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밤잠을 설치는 이유야 뻔하니까2021.05.16.
그날 밤, 리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누군가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져서일까? 몸은 닿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인 것 같고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와 몸을 뒤척이는 소리 하나하나가 심장을 콕콕 내리눌렀다. 그러다 보니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시계는 아침 9시를 가리켰고 태호는 이미 출근한 후였다. 아무리 형식적인 부부라지만, 출근하는 것도 모르고 잠만 자다니……. 조금은 자신이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일은 주말이고 월요일부턴 그녀도 출근해야 하니까, 게으른 것도 오늘까지 만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정원 테라스에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정 여사가 그녀를 거실로 불렀다.
“어젠 미안하게 됐구나. 회장님이 가끔 그렇게 주책을 부리신다. 네가 이해해라.”
“네?”
시어머니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여사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고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난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 결혼 전부터 내가 널 예뻐한 것도 아니고, 막말로 원수나 다름없는 집안에서 온 너를 내가 자상하게 대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어머니. 저도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는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살게 굴거나 박대하진 않으마. 그것도 일종의 감정 소비거든. 그리고 사이가 어떻든 옳고 그름은 정확하게 따져야 하니까. 어제 일은 회장님이 실수한 거 맞아. 그래서 난 거기에 관해 사과하는 거고.”
말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경청하는 리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정 여사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으니까, 내가 어떤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알 거라 믿는다.”
그 말은 강 회장과 언쟁을 부렸던 리아도 사과하는 게 좋을 거라는 뜻이다. 원래 대하기 어려운 상대는 대놓고 앞에서 화내는 게 아니라, 은근슬쩍 돌려서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저도 어제 좀 심했습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리아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상대가 먼저 낮추고 나오는데 그녀 혼자만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을 순 없으니까. 리아가 사과하자, 정 여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차를 들이켰다. 말귀를 잘 알아들어 다행이다. 못 알아듣고 눈만 끔뻑끔뻑하면, 한 소리 하려던 참이었는데……. 역시 태호의 짝으론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태호에게는 착하고 온순한 아내보다는 톡 쏘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아내가 어울릴 테니까.
“그래도 이젠 한 가족이 되었으니, 나도 너와의 관계 호전을 위해 노력은 하마.”
얼핏 들으면 좋게 들리겠지만, 리아는 토씨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정 여사는 ‘노력하마.’라고 하지 않고 ‘노력은 하마.’라고 말했다. 그건 호전해도 그만, 못 해도 그만이라는 뜻이다. 어차피 5년 살고 헤어질 거니까 문제 될 건 없다. 만약에 태호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다면, 깊게 상처받았을 테지만……. 리아는 자신 앞으로 내온 찻잔을 가만히 입에 가져갔다. 시중에선 구할 수도 없는 최상급 차였지만, 씁쓸한 맛이 그녀 취향은 아니었다. 어쩌면 시월드에서 마시는 차라서 더 쓰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저번에도 얘기했다만, 집안 행사는 일일이 챙길 필요 없어도 공식 행사에는 나가줘야 한다. 다음 주에 LS그룹 창립 파티가 있는데 이번엔 네가 태호와 참석해라. 원래는 태문이네가 참석하는데, 갑자기 해외 출장 일정이 잡혔거든.”
LS그룹은 재계 서열 상위 5위 안에 드는 기업으로 해마다 열리는 창립 파티에는 막강한 재계와 정계 인사가 모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나 초대받을 수 없는 파티로도 유명한데, 리아네 부모님인 주 회장과 민 여사는 아직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재계 200위 안에 겨우 드는 중견기업에게까지 기회가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 재벌끼리도 그들만의 리그가 따로 있어서, KJ그룹이 메이저 리그라면 주원식품은 마이너 리그였다.
“모두에게 첫선을 뵈는 자리니까, 빈틈없이 준비하길 바란다.”
아이돌 데뷔 쇼케이스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뭘 빈틈없이 준비하란 거지? 리아가 뭐라고 물으려는데 파자마 차림의 태희가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에 들어왔다. 부스스한 얼굴을 보니 막 일어난 것 같았다.
“어머, 태희야.”
태희를 보자, 엄숙하던 정 여사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환하게 웃는 입매 하며 딸을 바라보는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완벽한 엄마 미소였다.
“아직 10시밖에 안 됐는데 왜 일찍 일어났니? 푹 자지 않고.”
“아하암, 배고파서 깼어.”
늦게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아니면 외동딸이어서 그런지 막내딸을 향한 정 여사의 사랑은 차고 넘쳤다. 정 여사는 태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연이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리 아가, 아침 뭐 먹을래?”
딸에겐 저리 다정하게 나오는 정 여사가 자신은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다니……. 다정한 사람이 아닌 게 아니라, 며느리에게 다정해지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리아는 쓴웃음을 삼키며 다시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으, 기분이 그래서 그런지 아까보다 더 맛이 씁쓸한 것 같다.
“참, 태희야, 너 아침 먹고 오후에 새언니, 드레스 고르는 것 좀 도와주렴.”
“내가?”
“어차피 너도 파티 참석할 건데, 드레스 골라야 하잖니.”
“그러지 뭐.”
“새아가, 오늘 오후 시간 괜찮지?”
시간이 괜찮겠냐고 물었지만, 사실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리아는 대답을 미룬 채, 천천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태희와 쇼핑하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거 없다. 퉁퉁 불어 터진 라면을 찍소리 안 하고 먹은 걸 보면 막내라서 철은 없지만, 성격이 나쁜 것 같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정 여사는 태희가 아니라 리아에게 먼저 시간이 되냐고 물어봐야 옳았다. 오후에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소한 일이라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 나중엔 당연히 여길 게 뻔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리아는 일부러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마시면 마실수록 차 맛이 참 쓰네요, 어머니.”
질문과 동 떨어진 말을 꺼내는 리아에게로 두 모녀의 시선이 모였다. 리아는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오후에 약속이 있긴 한데, 어머님 말씀이니 어쩌겠어요? 제가 약속을 취소해야지.”
“그래, 잘 생각했다.”
정 여사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콕 집어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야지. 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정 여사에게 다가갔다.
“저한테 빚 한번 지신 거예요. 다음번엔 어머님이 저를 위해 약속 취소해주실 거죠?”
“뭐?”
그제야 정 여사는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입매를 굳혔다. 태희만 무슨 소린지 모른다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전 이만 외출 준비하러 올라갈게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리아는 정 여사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왔다. ***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뭐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태호가 건성으로 묻자, 남 비서는 한숨을 내쉬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눈이 발갛게 충혈됐습니다. 어제 통 못 주무셨어요?”
태호는 출근과 동시에 커피를 찾았고, 지금 내려놓은 잔까지 합하면 벌써 5잔째였다. 누가 봐도 이건 꼬박 밤을 새워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응.”
이번에도 태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검토하던 서류철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역 회의까지 얼마 남았지?”
“10분 정도 시간 있습니다.”
“그래?”
남 비서는 묵묵히 커피를 들이켜는 태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모았다. 보통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남자가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다면 이유는 뻔했다. 하지만 태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결혼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남 비서는 그래서 더 속이 탔다. 혹시 밤새도록 싸우기라도 했나? 신혼여행 가서 아무 문제 없었다고 안도했는데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 안 새다가 다시 집에 와서 새는 꼴인가? 별별 생각에 남 비서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다 마신 커피잔을 남 비서에게 돌려주던 태호가 그 모습을 보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표정이 왜 그래?”
“선배, 정말 아무 일 없는 거 맞아요? 어째 꼴이 밤새도록 부부싸움 하다 온 거 같죠?”
흥분했는지 남 비서의 입에서 이사님 대신 선배라는 호칭이 튀어나왔다. 대학 후배이며 회사 직속 부하인 남 비서는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고 완벽히 태호를 보좌했다. 그래서인지 이런 태호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후, 녀석……. 회의 늦겠다. 이만 가자.”
태호는 남 비서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부싸움이 아니라 너무 설레서 잠을 설쳤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잠만 설쳤나? 소화도 안 된다. 결국 점심도 거르고, 커피로만 배를 채우는 중이다. 다행히도 업무에는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류만 덮으면 어젯밤 일이 떠올라,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커피를 많이 마셔서 두근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어제 일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입술엔 리아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입술에 묻은 소스를 닦아줬겠지만,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지는 순간 저절로 입 안으로 빨아들였고 매끄러우면서도 말캉한 촉감에 숨이 멎었다. 그 느낌. 그 체취. 그 순간. 그대로 껴안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와 앉아서 음식을 먹었지만, 머릿속에선 온통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다는 욕망뿐이었다. 그러니 한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잠이 올 리 없었다. 옆으로 조금만 손을 뻗으면 그녀를 안을 수 있는데……. 몸을 뒤로만 굴려도 그녀의 따뜻한 몸을 느낄 수 있는데…….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건 그 자신이었다. 약속을 깨트릴 순 없었다. 함께 침대에 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한 지가 언젠데……. 정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속에서 일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얼굴에도 나타났나 보다.
“저런, 강 이사. 얼굴이 많이 상했네. 이번 주는 그냥 집에서 쉬지, 그랬나.”
태호가 회의실에 들어서자, 최 전무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강 이사가 출근하지 않아도 우리 회사 잘 돌아가네.”
태호의 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며 다른 중역 모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사람 생각이 다 비슷하다고 태호가 어떤 이유로 밤잠을 설쳤는지 넘겨짚는 것 같았다. 갓 결혼한 남자가 밤잠을 설치는 이유야 뻔하니까.
“자, 자. 실없는 소리 그만들 하고 회의 시작합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딱딱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회의실 최고 상석에 앉은 한정안 사장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한 사장도 티는 내지 않았지만, 태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다 큰 성인 남녀가 결혼했으니, 아무리 결혼 전엔 앙숙이었더라도 신혼여행 도중 사건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원래 몸 따로 마음 따로 노는 거다. 정신적으론 먼 사이라도 육체적으론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는 게 남녀 사이고.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몸의 대화로 시작한 관계는 언제든지 마음의 대화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손을 써야지, 안 그랬다간 큰일나겠군. 한 사장은 애써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회의 자료로 눈길을 돌렸다. ***
“아가씨?”
외출 준비를 끝내고 아래층에 내려간 리아는 아직도 파자마 차림인 태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팝콘을 옆에 끼고 TV를 보며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가씨? 슬슬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태희가 팝콘을 입에 넣으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왜요?”
‘왜요?’라니! 드레스 고르는 거 도와준다며! 마음 같아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태희는 그녀의 여동생이 아닌 태호의 동생이다. 할 수 없이 리아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외출하려면 준비해야죠?”
“저 외출 안 할 건데요?”
“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리아에게 태희가 한 번 더 확인시켰다.
“외출 안 한다고요.”
얘, 뭐니? 막내라서 철은 없지만, 성격이 나쁜 것 같진 않다고 한 거 모두 취소다. 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태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