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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벗어, 벗으라니까. (24/81)

24. 벗어, 벗으라니까.2021.05.23.

침실에 돌아와서도 빨간 드레스를 입은 리아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커튼을 걷어 방을 어둡게 해도 마찬가지였다. 심장 박동은 아까보다 더 빨라진 것 같고, 후끈후끈 열도 오르는 것 같았다. 왜 리아는 사람 홀리게 예뻐서 이리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빈속에 5잔이나 마신 커피 부작용이 이제야 나타나는 걸까. 태호는 두근거림을 가라앉히려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 들뜬 감정이 진정되려는 데, 달칵, 문이 열렸다.

“강태호?”

혼동으로 몰아놓은 장본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겨우 진정됐던 심장이 리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치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잠든 줄 알고 도로 나가겠지. 태호는 대답 대신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리아는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어서 이곳을 나가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태호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데 갑자기 목덜미에 시원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 딴에는 걱정한다고 열이 있는지 알아보는 거였지만, 태호의 몸은 그 손길 때문에 식어가던 열기가 다시 화르르 불타올랐다. 가뜩이나 수면 부족에 카페인 과다 섭취까지 합쳐져,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서 미치겠는데……. 제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태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빙그르 몸을 돌리자, 리아는 순식간에 그의 몸 아래 깔린 자세가 되어버렸다. 리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듯 잠시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아야, 제발.”

태호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며 쥐어짜듯 겨우 내뱉었다. 그러다 보니 탁하고 거친 소리가 되고 말았다.

“왜 그래?”

아까보다 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리아가 물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열에 들뜬 것처럼 힘겹게 들렸다. 정말 어디가 아픈가? 리아는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재빨리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목덜미와 마찬가지로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열나는 것 같아.”

재빨리 품에서 빠져나온 리아는 태호의 가슴을 밀어 그를 침대에 눕혔다. 바보야, 이런 몸으로 출근한 거야? 이렇게까지 안 좋은 줄 알았으면 출근하지 못하게 막을걸. 출근하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잠만 잔 자신이 리아는 또 한 번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이랬어?”

리아는 그가 아파서 몸에 열이 나는 걸로 오해한 것 같았다. 너 때문에 뜨거운 건데……. 네가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든 건데……. 태호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고, 아픈 척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를 가만히 놔둘 테니까. 리아가 방을 나가면 찬물 샤워로 몸을 식히면 그만이다.

“……아침부터, 조금 이상했어.”

그는 뜸을 들이며 대충 둘러댔다.

“괜찮을 거야.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하지만 태호의 다음 말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리아의 손길에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아프다고 하면 가만히 놔둘 거란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편하게 하고 있어.”

리아는 빨간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더니 그의 위에 올라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신속하게 풀기 시작했다. 얼마나 몸이 안 좋으면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누운 거야? 한 번도 이런 모습의 태호를 본 적이 없기에, 리아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혹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쭉 몸이 안 좋았던 건 아닐까? 고개를 숙이고 단추를 푸느라 긴 머리카락이 그의 살갗에 닿았지만, 생각에 잠긴 탓에 리아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살짝 스칠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하, 고문을 해도 유분수지! 그를 미치게 하는 데에는 세상 그 누구도 주리아와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더는 못 하게 그녀를 막아야 하는데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너무 좋았으니까. 아까부터 꿈틀거리던 욕망이 시뻘건 입을 벌리며 그를 삼키려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도저히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호는 그만하라고 할 수 없었다. 단추를 풀다 미끄러진 리아의 손끝이 툭 공기 중에 드러난 맨살을 건드렸다.

“……으음.”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짜릿함에 입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진짜 돌아버릴 것 같다. 태호는 신음을 참으려 두 눈을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서서히 이성의 끈이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려는데 순간 그를 내리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눈을 뜨자, 침대에서 내려간 리아가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후, 다행이다. 태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

“이대로 우리가 결정해도 될까요?”

한참이 지나도 리아가 돌아오지 않자, 그레이스 박이 태희에게 의견을 물었다. KJ그룹의 차기 회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강대호 이사의 아내인데……. 괜히 나중에 한 소리 듣는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새언니는 안 내려올 거예요.”

태희는 안심하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방금 자신이 고른 구두를 신고 이리저리 거실 안을 걸어 다녔다. 파자마 차림에 킬 힐을 신은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안 내려오다니요?”

“신혼이잖아요. 지금 드레스 고르는 게 대수겠어요?”

“……아, 네.”

단번에 이해했다는 듯 그레이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신혼이라서 침대 위를 불태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태희의 말뜻은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은 분명 불꽃 튀게 싸우고 있을 거란 소리였다. 야하다고 안 된다고 하자마자, 갑자기 입겠다고 고집부리는 리아를 보며 태희는 은근히 놀랐다. 작은오빠의 말 한마디면 엄마도 골랐던 드레스를 내려놓는데, 그런 오빠에게 정면으로 대항하다니. 역시 생각했던 대로 새언니, 보통이 아닌가 보다. 아까 보니, 둘 다 꽤 심각해 보이던데……. 특히나 태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태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쟁이 시작되면 태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아는 신혼이니까, 아직 속속들이 태호에 관해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저렇게 대놓고 반대했겠지. 그러니 지금 두 사람은 열띤 언쟁을…… 말이 좋아서 언쟁이고, 한마디로 살벌한 부부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호랑이 작은오빠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새언니, 구미호 커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태희는 거실에서 나와 힐끗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침실에 방음이 잘되어 있다곤 하지만, 이쯤 되면 큰 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너무 적막하니, 오히려 흠칫할 정도로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이기든지 자신에게만 불똥이 튀지 않을 바라며 태희는 서둘러 거실로 돌아갔다. ***

“셔츠는 땀 흡수 안 돼서 안 좋아. 어서 이걸로 갈아입어.”

열이 조금 올랐을 뿐인데 리아는 환자 대하듯 그를 다루었다. 파자마를 가져오더니 아예 대신 갈아 입혀줄 기세였다.

“벗어, 벗으라니까.”

그가 누운 채로 꿈쩍도 하지 않자, 리아는 벌어진 셔츠의 깃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잠자코 있던 태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됐어. 내가 갈아입어.”

다행히도 아까 보단 거친 숨소리가 안정된 것 같다. 리아는 안도하는 마음에 순순히 파자마를 건넸다.

“속도 안 좋다며? 점심도 걸렀겠네.”

“……음.”

태호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셔츠를 벗고 파자마를 걸쳤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새 몇 번 봤다고 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벗은 상체를 덜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오히려 아프다고 하니까 크고 단단한 몸마저도 쉽게 깨지는 도자기처럼 약하게 느껴졌다. 모성애를 자극한다고나 할까?

“엄마가 그러는데 속 안 좋을 땐, 흰죽이 최고래. 내가 죽 가져다줄게.”

리아는 파자마 상의 단추를 잠그는 태호를 바라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호의가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발을 다쳤을 때 보여줬던 그의 행동에 그녀가 어리둥절했듯이 지금 그도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어찌 됐든 법적으로 한동안은 그녀의 남자였다. 그러니 그녀가 챙겨줘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그가 발끈할 수도 있으니, 좋게 설명하기로 했다. 원래 꿈보단 해몽이 좋은 거니까.

“너, 몸 안 좋으니까 우리 잠시만 휴전하자. 전쟁 중에도 포로가 부상하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치료해주잖아.”

휴전? 전쟁? 애석하게도 그녀의 비교는 지금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전쟁 중이라니? 누가 전쟁하는데……. 사랑의 포로라면 또 모를까.

“죽 가져올 때까지 잠깐 눈 붙이고 있어.”

태호가 다시 침대에 눕자 리아는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후.”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태호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을 환자 취급하는 그녀에게 웃음이 나면서도 이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자신에게도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게 꾀병을 부린다는 건가?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꾀병을 부린 적이 없었다. 동생 태희가 태어나기 전까진 꾀병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끙끙 아픈 척하는 태희를 보며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할까?’ 하며 눈살을 찌푸리곤 했었다. 하지만 리아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꾀병도 그리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 리아가 위층에서 내려오자, 태희는 쪼르르 달려와 리아의 양팔을 잡았다.

“그레이스는 막 돌아갔어요. 새언니, 그 드레스로 할 거 맞죠?”

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드레스를 고르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호에게 반항하려고 빨간 드레스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무난한 디자인으로 바꾸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미 돌아갔다니, 어쩔 수 없이 이 드레스로 정해야 할 것 같다.

“네, 이걸로 할게요.”

그 말에 태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머, 새언니가 이겼나 봐! 곧이어 리아는 또 다른 일로 태희를 놀라게 했다.

“오빠가 몸이 안 좋은가 봐요.”

“네?”

태희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작은오빠가 아플 리가 없는데……. 태희의 눈에 태호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작은오빠는 감기도 걸리지 않는 천하무적이었다. 온 가족 모두 독감에 걸려 쿨럭거릴 때도 언제나 그 혼자만 멀쩡했으니까. 태희는 그녀 나름대로 해석해보았다. 부부싸움에서 진 오빠가 성질을 못 이기고 드러누운 거네. 까칠한 오빠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야. 리아는 최 과장에게 흰죽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한 후, 드레스를 벗고 평소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게스트룸으로 돌아가니, 막 고용인이 음식 카트를 끌고 안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내가 할게요.”

리아는 고용인을 돌려보내고, 카트를 끌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태호는 침대맡에 몸을 기댄 자세로 앉아있었다.

“조금이라도 먹어봐.”

카트에서 꺼낸 죽 그릇을 쟁반에 올려 침대에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안 먹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는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하지만 해열제는 거절했다.

“약 먹을 정도는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여기 놓고 갈게. 엄마가 그러는데 해열제 꺼릴 필요 없대.”

리아는 해열제를 침대 밑에 놓고 빈 그릇을 카트에 옮겼다. 그러자 태호는 기대듯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가지 마. 잠깐만 이러고 있어.”

손을 뻗어 그녀를 잡은 태호는 침대에 누운 채로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리아의 허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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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서 그런가? 그가 너무나도 약해 보였다. 약해 보이다니……. 사귈 때조차도 보여주지 않던 낯선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아파하는 그를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리아는 자신을 끌어안은 채로 힘없이 누운 태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많이 아파? 어울리지 않게 약한 모습을 다 보이고.”

하지만 그새 잠들었는지, 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다행히도 아까보다 열은 내린 것 같다. 리아는 살며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았다. 손가락을 감싸는 매끄러운 감촉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에 꼭 감긴 태호의 눈꺼풀이 보일 듯 말 듯 작게 떨렸다. 리아야, 나는……. 태호는 잠든 척 고른 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한테만은 언제나 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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