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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금욕한다고 죽진 않으니까 (20/81)

20. 금욕한다고 죽진 않으니까2021.05.09.

“질투 아니거든.”

맹세코 질투는 아니다. 질투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을 때나 생기는 거다. 백번 양보해서 희미한 흔적이 남았다면 몰라도 사사로운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질투일 리가 없어. 자신에게 세뇌라도 하듯 리아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질투가 아니면 뭐지?”

리아의 단호한 부정에도 태호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그가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몰라서 물어?”

태호를 피해서 뒤로 몸을 빼며 리아가 톡 쏘아붙였다.

“응.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아닌 거지, 끝까지 캐묻긴……. 정말 집요하다. 하지만 그런 성격이 오늘날 태호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했을 것이다. 대충 얼버무려선 쉽게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리아는 그녀 자신을 설득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었다.

“사업적인 파트너로서 경고하는 거야. 넌 지금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고 있으니까. 사생활이 깨끗해야, 후계자 경쟁에서 유리해. 자칫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골치 아프게 된다고. 네가 회장 자리를 차지해야, 내가 KJ푸드를 인수할 수 있잖아, 안 그래?”

말을 마친 리아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꼭 다문 입술이 마치 그를 향해 닫아버린 마음처럼 느껴졌다. 후, 그렇겠지. 태호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닫힌 마음이 그리 쉽게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벌써 낙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천천히 다가가기로 한 거니까.

“좋아.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성실히 계약을 지키는 건지, 말해봐.”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보라고? 딱히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에 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상세히 짚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리아는 이윽고 할 말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강수미와 스캔들 일으키지 마. 만약에 아직도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다면, 일주일 시간 줄게. 그 안에 끝내.”

그녀 나름대로 상대를 배려한 결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내일 안으로 해결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주일이나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태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방금 재계약했다고 말했을 텐데? 계약을 무르려면 위약금을 내야 해. 액수가…….”

“공적인 관계 말고, 사적인 관계를 말하는 거야.”

말을 중간에 끊으며 리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전속모델이라, 어쩔 수 없이 만나더라도 앞으론 공적으로만 대해. 그리고 주위에 있는 여자, 연인 사이든 썸만 타는 사이든 모두 정리하고.”

모든 여자?

“하하.”

터무니없는 말에 태호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듣는 거야? 어째서인지 리아는 그의 여자관계가 꽤 복잡하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본의 아니게 종종 핑크빛 소문에 휘말리긴 했다. 그렇지만 주위 여자를 정리하란 말을 들을 만큼은 아니었다. 정리할 여자가 없다고 해도 그녀는 그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지금 나 보고 수도승같이 살라는 거야?”

“스캔들로 얼룩진 사생활을 덮으려고 결혼까지 했는데, 스캔들 일으키지 말라는 소리가 그렇게 들려? 그리고 수도승처럼 사는 게 어때서? 평생도 아니고, 고작 5년인데, 그것도 못 해?”

못할 것도 없다. 아니, 벌써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리아는 뭐라고 반응할까? 후, 어디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냐며 비웃겠지? 태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자, 리아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5년 동안, 따로 애인 두지 말자는 말이 그렇게나 곤혹스러운 거야? 만약에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너무 강하게 나가다간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리아는 살짝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5년쯤 금욕한다고 죽진 않으니까. 너만 그러라는 거 아냐. 나도 수녀처럼 살 거라고.”

둘이 함께 금욕하자는 건데, 억울해할 건 없다고 본다. 그러나 태호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사람들 보는 앞에서 강수미와 끌어안았어?

리아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가 배우 강수미를 껴안았다는데 조금의 의심도 없다는 투였다. 비틀거리는 강수미를 잡아주다 그녀가 그의 품으로 쓰러지긴 했지만, 그건 아주 찰나였다. 누가 보더라도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리아에게 과장되게 말을 전했거나, 순간 포착으로 사진을 찍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짐작 가는 인물은 있었다. 한정안 사장의 외동딸인 한수진. 그녀 아니면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없었다. 태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사장의 딸이라는 이유로 자꾸만 옆에서 맴도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계속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도 영 불편했다. 그녀가 아버지 한 사장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그건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리아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반발 없이 수진을 떼어놓을까? 고민에 빠진 태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저래? 불쾌해서인지, 아니면 금욕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태호의 안색이 어두워 보였다. 그만큼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거야? 도대체 강수미 말고도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있는 거야?

―강태호, 여자관계 엄청 복잡하잖아. 솔직히 들이대는 여자가 한둘이겠어?

―비키니 사진을 DM으로 보내는 여자도 있대.

―저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랑 회식 도중에 말도 없이 사라졌다니까. 다음 날 둘 다 같은 옷 입고 회사로 출근하고. 그게 무슨 뜻이겠어.

수진이 지금까지 해온 말이 리아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분명 질투는 아닌데, 못 견디게 속에서 열불이 난다. 리아는 열기를 식히려 손으로 빠르게 부채질을 했다. 그런 그녀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태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해.”

어, 생각보다 순순히 결정을 따르네? 말만 그렇게 하는 건 아니겠지? 태호는 반신반의하는 리아를 소파에 남겨두고 책상으로 돌아가 컴퓨터를 끄며 말했다.

“지금 퇴근할 거니까, 함께 저녁 먹고 들어가지.”

“아니, 됐어.”

태호가 더 뭐라고 말하기 전에 리아는 서둘러 핸드백을 챙기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난 집밥 체질이라서, 집에 가서 밥 먹을 거야.”

집밥 체질은 무슨 집밥 체질? ‘세상은 넓고 맛집은 많다!’라고 할 정도로 리아는 외식을 즐겼다. 만에 하나, 그녀가 진정한 집밥 체질이라고 해도 친정집에서 먹는 밥이 집밥이지, 불편한 시월드에서 먹는 밥은 결코 집밥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단둘이 식사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괜히 데이트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았다. 강수미와 껴안은 사진을 본 지 얼마나 지났다고, 뭐가 예뻐서 단둘이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을까! 또 한 번 강조하지만, 절대로 질투는 아니다. 태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5분만 기다려.”

차를 가져왔다면, 먼저 가겠다고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오늘 그녀는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 함께 차를 타는 것도 피하고 싶으나, 그래도 함께 저녁 먹는 것보단 나을 테니 뭐라고 토를 달진 않았다. 다행히 교통이 혼잡하지 않아, 30분 만에 한남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댁에 발을 들여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아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왜 또 산 넘어 산인 거야! *** 에이, 그냥 밖에서 먹을걸. 평소엔 다들 따로따로 먹는다더니, 오랜만에 모두 비슷한 시간에 귀가했다며 또 함께 식사하잔다. 밥 생각 없다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배가 고팠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리아는 식당으로 향했다. 같이 밥 먹자는데 화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번에도 꾹 참아보기로 했다.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밥만 먹어야지!’ 굳게 다짐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강 회장의 입에서 핵폭탄급 발언을 흘러나왔다. 그것도 리아가 이제 막 한 숟갈 뜨려는 찰나에…….

“애 잘 들어서는 보약 한 첩 지어주마. 여보, 이번 주말에 당신이 새아가 데리고, 판 원장 만나봤으면 하는데, 어떻소?”

“풉.”

깜짝 놀란 리아는 뜨거운 국물을 꿀꺽 삼켜버렸다. 입안과 목구멍이 동시에 얼얼했지만, 그것보단 강 회장의 발언이 더욱더 뜨겁게 느껴졌다. 결혼식도 그렇게 서두르더니, 이 집은 번갯불로 멧돼지 통구이 하는 게 가훈인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 일이 꼬이기 전에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리아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강 회장에게 의견을 건넸다.

“저희 이제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숨 돌릴 시간 좀 주시겠어요?”

“아, 그래. 이번 주말은 너무 빠르겠구나. 그럼 다음 주말로 할까?”

지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일순간 짜증이 밀려왔지만, 며느리로서, 그리고 지성인으로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좋게 말로 설득하기로 했다.

“다음 주말이 아니라, 다다음 주말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말은 아직 아이를 갖기엔 너무 이르다는 뜻이에요. 형님 내외도 아직 아기가 없…….”

“너희는 태문이네와 다르지. 두 사람 사이에서 2세가 나와 줘야, 내 면목이 선다. 손주 태어나기만 하면 바로 KJ푸드 지분 넘겨주마.”

KJ푸드를 넘겨준다는 말은 귀가 솔깃할 정도로 좋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죠, 아버님. 전 회사도 나가야 하고, 지금 아이를 낳으면…….”

“그건 걱정하지 마라. 네 손으로 직접 키울 일은 없을 테니까.”

“육아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네’ 하고 따를 줄 알았는데, 리아가 또박또박 반론을 제기하자, 식탁 분위기는 어느새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태문과 소정, 태희는 어쩔 줄 모르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정 여사와 태호만이 태연하게 식사를 계속했다. 정 여사는 이미 리아와 대화한 적이 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저도 원해서 한 결혼,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리아가 강 회장의 애부터 낳으란 소리에 ‘네.’ 하고 따를 리가 없었다. 주책이라고, 벌써 손주 타령이냐고 한소리했건만, 강 회장은 정 여사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며느리에게 타박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며 정 여사는 모른 척 외면하기로 했다. 태호도 마찬가지다. 이미 회사에서 한바탕했기에 지금 리아가 전투 모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히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간 상황만 나빠질 뿐이다. 대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식탁 밑으로 손을 뻗어 리아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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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편이 옆에 있다고, 그러니 하고 싶은 말 모두 하라고. 그녀에게 제 뜻이 전달되길 바라며……. 태호가 살며시 손을 움켜쥐자, 리아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뭐야? 그만하라는 거야? 그러나 곧이어 그가 그녀 손등에 엄지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자, 리아는 손끝을 움찔거렸다. 이건……? 오래전 일이라, 그만 깜빡했는데, 손등에 원을 그리는 건 같은 의견이라는 둘만의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거지? 그의 동의에 용기를 얻은 리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 연애도 안 해보고 어쩔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모두가 찬성하는 결혼도 아니었고요. 결혼 전엔 서로 앙숙이었던 거, 아버님도 아시죠?”

리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오자, 강 회장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이런 관계에서는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아이 심리에도 좋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 관계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에요. 안 그런가요?”

와, 새언니 대박! 태희는 청산유수로 자기주장을 늘어놓는 리아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어 터지게 라면을 끓여놓고도 일부러 해장하느라 그랬다며 끝내주게 자기변명 할 때부터 알아봤다.

“계획이 조금 늦춰진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닙니다. 1년간의 유예 시간을 주세요. 그동안 저희 관계 호전시킬게요.”

강 회장은 아무 말 없이 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호는 강 회장만 알아볼 수 있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태호까지 저렇게 나오는데, 강 회장 혼자 밀어붙일 순 없었다. 할 수 없다는 듯 강 회장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후, 좋다. 서로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 아이부터 낳는 거……. 그래, 모두 행복한 가족을 이루려고 이러는 건데, 아이는 사랑의 축복일 뿐 사업의 수단이 될 순 없겠지.”

강 회장은 이대로 한발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신 둘 사이가 어떻게 호전되어 가는지, 한 달마다 보고하도록 해라.”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는 것도 아니고, 프레젠테이션을 할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보고해야 하는지 감은 잡히지 않았지만, 리아는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아가 순순히 동의하자, 강 회장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제야 나머지 식구들도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리아는 기운이 쭉 빠져버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1년이란 시간을 얻었는데……. 1년 후에는? 1년 후의 일은 1년 후에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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