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몸 따로 마음 따로2021.05.12.
“내 딸이지만, 리야, 걔도 참 무심해. 어쩜 신혼여행 잘 다녀왔다고 전화 한 통 하고 끝이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민 여사가 한탄조로 투덜거렸다. 주 회장이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지금, 그녀의 하소연 상대는 오롯이 민수였다. 민수는 또 시작이냐는 얼굴로 그녀 손에 다시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엄마,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잘 지내니까 연락 없겠지. 그리고 리아, 엊그제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어. 이제 겨우 이틀 지났다고.”
“아이고,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너도 참 무심하다.”
민 여사는 이번엔 야속하다는 얼굴로 민수를 흘겨보았다.
“민수야, 지금 리아가 어디에 있니? 시댁에 있잖니, 시댁. 호랑이 굴에 끌려간 거랑 뭐가 달라? 이틀이 아니라, 이분만 있어도 숨 막히는 곳이 시댁이라고. 네가 시월드를 알아?”
직접 시집살이해 본 적은 없지만, 워낙 주위에서 생생하게 전해 들은바, 시월드가 어떤 곳인지 충분하게 간접 체험한 민 여사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내 딸은 절대로 시집살이 안 시킬 거야!’라고 노래를 불렀다. 일주일만 시댁에서 지내고 바로 신혼집으로 간다고 하니, 엄밀히 따지자면 시집살이까진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민 여사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라면 하나 제대로 못 끓이는 딸이 괜히 시댁 식구에게 책이라도 잡힐까 봐 걱정스러웠다. 요즘 시대에 요리 못하는 게 흠도 아니고, 뜨거운 물만 붓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즉석 제품이 넘쳐난다곤 하지만, 그래도 강씨 집안이 어디 보통 집안인가? 평소에 사이좋던 집안으로 시집가도 시댁이 되면 분위기가 싸해진다는데 리아는 지금 적진과도 같은 강 회장 집에 혈혈단신으로 들어간 처지였다.
“엄마도 참. 리아 성격 몰라서 그래? 걔가 시월드라고 기죽을 애야?”
민수의 말에도 민 여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닮아 리아의 성격이 보통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리아만 두고, 막 불어 하거나 독어로 대화는 하는 건 아니겠지? 리아는 영어밖에 못하는데…….”
이젠 별게 다 걱정이었다.
“그건 아닐 거야, 엄마. 그 집 막내딸 태희, 걘 영어도 잘 못 해.”
“정말? 불행 중 다행이네.”
다시 젓가락을 든 민 여사는 식탁에 놓인 민어구이를 보자, 울컥 목이 멨다. 우리 리아가 좋아하는 반찬인데…….
“얘가 끼니는 제대로 챙기고 있으려나? 그 집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어쩌니?”
“일류 요리사가 요리할 텐데, 뭘. 그리고 리아, 아무거나 잘 먹잖아. 아프리카에 떨궈놔도 코뿔소 잡아먹고 살 거라며.”
“후, 그렇긴 한데…….”
아예 아프리카로 보냈으면 이보단 덜 걱정할 텐데……. 민 여사는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꼬르륵―. 리아는 침대에 누워, 슬픈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1년 유예를 받아냈지만, 뱃속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하는 일이 있더라도 억지로 먹어둘 걸 그랬다. 아래층에 내려가 뭐라도 먹을까? 하다가도 저번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까 꾹 참았다. 그래, 이참에 살이나 빼자. 저녁 굶으면 살 쫙쫙 빠진다잖아! 그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여기서 더 뺄 살이 어디 있어! 잘 먹어야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도저히 안 되겠다!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온 리아는 소리 내지 않게 조심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태희도 집에 있고, 저번에 라면을 끓이면서 주방 구조도 눈에 익혔으니까 지난밤과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슬리퍼도 단단히 챙겼다. 주방에 들어선 리아는 저번에 열어본 건 음료 전용 냉장고를 지나쳐, 음식 전용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
냉장고 문을 연 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왜 또 텅 빈 거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텅 빈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녁 식탁에 올라온 음식은 하나도 없고 식자재만 잔뜩 쌓여있었다. 식자재 냉장고인가? 요리 냉장고는 또 따로 있나? 그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은 한 번 식탁에 올라간 음식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다 버려.”
“꺅!”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언제 왔는지 태호의 얼굴이 아슬아슬하게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리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애, 떨어질 뻔했잖아!”
“놀랐다면 미안. 진짜로 애 떨어진 거였으면 아버지 상심이 크셨겠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태호가 말했다. 리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아까 분명히 등 돌린 채 자고 있었는데, 언제 깨서 따라온 거지?
“오늘도 잠이 안 와?”
“응.”
“배고파서?”
“……응.”
아니라고 해봤자,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 때문에 아무 소용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태호가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므라이스 해줄까?”
“햄 넣어서?”
“응, 햄 넣어서.”
상대가 저렇게 선의를 보여주는데, 자존심에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리아는 잠시 ‘적과의 동맹’을 맺기로 했다. ‘적과의 동침’도 하는데 동맹 하나 못 맺을까! 그렇게 해서 리아는 태호는 한밤중 서로 힘을 합쳐 야식을 만들게 되었다. 이제부터 관계를 호전할 거라고 선언까지 했으니,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석 밥이랑 햄이 거기 있을 거야.”
“여기?”
태호가 가리키는 찬장을 열어본 리아는 또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름도 당당한 주원식품 즉석 밥과 브런치 햄 통조림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놀라운 건, 그것 말고도 주원식품 제품이 곳곳에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뭐지? 경쟁사 제품을 집에 놓고 분석이라도 하나? 아니면 단지 맛이 뛰어나서? 리아가 통조림을 들고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태호가 옆으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그것만 드셔. 원래 ㈜정직이었을 때, 아버지가 관리하시던 제품이었거든.”
두 회사로 쪼개지면서 KJ푸드는 간장, 고추장, 카레, 설탕 같은 장과 조미료 부분과 껌, 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스낵 부분을 주원식품은 라면, 당면 같은 면류와 소시지, 햄 같은 가공 육류 부분을 나누어 가졌다. 나중에는 두 회사 모두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게 취급 분야를 넓혔지만, 초기에는 구분이 확실했다.
“회장님이 가공 육류 부분을 관리하셨어?”
“응.”
어째서인지 KJ푸드에선 다른 제품은 다 생산해도 소시지, 햄 같은 가공 육류는 생산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라면도 건면은 생산하지 않고 생면만 생산한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달걀 좀 풀어줄래?”
태호의 목소리에 리아는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 그래.”
그릇을 꺼내 달걀을 깨뜨리려는데 갑자기 태호의 손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움찔한 리아는 손에 과도하게 힘을 준 탓에 퍽 소리 내며 달걀을 부서뜨렸다.
“뭐야?”
“머리 묶어줄게. 불편하지 않아?”
“……아, 그래.”
태호는 그녀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주고는 걸리적거리는 파자마 소매까지 위로 걷어줬다. 그러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리아는 부서진 달걀 껍데기를 집어내며 힐끔 태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인이었던 시절, 태호는 그 누구보다 자상했었다. 항상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고, 불편할까 소매를 걷어주고, 추울까 재킷으로 감싸주고, 흙탕길이라고 업어주는 등등.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헤어진 후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차갑게 변해버렸지만……. 결혼하고 난 후에는 조금 태도가 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강태호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예전 버릇이 튀어나오면 저절로 바보 같은 감성에 빠지게 된다. 정말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 뿐인데…….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그가 고개를 돌리자, 리아는 재빨리 달걀을 집어 퍽 소리가 나게 힘주어 깨뜨렸다. 아까처럼 달걀이 산산조각이 나며 껍질이 그릇 안에 쏟아졌다.
“아이 씨.”
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어려운 부탁이었나? 달걀 깨기가 어려운지 리아는 달걀을 형체도 알 수 없는 수준으로 박살 내고 있었다. 저렇게 깨면 껍질이 남을 텐데……. 혼자 멀뚱멀뚱 기다리기 지루할까 봐, 간단한 부탁을 한 건데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다. 힐끗 옆으로 훔쳐보니, 달걀 깨뜨리기에 심취한 듯 리아의 두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미치겠다! 정말. 너무 귀여워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성격 참 이상하다고 한다면 할 말 없겠지만, 태호는 그녀의 낑낑거리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집중하느라 미간에 주름 짓는 모습도 귀엽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행동도 깜찍하고, 눈을 부릅뜨는 것마저 예뻤다. 그럴 때마다 그는 뒤에서부터 그녀를 와락 끌어안곤 했었다. ‘뭐야, 왜 훼방하고 그래?’라고 소리 지르는 리아를 벽으로 끌고 가 키스를 퍼부었다. 처음엔 약 올리냐고 화내던 그녀도 나중엔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키스를 돌려주곤 했었다.
하지만 헤어지고 난 후에는……. 애써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외면해야만 했다. 그를 향해 언성을 높이는 리아를 대하면서도 속으론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과 힘겹게 싸워야만 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지금도 이대로 껴안고 싶은 충동을 물리치느라 얼마나 힘든지……. 리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므라이스 하나 만들면서 뭐 저리 심각하지? 리아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요리에 열중하는 태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보니, 미슐랭 별 저리 가라, 훌륭한 음식이 나오려나 보다. 드디어 끝났는지 그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다 됐어? 어디 봐?”
리아는 재빨리 태호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뒤에서 끌어안으려 팔을 뻗었다. 앗! 다행스럽게도 껴안기 직전에 재빨리 팔을 거두었다. 내 정신 좀 봐.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그녀도 모르게 예전 버릇처럼 뒤에서 껴안으려 했다. 태호가 요리하면 항상 그런 식으로 뒤에서 끌어안고 맛을 보곤 했었다. 미친……. 김유신 장군처럼 애마의 목을 치진 못해도 손을 꼬집기라도 할걸. 그녀의 어리석은 손은 얼마 후, 또다시 실수를 저질렀다. 데미그라스 소스의 간을 보던 그의 입술에 소스가 묻자, 리아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버렸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태호의 입술에 손이 닿고 난 후였다. 부드러우면서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또 이놈의 버릇!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인데도, 왜 이러는 거야! 이런 걸 보고 몸 따로 마음 따로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반사행동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소스를 훔친 그녀의 손이 순식간에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번엔 뜨겁고 촉촉한 감촉에 손끝에 느껴졌다. 이것도 과거를 기억하는 그의 몸이 일으킨 반사적인 행동일 것이다. 순간 두 사람 모두, 잠시 얼어 붙인 듯 굳어버렸다. 먼저 사태 수습에 나선 사람은 리아였다. 리아는 신속히 손을 빼내고는 자신의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걸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맛있게 먹는 퍼포먼스까지 해 보이자, 그제야 태호가 그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맛있다, 정말 맛있어. 고마워.”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진심으로 맛있었다. 사실 태호가 해준 음식은 모두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결혼 전 그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의 식성은 꽤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고맙다고 말로만?”
숟가락을 집으며 그가 빈정대듯 말했다. 됐다! 저리 삐딱하게 나온다는 건, 방금 일어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다. 리아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짐짓 허세를 부려보았다.
“얼마면 돼?”
“글쎄……?”
태호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해 본 소린데 정말로 값을 치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저번에 라면 끓여준 거, 이걸로 갚은 걸로 하자.”
“오케이, 좋아.”
리아가 흔쾌히 거래를 받아들이자, 태호는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환하게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웃는 것도 아닌, 어딘지 모르게 뜻이 담긴 것 같은 묘한 미소. 그리고 더 이상한 건 그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거다. 리아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묵묵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말 거라고 여겼는데 어째서인지 두근거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행복해서 그런 거겠지? 엄청나게 배고팠는데 맛있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니까,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두근거리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