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말로만 고맙다고 할 거야?2021.05.26.
“태호, 오늘도 일찍 퇴근했다고?”
드레스 룸에 들어서던 강 회장이 정 여사의 말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네, 그런가 봐요. 첫째랑 외출했다가 돌아오니까 이미 와 있더라고요. 피곤한지, 아까부터 자고 있어요.”
정 여사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새아기도 같이?”
“그건 모르죠. 방에서 안 나오는 거 보니까 함께 있는 것 같긴 한데…….”
강 회장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재킷을 벗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둘 사이가 나쁜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군.”
“어쩌겠어요? 싫든 좋든 결혼했는데, 평생 미워하면서 살면 본인들만 손해지.”
강 회장은 정 여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태호가 정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두 사람 모두 적잖이 놀랬었다. 평생 결혼 안 하고 독신으로 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주씨 집안과의 정혼을 끄집어내다니…….
“새아가가 관계를 호전시키려 노력한다고 했으니 지켜보면 되겠지.”
그러자 정 여사는 짧게 실소를 내뱉었다.
“하, 애들끼리 좋으면 뭐 해요? 집안끼리는 아직도 철천지원수 같은데……. 당신이야말로 사돈이랑 관계 호전시킬 궁리 좀 해요.”
“그게 말처럼 쉬운가?”
하소연하듯 투덜거리는 듯 강 회장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건지, 두 집안의 관계는 해가 지날수록 더욱더 나빠졌다. 두 집안의 반목은 5년 전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에 몰렸는데 왜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했는지, 강 회장은 지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KJ그룹은 대기업으로 승승장구 잘나가고 있을 때라 주원식품을 견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니,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상대를 치는 건 강 회장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오해를 풀려 주 회장을 따로 만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주 회장은 강 회장의 결백을 끝내 믿지 않았다. 갈라서기 전까진 형, 동생 하며 친형제처럼 지내던 두 사람이었다. 주 회장보다 5살 많은 강 회장은 자신을 야비한 사업가 취급하는 동생뻘인 주 회장이 못 견디게 괘씸했다. 회사가 두 개로 쪼개진 이유가 누구 때문이었는데……. 본인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형, 동생 하던 사이로 돌아갈 수야 없겠지만, 이젠 사돈의 연을 맺었으니,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
“후우.”
강 회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넥타이를 풀었다. ***
“으음.”
태호가 눈을 뜨며 몸을 뒤척거리자, 리아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깼어?”
태호는 대답 대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는 척하다 보니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리아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가지 않고 계속 옆에 있었던 걸까?
“……몇 시야?”
“밤 8시.”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고?
“뭐 좀 먹어야지?”
리아가 일어나려 하자, 태호는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
“잠깐만.”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내일 저녁에 청담동 가자.”
“갑자기? 아빠 출장에서 돌아오면 그때 가자며?”
“장인어른 돌아오시면 그때 또 가고.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지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리아는 오늘 두 번이나 그녀의 엄마인 민 여사 이야기를 꺼냈다. 말은 안 하지만, 가족이 보고 싶을 것이다. 문득 리아를 전혀 배려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너 아프잖아?”
“잠이 좀 모자랐던 것뿐이야. 오늘 푹 자고 나면 내일은 괜찮을 거야.”
친정에 가자는데 리아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저녁 식사 때마다 터지는 핵폭탄급 발언에 불편하던 참이었는데…….
“그래, 그럼.”
리아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아주 마음 편한 미소였다.
*** 토요일 오후, 외출에서 돌아온 민수는 집 안을 가득 채운 음식 냄새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섰다. 웬만해선 주방에 들어서지 않는 민 여사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앞치마를 입고 식탁에 앉아 손수 만두를 빚고 있었다. 그 뒤로는 도우미 여럿이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싱크대와 조리대, 식탁 위에는 온갖 음식 재료가 널려 있었다.
“엄마, 오늘 무슨 날이야?”
“응, 이따가 리아랑 강 서방이 저녁 먹으러 온다고 해서.”
만두피에 속을 채우며 민 여사가 대답했다.
“아버지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건 그거고, 오늘은 그냥 들르겠대.”
민 여사가 섭섭해한 걸 아는 것처럼, 리아는 갑자기 전화를 걸어 친정에 들르겠다고 말했다. 민 여사는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장을 보고 손님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슨 동네잔치라도 해? 무슨 음식을 이렇게나 많이 했어?”
“얘는! 강 서방 온다잖아.”
민수가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만두 모양이 제대로 안 잡히고 망가지자, 민 여사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 눈을 흘겼다. 민수는 서둘러 손을 씻고 민 여사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주 능숙한 솜씨로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태호, 마음에 안 든다고 할 땐 언제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사위는 백년손님이란 거 몰라?”
민 여사는 또다시 민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래, 시월드를 모르는 네가 백년손님인들 알겠니?”
민수는 민 여사보다 더 능숙하고 예쁘게 만두를 빚어 차곡차곡 쟁반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엄마가 직접 만두를 빚으니까, 좀 안 어울린다.”
그 말에 민 여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민수 말대로 민 여사가 주방에서 직접 요리하는 건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뜸했다.
“기억 안 나니? 태호 어릴 때 우리 집 놀러 오면 내가 만든 손만두를 그렇게 좋아했잖니.”
“그랬었나?”
그때만 해도 민 여사는 야무지게 만두를 먹는 태호를 보며, ‘똘똘한 녀석, 사위로 삼으면 참 좋겠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집안이 서로 등을 돌리고 난 이후론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오히려 천재 소년이라 불리며 잘 나가는 태호를 볼 때마다 괜한 경쟁심과 시기심에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랬는데……. 민 여사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참, 사람 인연이라는 게, 내가 태호를 사위로 맞을 줄 누가 알았겠니?”
지금도 리아가 태호와 결혼하겠다고 말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대체 정혼이 뭐라고? 하고많은 집안 중에서 왜 하필 철천지원수 집안과 사돈을 맺어야 하는지 아직도 민 여사는 이해되지 않았다. 혹여 둘이서 남몰래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도 이왕 결혼한 거 잘 살아야지.”
“잘 살 거야, 엄마, 걱정하지 마.”
“그래야 하는데……. 난 리아가 저녁 잘 먹고 시댁으로 안 돌아간다고 할까 봐 겁나 죽겠다.”
민 여사의 쓸데없는 걱정에 민수는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 계획한 결혼인데……. 민수는 근질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만두피를 서로 겹쳐 꾹꾹 눌렀다. *** 혹시라도 식사 도중에 안 좋은 소리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리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며 수저를 들었다. 다행히 아직까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리아야.”
두 사람이 집 안에 들어서자, 민 여사는 한걸음에 리아에게로 달려왔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혀갔던 딸이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감격한 얼굴이었다. 민 여사는 정 여사가 태희에게 하듯 리아를 껴안고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아니, 왜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됐어? 제대로 먹기는 하는 거니?”
민 여사는 한참 동안 호들갑을 떤 이후에야 태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강 서방, 왔나.”
그녀 딴엔 최대한 노력했지만, 예의상 억지로 웃는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태호는 리아가 한남동에서 느꼈던 감정을 청담동에서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남의 집 귀한 아들, 사위가 되었다고 다운그레이드된 건 아니니, 너무 서러워하진 말도록.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내가 강 서방을 많이 좀 원망했었어.”
아니라 다를까. 드디어 식사 도중 민 여사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말이 튀어나왔다. 에고, 오늘도 저녁제대로 먹긴 글렀네! 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리아 유치원 다닐 때 충치로 고생했거든. 그래서 단 걸 못 먹게 했는데도 자꾸만 충치가 생기는 거야. 알고 보니까 자네 집에 갈 때마다 초콜릿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더라고.”
“엄마, 그 소린 왜?”
영구치도 아니고 어차피 곧 빠질 젖니인데, 썩으면 좀 어때서……. 리아는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지만, 민 여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자기 얼굴만큼 큰 초콜릿을 먹고 있더라고. 그거 자네가 준 거였다며?”
응? 정말? 리아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민 여사와 태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엄마, 왜 나한텐 그런 얘기 안 했어?”
“어릴 때 일 하나도 기억 못 하는 애한테 해서 뭐 하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초콜릿을 주던 건 기억난다. 아주 커다래서 너무너무 행복해했던 기억. 너무 행복해서 한동안 꿈도 꾸었었다. 그런데 그 초콜릿을 준 사람이 태호였다고?
“어머님이 손수 만드신 만두, 여전히 맛있네요.”
분위기가 어색해지려고 하자, 태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오래전인데, 아직도 맛이 기억나?”
효과가 있었는지, 민 여사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잊고 기분 좋게 활짝 웃었다.
“당연히 기억납니다. 제가 꽤 좋아했죠.”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릴 달고 살더니, 다 까먹은 우리 애들과는 다르네.”
“워낙 어머님이 해주신 만두가 맛있어서요.”
리아는 겉으론 티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때 로미오 어쩌고 하면서 기사 냈을 때도 그러더니, 어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저리 잘하는지. 친딸인 리아가 먹기에도 민 여사의 손만두는 그저 그런 평범한 맛이었다. 솔직히 주원식품 냉동만두가 열 배는 더 맛있을 거다. 그런데도 태호는 맛있게 먹는 연기를 하며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그의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기에 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일까? 저녁이 끝날 때쯤에는 민 여사의 얼굴에 머물던 그림자가 말끔히 씻겨나갔다. 아직도 태호를 사위로서 흡족해하는 건 아니지만, 리아가 맘고생 할 거란 불안이 얼마만큼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친정 방문엔 큰 성과가 있었다. ***
“덕분에 엄마가 한시름 놓으신 거 같아.”
한남동에 도착해 태호가 시동을 끄자, 리아는 안전벨트를 풀며 말을 건넸다. 오늘 밤 민 여사는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5년 후에 갈라설 땐 갈라서더라도, 함께 사는 동안만큼은 조금이라도 민 여사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적진으로 시집간 딸을 걱정하며 민 여사는 하루하루 마음을 졸일 게 뻔하니까. 솔직히 오늘 태호가 민 여사 앞에서 괜찮은 사위를 연기할 줄은 몰랐다. 묻는 말에 빈정거리지 않고 대답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민 여사가 예민한 편이라고 말했었는데 그걸 기억해준 걸까?
“오늘 고마웠어.”
진심이었다. 그 말에 태호는 피식 입꼬리를 비틀며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말로만 고맙다고 할 거야?”
이런, 또 시작이네! “얼마면 돼?”라고 허세를 부리려던 리아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도 그는 그녀의 말을 이렇게 받아친 적이 있었다.
―말로만 축하해줄 거야?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살아났다.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초콜릿을 건네주던 꼬마에게 감사의 표시로 뺨에 뽀뽀해주던 게 생각났다. 그 초콜릿을 건넨 꼬마가 태호였다는 사실을 오늘 알아버렸고. 그렇다면……? 오늘만큼은 예전의 방법으로 고마움을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리아는 태호의 뺨에 입술을 가져가려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리아가 다가오자, 저절로 그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리아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그의 입술에 촉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찰나 같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뺨이나 입술이나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정말로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는 재빨리 입술을 뗐다.
“그만 들어가자.”
그래도 뭔가 어색한 리아는 차에서 내리려 서둘러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태호는 운전석에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들어가?”
리아가 독촉하자, 태호는 천천히 안전벨트를 풀었다. 하지만 손잡이를 잡는 대신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리아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받치며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