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부족해? 좀 더 해줄까?2021.05.30.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행동에 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태호는 다른 한 손으로 잘록한 허리를 끌어당기며 리아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짜릿한 감각에 그녀의 입술이 무방비 상태로 열리자, 그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은 물 흐르듯 단숨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던 공항에서의 키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둘만이 있는 차 안에서의 키스는 찐득하고도 아찔했다.
“하아.”
하나로 엉키는 물기 어린 숨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머리는 그만 밀어내야 한다고 했지만, 잊었던 감각을 되찾은 몸은 적극적으로 다가가길 원했다. 어느새 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한참 후에야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고마워.”
……응? 리아는 열기로 흐릿해진 시선으로 멍하니 태호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난데없이 뭐가 고맙다는 거지? 태호는 커다란 손으로 달아오른 리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을 이었다.
“어제 간호해준 거. 나도 말로만 고맙다곤 할 수 없어서…….”
그러니까……. 리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태호가 한 말을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한 키스는 감사의 표현이란 거야? 내가 감사의 키스를 해준 것처럼? 확실한 뜻을 깨닫는 순간, 조금 전까지 그녀를 휘감던 열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하! 기가 막힌 나머지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여간 강태호, 사람 한 방 먹이는 데 선수다.
“고…… 고맙다는 표현이라고?”
화난 상태라 혀가 꼬여버려 앞부분을 더듬고 말았다. 물론 그녀도 감사의 표시로 입술에 키스했으니, 뭐라고 따질 순 없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키스였다. 유럽에선 인사 정도로 통하는 아주 가벼운 접촉 정도? 태호가 한 키스는 그것과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진하면서도 질척거리는 접촉이었다. 그러면서 뭐?
“그런 것치곤 너무 과한 거 아냐?”
리아는 뺨을 감싼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노려보든 말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데 쩨쩨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 말은 즉, 내가 해준 키스는 쩨쩨한 거고, 자기가 해준 키스는 후한 거라는 거네? 리아의 입이 황당하다는 듯 벌어졌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하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그는 다른 뜻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왜? 부족해? 좀 더 해줄까?”
이게 지금 장난하나! 마음 같아선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세게 때린다고 해도 그에겐 기별도 안 갈 거다. 오히려 그녀가 바짝 약 올랐다는 사실만 증명해 보이는 꼴이 된다.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이런 일에 버럭 화내면 안 되지. 참자. 우선 참고, 복수는 다음을 기약하는 거야. 리아는 커다란 인내심을 발휘하며 양쪽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아픈 건 어때?”
화낼 줄 알았는데 그녀가 활짝 웃어 보이자, 태호는 의아하다는 듯 가늘게 눈을 모았다. 리아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아직도 아픈 줄 알고, 화를 참는 걸까?
“……다 나았어. 이젠 괜찮아.”
말이 끝나는 순간, 리아는 쏘아붙이듯 차갑게 내뱉었다.
“그렇다면 휴전 종료!”
재빨리 차에서 내린 리아는 태호를 기다리지 않고 뛰어가듯이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신호등이 달린 것도 아닌데, 그녀의 등 뒤로 ‘빨간 불’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풉.”
멀어지는 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호의 입에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찬바람 불게 쌩 토라진 모습이 미치도록 귀엽다는 사실은 그녀는 알까? 버럭 화내서 다행이다. 부담스러워하며 그를 피하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태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제길, 바보처럼 또 선을 넘어버렸다. 처음엔 그도 리아처럼 살짝 입술만 맞출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술이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펑 터져버렸다. 어제 내내 힘겹게 내리눌렀던 감정이 방심한 틈에 폭발해버린 걸까. 다행히 리아는 그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을 약 올린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으음.”
차에서 내려 차 문을 닫던 태호는 순간 행동을 멈추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거북했던 속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너무 먹었나?”
솔직히 털어놓자면 민 여사의 요리 솜씨는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가? 리아를 낳아준 장모님이 아닌가? 어릴 때도 민 여사에게 잘 보이려 싫은 내색하지 않고 손만두를 하나도 남김없이 깔끔히 해치웠는데, 사위가 된 지금에 하나라도 남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억지로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 태호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천천히 집 안으로 향했다. 결국, 다음 날 태호는 심하게 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한 번 꾀병을 부렸으므로 리아에게 아픈 티를 낼 순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쩌다 한두 번이지, 너무 자주 보여주면 곤란하다. 할 수 없이 태호는 급히 처리할 업무가 있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혼자 시간을 보낼 장소로 향했다. 그날 그는 밤늦게 돼서야 한남동으로 귀가했다. *** 주원식품 본사, 월요일 아침.
“좋은 아침.”
“팀장님.”
리아가 활기찬 모습으로 마케팅 1팀 사무실에 들어서자, 막내 사원 채영이 반가운 얼굴로 제일 먼저 달려왔다.
“팀장님, 어서 오세요.”
그 뒤로 나머지 팀원들이 밝은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회의나 할까요?”
리아는 팀원들과 간단히 회의하며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체크했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으로 오래 자리를 비웠었지만, 마케팅 2팀과의 협동 덕분인지 대부분은 말끔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몇 가지 수정이 필요한 부분만 제외하곤 흠잡을 데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개인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리아는 민훈의 자리로 다가갔다.
“정 대리님, 시간 괜찮으면 이따 점심 같이해요.”
“네, 팀장님.”
오늘은 리아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지 민훈의 표정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편안해 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피해 탕비실로 들어가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래도 확인해 둘 필요는 있었다. 조금이라도 민훈이 힘들다고 한다면 부서 이동을 권할 참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고, 두 사람은 사내 식당이 아닌 회사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신혼여행은 어땠어?”
민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운을 뗐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어.”
“다행이네. 지금 시댁에 있다며. 어때? 견딜 만해?”
“그럼, 당연하지. 아주 잘 지내고 있어.”
견딜 만한 건 사실이지만, 잘 지내고 있다는 건 반은 거짓말이다. 일요일인 어제만 하더라도 그녀 혼자 멀뚱하니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전날 밤, 뭐라고 한마디 했다고 태호는 다음 날, 밖에 나가서 온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댕댕이 응아도 찾을 땐 없다고. 태호가 뭘 어떻게 해주는 건 아니지만, 시월드에서 남편이 옆에 있고 없고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는 업무 핑계를 댔지만, 리아가 불편해서 밖으로 나돈 게 분명했다. 누가 봐도 매우 화가 난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갔으니까. 하, 웃기지도 않아.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속으로 투덜거리느라 그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나 보다. 민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아야,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울게. 직장 동료이기 전에, 난 너의 학교 선배이기도 하잖아.”
“……선배.”
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민훈을 바라보았다. 말은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민훈을 생각한다며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잊고 새로운 상대를 만나게 도와야 했다. 5년 후, 태호와 헤어진다고 해도 그녀가 민훈에게 갈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까. 리아는 대답을 회피하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내가 시댁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주말에 종로 갔다가 우연히 유정이 봤어. 유정이가 그러더라고.”
“그랬구나.”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민훈은 평소에 하던 대로 자신의 접시에 있는 왕새우 튀김을 리아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처음엔 리아도 사양했었지만, 민훈이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는 걸 알기에 어느 순간부터 순순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고마워. 선배도 어서 먹어.”
“응.”
리아와 민훈은 미소를 교환하고는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찰칵―. 건너편 테이블에서 누군가 함께 식사하는 둘의 모습을 휴대폰에 담기 시작했다. ***
“하, 이거 진짜 당돌하네.”
사진을 들여다보던 한 사장이 기가 막힌 듯 입매를 뒤틀었다. 사진 속에는 뮤지컬 관람을 끝내고 나란히 극장을 걸어 나오는 리아와 민훈의 팔짱 낀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강 이사와 결혼하기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회사 직원과 사귀던 사이였다?”
“네. 이 사진이 마지막으로 단둘이 만난……. 아, 그리고 이건. 오늘 갓 찍은 사진입니다. 단둘이 점심을 먹더군요.”
사진 속에서 민훈은 자신의 음식을 리아의 접시에 덜어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 사장 입가에 빈정거리는 웃음이 떠올랐다.
“어디서 급도 안 되는 게, 재벌 흉내를 내고 있네. 결혼 따로, 사랑 따로 뭐 그런 건가? 강 이사도 이 사실 알고 있나?”
“글쎄요,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정략결혼인데 신경 썼을까요?”
“흠.”
표 과장의 말에 한 사장은 사진을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사랑 없는 정략결혼이라도 리아가 아직도 전 남자친구를 정리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자존심에 스크래치 좀 날 거다. 강태호가 어떤 녀석인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완벽주의자 아니던가! 아무리 이름뿐인 아내라고 하더라도 출근 첫날부터 전 남자친구를 옆에 끼고 밀회를 즐긴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 그림이 딱 그려진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한 사장 앞에 표 과장은 또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이건 ‘팩트 폭’ 우창민 기자에게서 받은 사진입니다. 어제 강 이사님이 여의도 오피스텔에서 온종일 머무르셨답니다.”
여의도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는 태호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그곳은 중대한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철저한 보완을 위해 팀원들과 머무는 장소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터라, 진행하는 일도 없을 텐데 왜 거기에 간 걸까?
“전략기획팀에서 특별히 진행하는 거라도 있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젠 이사님 혼자 머무셨답니다.”
표 과장은 빠르게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한 시간 후, 오피스텔 로비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사진을 보자마자, 한 사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얘 사진이 왜 여기서 나와?”
사진 속의 인물은 강수미였다. 넙죽 스폰서 제안을 받아들일 땐 언제고, 요새 좀 떴다고 아주 콧대가 높아진 그의 숨겨진 애인. 강수미와 한 사장과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표 과장은 심각한 얼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 기자가 사실 확인 겸 연락을 했더군요. 이사님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강수미와 같은 장소에 있었으니까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하여간 쓰레기 같은 놈들, 아무거나 닥치고 쓸어 담지.”
한 사장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사진을 노려보았다. 강수미와 태호가 아무 관계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 한 사장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관계라고 해도 태호 성격에 업무 보는 장소로 여자를 끌어들일 리 없었다. 어찌 됐든 태호는 보호해야 한다. 미래에 사위가 될 예정이며 KJ그룹 회장이 되는 날엔 그에게 날개를 달아줄 인물이니까.
“우 기자에게 이거 말고 다른 특종감이 있다고 전 해. 대신 이 사진은 우리에게 넘기라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표 과장이 사장실을 나가자, 한 사장은 다시금 책상 위에 놓인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 생각보다 재미있을 것 같군.”
사진을 바라보는 한 사장의 눈빛이 차갑게 반짝였다. *** 퇴근을 앞두고 이메일을 확인하던 태호는 낯선 메일을 발견했다. <급 확인 요망: 안녕하세요. ‘팩트 폭’ 우창민 기자입니다.> 아무래도 스팸메일일 가능성이 컸다. 그의 이메일 주소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어, 매우 중요한 업무 메일 외엔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마우스를 클릭하자, 메일이 열리며 첨부한 파일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건……?”
한순간에 사진을 바라보는 태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