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지금 그거, 질투야?2021.05.05.
“이게 뭐야?”
리아는 무심한 얼굴로 툭 던지듯 물었다.
“어제 회사에 강수미 왔었는데……. 하, 기가 막혀서!”
덤덤한 리아와는 달리, 수진은 못 볼 것 봤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태호가 강수미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 회의실에 갔다가 우연이 찍은 사진이다. 발을 헛디딘 강수미를 태호가 잡아주느라 제법 그럴싸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볼 때마다 화가 났다.
“회의실 앞에서 둘이 이러고 있더라고. 보는 순간 열이 팍 올라서 나도 모르게 사진부터 찍었어. 너한테 알려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만…….”
수진이 미안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리아는 다시 한번 사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진 잘 나왔네.”
이번엔 유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리아야, 태호 바람피우는 거 가만히 놔둘 거야? 아예 대놓고 이러는데?”
“……글쎄 어쩔까?”
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두 번째 얼음을 유리잔에서 꺼내 입에 넣었다. 어쩌긴 뭘 어째? 당장 전화해서 ‘야, 너 제대로 안 하지!’ 하며 한바탕하고 퍼붓고 싶다. 어제 찍은 거라면 시차로 피곤하다고 일찍 퇴근한 날이라는 건데. 와, 진짜 개 뻔뻔! 전 여친을 만나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아니다, 전여친이 아니라 현여친. 두 사람 아직 진행형일지도 모르니까. 하여간 그래놓고 집에 와선 우리는 이제 부부라느니, 한 팀이라느니, 자신이 챙겨줘야 편할 거라느니 등등 사탕발림을 한 거야? 하, 누굴 바보로 아나? 와그작, 리아의 입에서 얼음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너희, 따로 애인 두기로 한 거 아니지?”
유정의 질문에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은 없었다. 당연히 결혼하면 과거 인연은 말끔하게 정리하는 거로만 생각했다. 결혼을 제안했을 때, 태호는 분명 남자가 있다면 정리하라고 못 박았었다. 그래놓고선 자기는 뒤에서 호박씨를 깐 거야?
“급하게 결혼하느라 제대로 이별 못 했나 보네. 누가 아니? 마지막 인사로 껴안은 건지…….”
리아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수미를 껴안은 태호 표정이 아주 애틋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널 보내고 내가 어떻게 살아.’ 하는 것처럼. 물론 그가 누구와 사랑을 했든 말든 전혀 관심 없었다. 하지만……. 리아는 자꾸만 떠오르는 못마땅한 상상을 물리칠 수 없었다. 강수미와도 요트 타고 바다로 나가서, 자국 남는다며 비키니 끈을 풀어주고, 벗은 등에 선크림을 발라줬을까? 유치원생 소꿉장난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남녀가 만났는데 당연히 더한 장면이 연출됐겠지? 강수미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태호가 그녀와 입술을 겹치는 모습에까지 상상이 이어지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레모네이드 잔을 꽉 움켜쥐었다. 질투까진 아니더라도 묘하게 찜찜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목이 메고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감정을 드러낼 순 없었다. 사랑 없는 결혼에 괜한 감정을 소모하는 건, 본인에게 손해일 뿐이라고 되뇌며 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생긋 웃었다.
“혹시 모르니까, 남들 시선 조심하라고 주의를 좀 줘야겠네.”
리아가 그렇게 나오는데, 수진도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고 친구들과 헤어진 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래는 한남동 시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런 기분으론 가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꼴 보기 싫으면 시댁 말뚝 보고도 욕부터 나간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친정에 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눈치 빠른 민 여사는 리아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테니까. 가뜩이나 정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괜히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민 여사는 처음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가 주 회장의 설득에 넘어갔다. 만약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에 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결혼이란 걸 알았다면, 민 여사는 끝까지 반대했을 것이다. 리아는 민수나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주원식품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항상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민수가 오늘따라 외출 중이란다. 결국, 리아는 가족 같은 팀원들이 있는 마케팅 1팀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팀장님!”
사무실로 들어오는 리아를 발견하고 채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가 아직 안 끝났는데 어쩐 일이세요?”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
그때 탕비실 문이 열리며, 민훈이 걸어 나왔다. 그는 리아를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도로 탕비실에 들어갔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거라서 아직은 그녀를 대하기가 껄끄러운가 보다. 리아는 애써 씁쓸한 미소를 감추었다. 휴가가 끝나고 출근하게 되면 제일 먼저 민훈과 대화를 나눠야겠다. 만약 민훈이 부서 이동을 원한다면 그를 마케팅 2팀으로 보내는 것도 고려해볼 생각이었다. 좋은 선배와 직장 동료를 잃은 것 같아 마음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참, 팀장님 휴가 중이라서 말씀 못 드렸는데……. 아, 아니다. 팀장님은 당연히 알고 계셨겠죠.”
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채영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KJ푸드에서 하명은 여사님 들깨 요리 기획을 완전히 백지화했다던데요.”
정말? 완전 금시초문이다.
“그래? 난 몰랐어.”
“들깨 요리 기획 대신 스테이크 세트 출시에 집중할 거래요. 그래서 이번에 강수미 데리고 홍보 이벤트도 대대적으로 한다던데요.”
또 강수미야? 강수미란 말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 아무리 전속모델이라곤 하지만, 저렇게 삐쩍 마른 애를 데려다가 스테이크 광고라니!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업무에 방해되지 않게끔 리아는 팀원들에게 간식을 사주고는 곧 사무실을 나왔다. 강수미 문제로 우울해서 들렸는데 오히려 기분만 더 나빠진 것 같았다. 그런데 저러다가 또 강수미랑 스캔들 나면 어쩌지? 회사 로비를 빠져나가던 리아의 머릿속에 돌연 경고가 떠올랐다. 세기의 사랑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결혼까지 했는데, 또다시 강수미와 스캔들이 난다면 반듯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게 뻔하다. 최악의 경우,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결혼한 이유 중 하나도 얼룩진 사생활을 지우기 위해서였는데……. 그래놓고선 또다시 삐딱선이라니. 그가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아야만, 그녀가 KJ푸드를 인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예정대로 순조롭게 이혼할 수 있을 테고. 아무래도 안 되겠어. 리아는 태호와 대화할 필요를 느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KJ푸드 본사로 향했다. 이건 질투가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로 이러는 거라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되뇌며…….
***
“어제 강수미 만난 일은 어떻게 됐어?”
조금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민수가 물었다. 전화상으로 물어도 되지만, 혹시 모를 도청을 피해 직접 태호를 찾아왔다. 태호의 집무실은 완벽히 도청 장치로부터 자유로우니까.
“위험하긴 하지만 우리 측 부탁 들어주기로 했어.”
“그래? 이제 그거만 손에 넣으면 다 모으는 건가? 한 사장이 눈치채는 건 아니겠지?”
“한 사장은 강수미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거야. 자신에게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하니까.”
강수미는 다른 한류스타에 비해 무명 시절이 길었다. 단역을 따내기도 어렵던 그녀에게 한정안 사장으로부터 스폰서 제의가 들어왔다. 처음엔 단호히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오디션 탈락에 결국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후, 조연으로 출연한 드라마에서 주연보다 인기를 얻으며 세계적으로 흥행 성공한 덕분에 하루아침에 한류 스타 자리에 올랐다. 이제 더는 한 사장에게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우연히 파티에서 태호와 마주친 강수미는 다음 날 그를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한 사장이 비밀 장부를 숨겨 둔 금고 사진이 들려 있었다. 자신이 한 사장의 비리 증거를 가져올 테니, 한 사장에게서 자유롭게 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강수미와 강태호, 핑크빛 스캔들이 터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쪽이 세인의 눈에 자연스러울 테니까. 그녀와의 거래는 오로지 태호와 민수, 남 비서 세 사람만 알고 있다. 그 이유로 대화 중 강수미와 연관된 내용이 나올 때면 특별히 신경 써서 조심하곤 했다. 그때였다.
“알았어요.”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태호와 민수는 동시에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밖에서 기다릴게요.”
이 목소린? 리아의 목소리였다. ***
“사모님.”
리아를 본 남 비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 비서를 보아온 지 5년 동안, 한 번도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뭐지? 뭔가 수상해. 리아의 육감이 안테나를 세웠다.
“이사님, 자리에 계시죠?”
남 비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리아가 곧장 집무실로 향하자, 남 비서는 굳은 얼굴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만. 지금 손님이 안에 계십니다.”
“알았어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만약에 저 안에 있는 손님이 강수미라면? 회사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에 얼굴이 붉어지려고 하는데 달칵 집무실 문이 열렸다. 동시에 놀란 리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수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미안, 나중에 설명할게. 나 지금 약속 늦었거든.”
말을 마친 민수는 부리나케 눈앞에서 사라졌다. 평소의 그녀라면 민수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꼈겠지만, 지금은 자신 코가 석 자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같이 퇴근하려고 온 거야?”
집무실로 들어온 리아가 소파에 앉자, 태호는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왔다.
“응, 뭐……. 근처 지나가다가…….”
얼떨결에 대답해놓고 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냥 지나가다 찾아오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애정 넘치는 부부인 줄 알겠네. 그나저나 어떻게 말을 꺼내지? 리아는 열심히 할 말을 궁리했다. 둘이 껴안고 있는 사진을 수진을 통해 봤다고 하면 괜히 수진이 입장만 난처해질 텐데……. 아, 그래! 리아는 방금 채영에게 들은 정보를 써먹기로 했다.
“하명은 여사님의 들깨 요리 기획, 전면 백지화시켰다고 들었어.”
“응. 조금이나마 여사님,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고.”
말을 해도……. 마치 내가 여사님 맘 불편하게 한다는 소리로 들리잖아. 하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스테이크 세트 출시에 집중할 거라며? 이번에도 강수미가 광고 모델하고.”
“응.”
좋아! 제대로 대화가 돌아간다. 리아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고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감정을 담지 않고 말을 꺼냈다.
“언제까지 강수미와의 관계 유지할 거야?”
“관계? 무슨 관계?”
한 번이라도 강수미와의 관계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오늘은 웬일로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겉으론 아닌 척하지만, 속으론 초조했는지 리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바보야, 내가 너를 두고 누구를 바라본다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태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저 반응에는 조금이라도 질투가 섞여 있는 걸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전속모델 관계라면 이번에 5년 재계약했어.”
와, 전속모델 계약한 관계라고 하면서 계속 옆에 데리고 있으시겠다? 양심에 털 나다 못해 그 털로 스웨터라도 뜰 기세네. 순간 발끈했지만, 리아는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에 다른 의미로 묻는 거라면…….”
드디어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걸까? 리아는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 관계 아니야.”
“아무 관계 아니라고?”
뻔뻔한 거짓말에 기가 막힌 나머지 리아는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사람들 보는 앞에서 강수미와 끌어안았어?”
“뭐?”
“어제, 그것도 어제 그랬잖아.”
역시, 질투가 섞여 있었다. 기쁜 마음에 태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주리아, 대단한걸. 우리 회사에 정보원 심어놨어?”
그러나 리아는 태호의 반응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거짓말을 들켰는데도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어? 그렇게 당당한 거야? 하지만 흥분하면 안 된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사업상으로 문제가 될까 봐 그걸 해결하기 위해 온 거니까.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사내에선 자제 좀 하지. 누가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라도 올리면 귀찮아져.”
“우리 직원이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생각 안 해.”
그건 그렇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끝까지 추적해서 찾아내겠지. 큰 비리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사소한 일에 사활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진이처럼 아빠를 사장으로 둔 든든한 배경이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런데.”
리아가 할 말을 찾는 동안, 이번엔 태호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지금 그거, 질투야?”
뭐라니? 리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질투라니! 혹시라도 후계자 경쟁에서 불리해질까, 아내가 아닌 사업적인 파트너로서 우려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왜 가슴은 뜨끔하지? 흔들리는 리아의 두 눈에 미소를 떠올리는 태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질투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