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말랑하고 촉촉한 느낌은?2021.04.21.
리아와 태호가 대학교 2학년일 때 일이다.
“엄마, 나 오늘 외박한다.”
리아는 아침 식탁에 앉으며 당당히 선포하듯 말했다.
“뭐? 외박?”
민 여사와 주 회장은 동시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불금이잖아. 친구들이랑 클럽 가기로 했어.”
“그렇다고 외박을 하니? 늦어도 자정까진 들어와.”
“뭐야? 성인만 되면 자유롭게 놔준다며!”
빠른 연생인 리아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미성년자 딱지를 떼지 못해 대학 동기들 다 가는 술집, 클럽은 물론이요, 성인 인증도 불가능해 크고 작은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때마다 리아는 울상을 지었고 민 여사는 성인만 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드디어 올해 리아는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성인이 되었다.
“그러면 새벽 2시까지 들어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은 져야겠고, 딸이 외박하는 꼴은 보기 싫은 민 여사는 살살 달래기로 수법을 바꾸었다. 하지만 거기에 넘어갈 리아가 아니다.
“싫어. 밤 꼴딱 새우고 놀 거야.”
달래는 전술이 먹혀들지 않자, 민 여사는 슬그머니 주 회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리아야, 태호는 말이다. 한국대 경영과 수석 입학인데도 아직도 매일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한다더라.”
민 여사에게 바통을 넘겨받은 주 회장은 ‘엄적아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마디로 경쟁심 유발이랄까?
“그래서?”
하지만 리아에겐 통하지 않았다. 리아는 최고 명문은 아니지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다녔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재수 안 한 게 어딘데, 왜 ‘엄적아’와 경쟁해서 주눅 들어? 부모가 경쟁하든 말든 리아는 신경을 꺼버렸다. 애초부터 천재인 태호와는 게임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직도 태호가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이유는 친구를 사귀지 못해서일 거다. 태호는 눈을 덮는 덥수룩한 머리에, 1970년대에나 유행했을 투박한 뿔테안경, 이상야릇한 체크무늬 재킷을 즐겨 입는 등등. 완전 촌스러운 공붓벌레 자체였다. 기부 행사 모임에서도 구석에 앉아 책만 읽던 걸로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이젠 밖에서 부딪치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좋아. 허락할게.”
주 회장과 귓속말로 의견을 주고받던 민 여사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대신 민수랑 같이 가.”
“에에?”
클럽 가는데 혹을 붙이고 가라고? 리아가 따지려 하자, 민 여사가 빠르게 덧붙였다.
“싫으면 경호원이랑 가. 어떻게 할래?”
순간 우락부락한 체격의 경호원 아저씨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건 여우를 데려가느냐, 불곰을 데려가느냐의 문제였다. 아 씨, 둘 다 싫은데…….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알았어. 반쪽이랑 갈게.”
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민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
“저기 들어가는 순간, 우린 완전 남남이야. 알았지?”
“누가 할 소릴!”
리아와 민수는 동시에 ‘휙’ 등을 돌려 클럽 앞에서 찢어졌다. 완전 따로 놀다가 아침에 만나 귀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몰라서 놀 장소는 같은 곳으로 정했다. 클럽이 워낙 넓으니까 서로 마주칠 염려는 없을 것이다.
“리아야, 여기!”
먼저 온 유정과 수진이 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미 한잔했는지 모두 볼이 발그레했다.
“원 샷!”
리아는 친구들이 내민 500cc 맥주잔을 가뿐하게 비우고 곧장 스테이지로 달려갔다.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어떤 남자가 반대편 스테이지로 올라섰다.
“와, 쩐다!”
누군가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한눈에 이목구비가 들어오다니! 도대체 얼마나 윤곽이 또렷한 거야! 그뿐만이 아니다. 보통 남자보다 적어도 머리 하나는 더 크게 키가 컸고, ‘션 오프리’ 저리 가라, 섹시한 남성미를 내뿜었다. 순간 스테이지를 둘러보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쿠쿵―. 쿠쿵―. 나, 왜 이러지? 멀쩡하던 리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시선이 마주친 남자는 그녀를 향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제야 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빤히 쳐다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헐, 미쳤나 봐!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야, 구미호. 이쪽이야.”
그때 뒤따라온 일행이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틈을 타, 리아는 허둥지둥 스테이지를 내려갔다. 아우, 쪽팔려! 찰나였지만 완전 넋을 잃고 쳐다봤으나, 아무리 조명이 어두워도 다 보였을 거다.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을까. 리아는 기분전환으로 바깥바람도 쐴 겸, 서둘러 휴식 공간이 마련된 루프톱으로 향했다. 하지만 난간에 기대어 야경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자꾸만 아까 본 남자가 떠올랐다. 얼핏 들었는데 이름이 ‘구미호’랬나? 무슨 이름이 그렇지? 구미호라니……. ‘미호’란 이름만 들어선 괜찮은데 앞에 ‘구’ 씨 성이 붙으니,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기막히게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를 본 순간 꼬리 아홉 달린 호랑이, 구미호에게 홀린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 여우 말고 호랑이. 구미호(九尾狐) 말고, 구미호(九尾虎). 양심상, 저런 짐승남을 여우로 묘사할 순 없잖은가!
“혼자 왔나 봐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말투가 어눌한 것으로 보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일행 있는데요.”
“그래요?”
남자는 아쉽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이 있어도 지금 여기엔 리아 혼자라는 걸 확인한 남자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2층에 VIP룸 잡았는데, 같이 갈래요?”
“됐어요.”
단호한 거절에도 술 취한 남자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아예 리아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치근덕거렸다.
“그러지 말고 가요. ‘아르망 드 브리냑’을 주문했거든. 그게 얼마짜린지 알면 놀랄 텐데?”
너 뭐니? 리아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눈살을 팍 찌푸렸다.
“관심 없으니까 가주실래요?”
그러자 싱글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이년이! 너 지금 얼굴 좀 반반하다고 튕겨?”
갑자기 살벌해진 분위기에 주변 사람들이 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진상쯤 그녀 혼자 감당할 수 있었다.
“내 얼굴 반반한데 너 보태준 거 있니?”
“뭐?”
갑자기 튀어나온 험악한 말투에 남자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비싼 술 처마셨으면 곱게 취해라. 추태 부리지 말고.”
“이게 어디서 감히!”
잠시 넋 놓던 남자는 곧 정신을 차렸는지, 위협하듯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리아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이래 봬도 태권도 검은 띠다. 누구처럼 17 대 1로 싸우진 못해도, 술 취한 남자 하나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간만에 몸이나 풀어?
“눈 안 깔아?”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리아는 겁먹기는커녕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남자는 우악스럽게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동시에…….
“아아아악!”
탁한 비명이 루프톱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비명을 지른 사람은 리아가 아니라 술 취한 남자였다. 갑자기 나타난 손이 눈 깜빡할 새도 없이 술 취한 남자의 손목을 뒤로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구? 리아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제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헐!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조금 전 그녀를 홀리게 했던 구미호였다. 그러니까 여우 말고 호랑이!
“아악, 넌 또 뭐야? 이거 안 놔!”
술 취한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거위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팔은 더 뒤로 꺾이며 고통만 커질 뿐이었다.
“잘, 잘못했어요! 제발 놔 주세요……. 으흑, 팔 빠질 것 같다고요.”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던 남자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항복했다. 그제야 꺾였던 팔이 스르르 풀렸다. 자유롭게 된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뭐도 아닌 게 까불긴……. 도망치는 남자를 한심한 듯 바라보는 리아의 귀에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괜찮아?”
저 외모에 목소리까지 이렇게 자극적이면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아, 진짜 불공평하네. 리아는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몰빵한 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다친 데 없어?”
어라? 그런데 듣다 보니 그는 초면에 대놓고 반말을 하고 있었다. 역시 신은 공평한가 보다. 완벽한 외모와 목소리는 허락하셨지만, 싸가진 허락하지 않으셨구나.
“난 괜찮아. 도와줘서 고마워.”
리아도 똑같이 말을 놓았다. 가는 반말에 오는 반말이니까.
“고마울 것까지야.”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될 수 있으면 일행과 함께 다녀. 혼자 있는 여자만 노리는 놈들이 있으니까.”
“……아, 그래?”
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그를 따라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서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쳤다. 이상하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고 할까? 혹시 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나? 음, 그건 말이 안 된다. 이런 남자를 봤다면 절대로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여기 자주 오나 봐?”
“자주는 아니고. 답답할 때 가끔 기분 전환하러…….”
“그럼 오늘도 답답해서 온 거야?”
그 말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오늘은 친구들이 생일파티 해준다고 해서.”
“오늘이 생일이야?”
“응. 정확히는 자정이 지나야 하지만.”
리아는 급히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시각은 11시 57분. 이제 3분이 지나면 자정이 된다.
“그런데 왜 친구들과 있지 않고 여기에 있어? 친구들이 폭죽이랑 케이크 준비 안 했어?”
“그런 건 유치해서.”
그는 관심 없다는 듯 입가를 비틀며 야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서프라이즈가 유치하다고? 순간 머쓱해진 리아는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여간 생일 축하해. 난 이만 가볼게.”
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그도 난간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이어서 커다란 손이 리아의 손목을 잡았다. 힘이 들어간 행동은 아니었다. 공기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응?”
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말로만 축하해줄 거야?”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폭죽이랑 케이크는 유치해서 싫다면서, 뭘 바라는 거지? 평소라면 그냥 손을 뿌리치고 가버렸겠지만, 상대는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였다. 그리고 살짝 진실을 털어놓자면, 잘생겼다고 인정한 경우가 드물 뿐이지, 그녀는 외모에 약했다.
“어떻게 축하해줄까?”
“글쎄…….”
그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또, 또 사람 홀리려고 저런다! 저런 얼굴로 눈웃음을 치는 건 명백한 반칙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윽한 눈빛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따뜻한 미소에 가슴이 죄인 듯 답답했다.
―첫 만남에 키스라니, 얘들 미친 거지?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며 리아가 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리아는 왜 줄리엣이 로미오를 첫눈에 운명이라고 여겼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구미호를 운명이라 여기는 건 아니었다. 그때 줄리엣은 16살, 10대 소녀였고, 지금 리아는 당당히 19금 소설을 읽을 수 있는 20대 성인이었다. 우연을 운명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짝 불장난 정도는 칠 수 있다. 왜? 오늘은 불금이니까! 거기에 살짝 보태서 그에게 깜짝 놀랄 선물을 선사하고 싶다는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했다.
“생일 축하해!”
리아는 재빨리 발돋움하며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미인에게 받은 생일 축하 뽀뽀. 얼마나 환상적인 생일 선물인가!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중심을 잃어 하이힐이 삐끗하고 말았다. 순간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촉―. 본의 아니게 뺨이 아닌 다른 곳에 입술이 닿아버렸다. 말랑하고 촉촉한 느낌은……. 입술?! 그와 입술을 맞닿은 상태로 리아의 두 눈이 보름달처럼 커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