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먼저 입술을 훔친 쪽은2021.04.25.
“하아.”
벅찬 숨소리와 함께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리아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현실 감각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헐! 나 지금 처음 본 남자와 키스한 거야? 생일 선물 핑계로 뺨에 뽀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긴 싫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날뛰었지만, 리아는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들었다.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해!”
그리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뺑소니치듯 루프톱을 빠져나갔다. 아아아아아! 속으론 타잔이 치타를 부르듯 비명을 지르며……. 다음 날 아침, 리아는 눈뜨자마자 헤어숍으로 달려가 치렁치렁한 머리를 싹둑 잘랐다. 그렇게라도 변화를 주지 않으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판 모르는 남자와 키스할 정도로, 나 이렇게 무모한 여자였어?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상대의 이름 석 자는 알고 키스했다는 거. 성은 구 씨요 이름은 미호. 구미호. 그의 친구들도 분명 그렇게 그를 불렀다. 아주 자연스럽게……. 독특하긴 하지만,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래, 그날 밤 사건은 구미호에게 홀린 셈으로 치지, 뭐. 그런데…….
“대리 출석해 주면 안 돼?”
누구의 불행은 어떤 녀석에겐 행운이라고. 그날 이후로 민수는 눈치 없이 대리 출석을 조르기 시작했다. 민수 머리는 단발에 가까운 장발이라 리아가 긴 머리를 자르자, 이란성 쌍둥이인 두 사람은 헷갈릴 정도로 닮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가끔 민 여사도 헷갈려 리아를 보고 “민수야.” 하고 부를 정도였다.
“안 돼.”
“아우, 야, 교수님 깐깐해서, 강의 한 번만 빼먹어도 학점 깎인단 말이야.”
교양 수업이 있는 날, 소개팅 건수가 생겼는데 상대가 배꽃 여대 여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강의를 빼먹냐? 이 덜된 인간아!
“싫어. 그리고 너랑 나는 학교도 다르잖아.”
민수는 ‘엄적아’ 강태호가 다니는 최고 명문 한국대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 중이다. 태호처럼 경영학 전공은 아니라도, 같은 한국대생이고, 엄연히 주씨 집안의 장남인데 왜 민수는 태호와 비교당하지 않을까? 리아는 늘 그 점이 의아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몸이 약해서란다. 건강하게 있어 주는 것만도 다행이라나? 민수가 몸은 허약해도, 멘탈은 완전 갑인데……. 하아, 할 말 많지만 더는 하지 않겠다. 하여간 양심이 불량한 민수는 포기를 모르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교양 수업이라서 백 명 넘게 강의 듣는다고. 강의실도 워낙 넓어서 맨 끝자리에 앉으면 얼굴도 안 보여. 내 야상 점퍼 입고 가면 완전 감쪽같을 거야.”
“내가 왜?”
“야, 우리가 남이냐?”
“하.”
리아가 콧방귀를 뀌자, 민수는 꼬시는 방법을 바꾸었다.
“대리 출석해 주면, 내 차 한 달 동안 빌려줄게.”
리아보다 1년 먼저 운전면허를 딴 민수의 차는 때깔 고운 독일산 수입차였다. 그것도 요즘 들어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는 무광택 스포츠카. 애마를 빌려준다는 말에 리아의 귀가 솔깃해졌다.
“좋아. 그 대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당연하지.”
다음 날, 리아는 민수의 야상 점퍼를 걸치고 한국대로 향했다. 민수 말은 사실이었다. 그 많은 학생 중에서 아무도 리아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대리 출석이지만, 책임감이 강한 리아는 꼼꼼하게 노트필기까지 하며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끝난 후, 아무 생각 없이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히익! 낯익은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구미호였다. 어머, 얘도 한국대 학생이었어? 전공 수업이 아닌 교양 수업이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대 학생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도 리아를 알아보았는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당황한 리아는 휙 등을 돌려 부리나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몸은 빠른 속도로 강의실에서 멀어졌지만, 마음은 계속 강의실에 남아 있었다. 솔직히 그날 밤 이후, 일분일초라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소중한 입술을 처음으로 훔쳐 간 남자인데……. 아, 아니다. 속말이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 먼저 입술을 훔친 쪽은 그가 아니라 나였지. 하여간 그땐 너무 당황해서 연락처도 주지 않고 도망쳤지만, 시간이 지나자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었다. 어떻게 다시 만나지?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워낙 좁은 동네에 살았으니까 쉽게 찾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이곳은 넓디넓은 서울이었다. 이런 대도시에서 상대를 찾아내기란 모래사장에서 유심칩을 찾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데 왜 지금 헐레벌떡 도망가냐고? 아무리 그래도 화장 안 한 맨얼굴로 마주할 수는 없잖아! 티끌 하나 없는 피부라도 눈에 힘도 주고, 촉촉한 입술도 강조하고 그래야 하는데, 지금은 민수 행세를 하느라, 눈썹에만 힘을 준 상태였다. 이런 모습으로는 첫 키스 상대와 재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 걸음도 못 가, 앞을 가로막는 구미호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같은 강의 듣는 줄 몰랐는데…….”
그는 마치 엊그제 헤어진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아, 그게.”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떡하지? 확 도망쳐버릴까? 설마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속으로 열심히 튈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데 그가 자연스럽게 리아의 손을 잡았다.
“배고프지 않아? 밥 먹으러 가자.”
“아니, 난…….”
괜찮다고 사양하려는 순간, 망할 놈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신호를 보냈다. 대리 출석한다고 긴장해서 아침도 못 먹고 나온 탓이었다. 그래,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더라. 리아는 곧 마음을 바꾸었다. 밥 먹자는 제의를 거절하는 건, 식품회사 딸내미로서 할 일이 아니니까. 리아는 못이기는 척, 구미호를 따라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무슨 과냐? 전공이 뭐냐?’라고 꼬치꼬치 물어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구미호는 묵묵히 밥만 먹었다. 흠, 식사 예절 좋은데?
“초콜릿 좋아하지? 난 다음 강의가 있어서 가봐야 해. 다음에 보자.”
식사를 끝낸 그는 자신의 몫인 초콜릿을 리아 식판에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는 잠시 넋을 잃고 멀어지는 구미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와, 뭐 저리 겁나게 멋있어? 그날 밤, 리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게, 혹시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캥캥거리는 구미호에게 홀린 걸까? 구미호는 간을 파먹는다더니, 간이 아니라 혼을 빼갔나 보다. 거의 일주일 동안, 밤잠을 설친 리아는 다시 구미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만나서 빠져나간 혼을 다시 찾아오리라! 대리 출석해 줄 필요가 없다는 민수를 꼬드겨, 다시금 한국대로 향했다. 이번엔 한 듯 안 한 듯, 미소년과 미소녀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초화장으로 완벽하게 무장까지 했다. 강의가 끝나자, 구미호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리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점심 안 먹었지?”
“응.”
두 사람은 저번처럼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친 후, 구미호가 물었다.
“난 오늘 휴강이야. 너는?”
“정말? 나도.”
사실은 휴강이 아니라, 리아는 오늘 아예 강의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녀는 한국대 학생도 아니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벤치에 앉고 다시 캠퍼스를 거닐었다. 할 말이 많았는데, 너무 많아서일까? 많은 대화를 나눌 순 없었다. 하지만 손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통한 것처럼 단단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춥지 않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여자 몸엔 지방이 많아서 남자보다 추위를 덜 타.’……라고 말하려던 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도 춥지 않았지만, 추운 척 살짝 몸을 떨었다.
“조금 춥네?”
그러자 그가 재킷을 벗어 어깨에 둘러주었다. 하아, 어쩜 얘는 냄새까지 좋을까! 리아는 두 손으로 재킷을 꼭 움켜쥐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훅 치고 들어오는 수컷 향기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황홀했다. 그때 강한 바람에 불어와 리아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리아는 재킷을 잡고 있어 손을 쓸 수 없자, 그가 대신 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따뜻한 손끝이 부드럽게 이마를 매만졌다. 순간 키스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후끈 열기가 몰려왔다.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서로의 시선이 엉켰다. 어둑해진 인적 드문 캠퍼스는 키스하기 딱 좋은 장소인데……. 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입술이 닿는 순간…….
“주리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린? 화들짝 놀라 옆을 보자, 민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너, 거기서 뭐 해?”
이어서 구미호를 본 민수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강태호?”
이번엔 리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민수를 바라보았다. 응? 구미호를 왜 강태호라고 불러? *** 태호의 생일날.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했던 민수가 불쑥 나타나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오늘 리아도 함께 왔어.”
“그래?”
태호는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흘렸다. 그러나 스테이지에 올라간 순간, 리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어릴 때 얼굴 그대로였다. 아니, 그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보는 걸까? 집안끼리 사이가 틀어진 이후론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한국대에 재학 중인 민수와는 집안 사정과 상관없이 자주 어울렸다. 꼬리 아홉 개 달린 호랑이, ‘구미호’도 민수가 지어 준 별명이었다. 리아도 태호를 알아보았는지, 춤을 멈추고 제자리에 선 채로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도 날 기억하는구나.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야, 구미호. 이쪽이야.”
친구들 손에 이끌려 스테이지 반대쪽으로 가면서도 자꾸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리아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결국, 태호는 인사나 할 생각으로 리아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루프톱에서 위험에 빠진 리아를 발견했다. 급히 술 취한 남자를 쫓아내고, 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 겁먹은 건 아닐까, 민수를 불러줘야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리아는 멀쩡해 보였다.
“여기 자주 오나 봐?”
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민수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껄끄러운 어른들 관계에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서로 대화하다 보니,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가 먼저 뺨에 뽀뽀하고 그랬는데……. 지금도 초콜릿을 좋아할까? 그래서일까? 리아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태호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지나가는 농담으로 말로만 생일 축하할 거냐고 물은 건데, 리아는 진지하게 입술을 맞추었다. ‘생일 선물로 너무 과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은 반대로 반응했다. 말캉말캉하고 달콤한 입술을 진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황홀함은 잠시, 리아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먼저 연락할까? 아니면 연락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혼자 고민하던 태호는 우선 민수에게 리아의 전화번호를 묻기로 했다. 교양 수업이 끝나고 민수를 찾는데 멀리서 눈에 익은 야상 점퍼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야상 점퍼의 주인이 민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아?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틀림없었다.
“같은 강의 듣는 줄 몰랐는데…….”
그 말에 리아는 어쩔 줄 모르며 시선을 피했다. 민수 대신 출석한 것을 들켜서 당황한 것보단 왠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너, 혹시 날 보러 온 거야? 만약에 리아가 또다시 민수를 대신해 강의에 나타난다면 그건 확실한 ‘그린 라이트’일 거라고 믿었다. 리아를 다시 강의실에서 부딪치게 되자,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죄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술을 맞추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
“주리아? 너, 거기서 뭐 해?”
민수의 등장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