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안 돼. 너무 야해.2021.05.19.
“아까 어머님께서 저 드레스 고르는 거 도와주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태희는 한주먹 꺼낸 팝콘을 입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외출을 안 한다고요?”
“아니, 아니.”
이번엔 팝콘을 오물거리며 태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쭈, 이젠 은근히 반말이네? 저절로 리아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마음 같아선 쌍둥이 민수에게 그러듯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여긴 홈그라운드가 아니니 우선은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새언니, 저 맘에 안 들죠?”
태희는 팝콘을 오물거리며 순진한 얼굴로 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이렇게 나오는데 마음에 들 리 없죠.”
리아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 시누이와 까지 밀당 할 여유는 없으니까.
“난 새언니가 되게 맘에 드는데……. 흑, 나, 상처받았어.”
이런 걸 보고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는 거다. 바짝 약을 올릴 때는 언제고 태희는 시무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리아에게 불쌍한 척 하는 연기는 통하지 않았다.
“아가씨, 시간 없어요. 빨리 외출 준비하세요.”
“드레스를 고르는 데 왜 외출해요?”
그럼? 인터넷으로 온라인 쇼핑이라도 하게? 그때 강 회장 집안일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최 과장이 거실로 들어섰다.
“아가씨,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어디에 세트업 하라고 지시할까요?”
“음……. 그냥 거실로 오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최 과장이 나가기가 무섭게 태희는 생글거리며 리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언니는 내가 맘에 안 들겠지만, 드레스 고르는 능력은 맘에 들 거예요.”
“그러려면 어서 외출 준비해요!”라고 쏘아붙이려는데 거실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렸다. 곧이어 최 과장의 안내를 받으며 여러 명의 직원이 종이 상자와 드레스가 걸린 이동식 행거를 끌고 거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실은 패션쇼 대기실처럼 각종 드레스와 패션 소품으로 가득 찼다. 리아는 잠시 문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게 다 뭐예요?”
“오늘 우리가 고를 드레스요. 전화 한 통이면 퍼스널 쇼퍼가 직접 방문하거든요.”
전 매장을 거실로 옮겨 놓았다 싶을 만큼, 드레스는 물론 구두와 액세서리가 담긴 상자가 주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게 바로 주원식품과 KJ그룹의 클래스 차이인가 보다. 신상품이 들어왔다며 먼저 연락을 주거나, VIP 쇼핑을 위해 잠시 스토어 문을 잠근다거나 하는 게 아닌, 매장 전체를 트럭에 실어서 고객의 집으로 가져오는 수준의 차이 말이다.
“새언니, 이거 어때요?”
태희는 아직도 파자마 차림이었지만, 전혀 어색함 없이 바쁘게 드레스를 골랐다. 아무래도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그레이스 박이라고 소개한 퍼스널 쇼퍼는 태희와 함께 꽤 다양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리아에게 권했다.
“사모님, 이 드레스는 어떨까요?”
그레이스는 진한 빨간색의 드레스를 골라 리아에게 내밀었다. 크고 작은 파티에 참석해 보았지만, 칵테일 드레스라면 모를까, 이브닝드레스까지 챙겨 입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마치 영화제에나 어울릴 것 같은 이브닝드레스를 보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과하다. 과해도 너무 과하다.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요?”
“에? 이게 뭐가 화려해요, 새언니. 이거 완전 심플한 디자인이에요.”
“그러지 말고 한번 입어보세요, 사모님.”
두 사람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입어보긴 했지만, 역시나……. 리아는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드레스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며 가슴골이 살짝 보일 정도로 파진 데다, 짝 달라붙는 디자인이라 몸 선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녀가 배우나 모델이라면 모를까, 왠지 얼굴이 화끈해지는 그런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태희와 그레이스는 리아와 정반대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대박! 새언니, 이거 완전 짱이에요.”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이 드레스를 사모님보다 잘 소화한 사람 지금까지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 의견에 귀 기울일 생각은 없었다. 드레스를 착용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니까. 너무 튀는 디자인 같아서 불편했다. 물론 군더더기 레이스나 과한 장식 없이 깔끔할 정도로 단순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몸매에 시선이 집중되는 드레스였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리아가 드레스를 벗으려 하자, 태희는 휴대폰으로 뭔가를 급히 찾더니 리아에게 내밀었다.
“새언니, 이거 좀 봐요.”
화면 속에는 배우 강수미가 지금 리아가 입은 드레스와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 누구 약 올리려는 거야?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눈이 되어 태희를 흘겨보았다.
“그죠? 새언니가 보기에도 언니가 훨씬 더 잘 어울리죠.”
“네?”
“보세요. 강수미는 가슴이 빈약해서 핀으로 고정했잖아요. 허리도 굵은 편이라서 선도 안 예쁘고. 근데 새언니는 수선할 필요도 없이 바로 입어도 되겠는데요, 뭘.”
정말? 사탕발림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귀가 솔깃해지고 말았다. 강수미를 질투하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그래도 배우인 강수미보다 어울린다고 하니까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유혹에 흔들리는 건 잠시일 뿐. 리아는 냉정한 현실로 눈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일반인. 강수미는 한류 스타였다. 괜히 같은 드레스를 입어서 비교될 만한 거리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막 드레스를 벗으려고 하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 뭐지?”
뒤를 돌아보자, 굳은 표정의 태호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싸늘한 분위기에 모두 일순간 조용해졌다.
***
“이사님, 오늘은 그만 들어가세요.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엔 제발 두 분, 싸우지 말고 모자란 잠이나 실컷 보충하세요.”
중역 회의가 끝나자, 남 비서는 거의 등 떠미는 식으로 태호에게 퇴근을 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잠을 좀 설쳤다 뿐이지, 하나도 피곤하진 않았다. 그러나 퇴근하면 리아를 볼 수 있다는 유혹에 태호는 못이기는 척, 사무실을 나섰다. 집에 가서 리아를 본다고 그녀를 끌어안거나, 다정한 말을 나누거나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그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렜다. 집에 도착하자, 최 과장이 다가와 리아와 태희는 지금 거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거실에 발을 들여놓던 태호는 순간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원래도 콩깍지가 쓰인 상태이긴 하지만,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리아의 모습에 숨이 막혀버렸다. 빨간색이 이렇게나 잘 어울렸던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깊게 파이진 않았지만, 보일 듯 말 듯 드러나는 가슴골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자꾸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어젯밤도 잠 못 이루게 하더니, 오늘 밤도 편히 잠자긴 그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싸늘한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게 다 뭐지?”
태호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태희는 태호를 보자마자 지원군을 만난 듯 쪼르르 다가왔다.
“와, 오빠 잘 왔어. LS그룹 창립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 고르는 중이었거든. 새언니, 너무너무 예쁘지? 근데 언니는 너무 화려하다고 싫대.”
화려하진 않았다. 리아 그 자체가 이미 눈부시게 화려한데 감히 드레스 따위가 그녀의 화려함에 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리아의 저런 모습을 자신 외에 다른 남자가 본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괜히 다른 수컷의 관심을 끌게 할 순 없었다. 딱딱한 사무 정장 차림일 때도 못 견디게 예뻐서 불안해 미치겠는데……. 저런 모습으로 파티에 간다니, 절대로 안 된다!
“안 돼. 너무 야해.”
태호는 겉으론 평정을 가장하며 차갑게 말했다.
“에? 이게 야하긴 뭐가 야해?”
기가 막힌다는 듯 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인 줄 알아? 왜 그럴 거면 치마저고리 입으라고 그러지?”
태희는 목청을 높여가며 고리타분한 태호의 안목을 나무랐다. 그러나 태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너나 실컷 입어. 하지만 리아는 절대로 안 돼.”
“왜 안 돼? 새언니 라인에 딱 어울리는데. 새언니, 완전 콜라병 몸매잖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둘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리아는 투덕거리는 태호와 태희를 바라보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었다. 그녀가 입을 드레스를 가지고 왜 타인이 저리도 심하게 언쟁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원래 입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태호가 저렇게 나오니 은근히 입고 싶다는 반발심이 일었다. 절대로 안 되다니. 뭐가 절대로 안 돼? 그리고 야하다니? 이게 뭐가 야한데? 가슴골이 보여서 그런가? 그게 뭐 어때서! 아주 많이 파인 것도 아니고 보일락 말락 파진 것뿐이다. 강수미와 비교당할까 봐, 안 입겠다고 한 거지, 야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혹시 강수미가 입었던 드레스라서 못 입게 하는 걸까? 옛 여친이었으니, 그가 이 드레스를 모를 리가 없었다. 누가 알아? 사진에 안 찍혔지만, 영화제에 함께 참석했었는지…….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불길이 속에서 화르르 타올랐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절대로 질투심은 아니다. 그냥 조금, 아주 조금, 기분이 거슬릴 뿐이다.
“나, 그냥 이걸로 할게요.”
리아의 결정에 오누이의 언쟁이 멈췄다.
“난 분명 안 된다고 했어.”
태호는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리아도 기분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난 분명 이걸로 한다고 했어.”
순간 두 사람의 싸늘한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파직, 불꽃이 튈만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눈싸움이었다. 먼저 눈길은 거둔 쪽은 태호였다.
“좋아, 마음대로 해.”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던 태호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거실을 걸어 나갔다. 흥, 강수미가 입었던 드레스와 같은 걸로 골라서 화가 난 게 분명하네. 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멀어지는 태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언니, 구두는 어떤 걸로 할까요. 음, 보석은 뭐로 골라야 하지?”
“아무래도 다이아몬드가 어울리겠죠?”
태희와 그레이스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다양한 스타일의 구두와 보석을 골랐다. 하지만 리아의 관심은 거실을 걸어 나간 태호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처음엔 야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반대하는 태호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도 그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퇴근했다. 워커홀릭에 가까운 그가 이렇게 일찍 집에 오다니, 웬일이지? 혹시 저번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아닐까,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두 눈이 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목소리도 조금 가라앉은 것 같고. 그녀가 자신의 의견을 무시해 화가 나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원래부터 그랬었나? 아침에 늦잠 자느라 출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같이 한배를 탄 동지로서, 상대에게 너무 무심한 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싸운 건 싸운 거고, 괜찮은지 한번 물어라도 보고 와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저 잠시만요. 잠깐 위층에 올라갔다 올게요.”
리아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거실을 빠져나왔다. 긴 드레스 자락이 걷기에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옷을 갈아입고 갈 여유는 없었다. 리아는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커튼을 닫았는지 어둑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완전히 어두운 것은 아니어서 어렴풋이 침대 중앙에 누워 있는 태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옷을 그대로 입을 채로 한쪽 팔을 이마에 얻고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불을 켤까도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잠든 상태라면 수면에 방해라도 될까, 그대로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강태호?”
나직하게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들었나? 리아는 매트리스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에 올라 태호에게 다가갔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역시나 그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리아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열이 있는 건 아닐까? 한쪽 팔을 이마에 얻고 있으니, 열을 재볼 수도 없고……. 목덜미라도 만져봐야 하나? 리아는 살며시 귀 뒤쪽 목덜미를 감싸듯이 만져보았다. 은근히 미열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앗.”
눈 깜짝할 순간, 빨려들 듯 단단한 품에 갇혀버렸다. 단숨에 그녀의 몸이 그의 몸 아래 깔린 자세가 되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리아야, 제발.”
열에 들뜬 탁한 목소리와 함께 위험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향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