자, 조회 수가 오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한 사장의 협박으로 태호와 강수미의 사진마저 써먹지 못하게 상황에서, 우 기자는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태호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기사를 어떻게 내보낸다는 거죠? 사진 속의 인물은 아내의 직장 동료이자, 대학 선배입니다. 요즘 시대에 남사친이 문제 될 건 없을 텐데?”
[그렇다면 이사님도 두 분이 따로 만나는 사이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급하게 결혼 계획을 앞당겼지! 그뿐인가? 태호는 민훈의 존재를 대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곁을 맴돌며 호시탐탐 고백할 기회를 엿보는 상대를 어찌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정민훈 씨와는 대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니까, 괜한 기사로 서로 곤란한 상황 만들지 말죠. 한 줄이라도 기사가 나갔다간 KJ 법무팀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겁니다.”
어차피 내보내지 않을 기사였지만, 강수미 스캔들이 터졌을 땐 반박조차 하지 않던 강태호 이사가 법무팀과 명예훼손을 운운하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강수미와 아직도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주제에 아내의 불륜을 감싸는 태호를 우 기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좀 더 상황을 파봐야겠다는 기자의 직감이 발동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뭐, 알겠습니다. 이번 건은 기사화하지 않는 걸로 하죠.]
우 기자는 우물거리듯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태호는 곧바로 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려던 태호는 마음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얼굴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태호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
“팀장님, 저희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채영이 팀원들 대표로 리아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응, 그래. 오늘 모두 수고했어.”
리아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런 리아를 보며 채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팀장님도 어서 들어가세요. 첫날부터 무리하지 마시고.”
“응. 생각보다 일이 좀 밀려서……. 괜찮아, 이것만 하면 끝나.”
“신혼인데 이러시면 안 되죠. 팀장님 퇴근하시기만 눈 빠지게 기다리시는 분이 계실 텐데요?”
두 사람이 불타게 사랑해서 결혼한 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아는 채영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응. 그러니까 채영 씨,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
“네에.”
채영은 키득거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서두른다고 했지만 1시간 가까이 퇴근 시간을 넘겨버렸다. 리아는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에 넣었던 휴대폰을 꺼내니, 태호에게 전화 한 통이 와 있었다. 마케팅 2팀 팀장과 회의하느라 휴대폰 전원을 꺼놓고는 깜빡했나 보다. 전화를 걸려던 리아는 도로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집에 가면 볼 텐데. 급한 일이었으면 문자라도 보내겠지. 밖으로 나가자, 빈 사무실에 혼자 남은 민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작업에 집중한 탓에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선배, 아직도 퇴근 안 하고 뭐 해?”
리아의 목소리에 그제야 민훈이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렸다.
“아, 보고서 급히 수정할 부분이 생겨서. 거의 다 끝나가.”
“뭔데?”
리아는 작성 중인 보고서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모니터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모니터 앞에서 두 사람 얼굴이 가깝게 모였다.
“……아, 이 부분. 아까 최 팀장이랑 회의할 때 의견 나왔었어. 이렇게 한번 수정해봐.”
리아는 자연스럽게 민훈에게서 마우스를 넘겨받아,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클릭했다. 그리고 자판을 두드렸다. 그때 마침 사무실 문이 열리며 태호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지? 태호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리아와 민훈 모두 작업에 열중한 상태였지만, 멀리서 보면 자칫 얼굴을 맞대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우 기자가 보낸 사진으로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태호는 실제로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니,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그렇게 행동하니까, 기자가 냄새를 맡는 거잖아! 아니, 그보단 아직 두 사람에게 감정이 남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민수는 리아와 민훈이 갓 사귀기 시작한 사이였다고 귀띔했지만, 리아와 태호는 사귀기 전부터 이미 두 번이나 입을 맞춘 사이였으니 민훈과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두 사람, 꽤 진전된 사이였을까?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해서 애틋한 걸까? 거기까지 상상이 이르자, 숨이 탁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사무실 입구에 선 태호를 먼저 본 사람은 민훈이었다. 그는 죽일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는 태호를 발견하고 팔꿈치로 리아를 툭 건드렸다.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던 리아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태호를 보자, 놀란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야?”
마음 같아선 ‘왜 우거지상을 하고 거기 서 있어?’라고 묻고 싶었다. 그 정도로 태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글이글하는 눈빛은 한마디로 사람을 잡아먹으려 산속에서 내려온 호랑이 같았다. 그렇다고 겁먹을 리아는 아니다. 호랑이 굴에서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자신의 사무실, 홈그라운드에서 겁을 먹으랴. 불쾌한 듯 잔뜩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던 태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집에 같이 가려고 왔어.”
아내와 함께 퇴근하려고 회사까지 찾아온 남편이라……. 당연히 설레는 게 정상이겠지만, 지금 태호의 어두운 표정을 본다며 절대로 아니다.
“다음부턴 연락하고 와. 나 아직 일이 남았어.”
쌀쌀맞은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민훈의 보고서 수정을 돕고 있었으니, 하던 일은 마저 끝내야 한다. 그러나 태호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 듯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만 가지. 출근 첫날부터 무리하지 마.”
태호가 그녀의 팔을 움켜쥐자, 리아는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긴히 할 말도 있으니까, 어서 가자.”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싸해 지려고 하자, 민훈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팀장님, 저 혼자 끝내면 됩니다. 먼저 퇴근하시죠.”
자신 편을 들어주는데도 태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민훈을 바라보았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민훈이 리아 옆에 맴돌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아는 굳게 입을 다문 채로 태호를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선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민훈 앞에서 서로 으르릉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가뜩이나 그녀가 힘든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을 텐데, 거기에 걱정을 더 보탤 순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먼저 들어갈게요. 정 대리님도 너무 늦게까지 하진 말아요.”
리아가 발걸음을 떼자, 태호는 아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별 저항 없이 얌전히 태호를 따라간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도대체 왜 그래?”
그녀의 물음에도 태호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알리는 불빛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강태호.”
“오빠.”
“뭐?”
“밖에선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오빠로 불러.”
하, 기가 막혀서. 뚱한 얼굴로 갑자기 나타나서 웬 오빠 타령?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태호와 상대하기 싫은 리아는 빠르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왜 난데없이 그가 이렇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어제오늘 사이 무슨 일 있었어? 어젠 온종일 어디 갔던 거야?”
“그보단 먼저 이걸 좀 봤으면 하는데…….”
태호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방금 그가 우 기자에게 받은 사진이 떠 있었다. 하지만 리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게 뭐 어때서? 직장 동료와 밥도 못 먹어?”
“다음 사진도 봐.”
역시 그녀의 표정은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직장 동료 이전에 친한 대학 선배야. 호텔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극장에서 나온 건데 이게 뭐? 아니 그리고 막말로 호텔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 결혼하기로 하기 전이잖아.”
리아의 말이 모두 맞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결혼하기 전, 사귄 남자가 정민훈 대리라는 거 나도 알아.”
“그래서?”
“기자가 냄새를 맡았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귀다가 결혼한 거로 발표했는데, 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던 게 되니까.”
그 말에 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나만 어장 관리한 여자가 된 거네? 리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화면 속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녀는 속으론 결혼해야 하나, 마나? 하면서 고민 중이었지만, 마지막 데이트를 망치지 않으려 억지로 밝은 척하며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밝게 웃으며 민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닭을 알 리 없는 태호는 두 사람이 아주 심각한 관계였다고 믿는 듯싶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깊은 관계였다고 해도, 그가 불평할 자격은 없었다.
“그러게, 왜 거짓 정보를 흘려서 이 사달은 만들어?”
리아가 톡 쏘아붙이자 태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인정한다. 그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론 조심하지.”
어라? 이렇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성격이 아닌데?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하, 이럴 줄 알았다. 결국엔 그녀보고 조심하라는 소리다.
“사귀던 사이인데 서로 얼굴 보며 근무하기 껄끄럽지 않아? 정 대리, 마케팅 2팀으로 부서 옮기게 해.”
그녀도 한때 그럴 생각이었지만 막상 태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 기분이 상했다.
“내 팀원의 거처는 내가 알아서 결정해. 네가 왈가불가할 건 아니지.”
“기사 나갈 뻔한 거, 내가 막았어.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앞으로 조심할게.”
“그게 조심한다고 될 일인가?”
그때 띵, 소리와 함께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리아는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태호가 뒤를 바짝 다가오더니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강하게 품에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그래?”
그녀가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오히려 꼼짝도 할 수 없게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날 끌어안아.”
“뭐?”
“정민훈을 2팀으로 보내기 싫으면 날 껴안으라고.”
리아는 기가 막힌 듯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