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날 밤을 어찌 잊으랴.2021.04.18.
“오늘은 오전 업무만 보시고 퇴근하시죠. 어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셨는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민수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 비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나 태호는 묵묵부답으로 대응하며 검토하던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가뜩이나 리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미치겠는데, 남 비서마저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신혼여행 내내 독채에서만 머물렀어도 리아와 함께라는 생각에 아무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가슴 벅차게 설레기만 했다. 그뿐인가? 비행기를 탈 때도 함께 있었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 그건 아니다. 리아는 계속 자고 있었고 태호만 먼저 눈을 떴다. 누적된 여행의 피로와 어젯밤 일로 힘들었는지, 리아는 태호가 출근 준비할 동안에도 잠자는 공주처럼 세상모르게 잤다. 잠든 그녀에게 키스하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태호는 키스 대신 리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침실을 나섰다.
후우, 너무 행복했다. 이렇게라도 리아를 옆에만 둘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회사로 출근해 일상으로 돌아오니, 신혼여행에서의 일은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 없겠지만,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그녀가 사라지고 없는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불안한 감정을 없애려면 어서 첫 번째 계획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래야 리아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일에 집중해야 했다.
“이제 곧 미팅할 시간이지?”
검토한 서류를 남 비서에게 넘기며 태호가 말했다.
“네.”
“그럼 이만 이동하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미팅 상대가 여자일 경우, 리아를 제외하곤 집무실이 아닌 사무실 중앙에 있는 회의실에서 만난다. 사방이 유리 벽인 회의실은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누구나 오고 가며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덕분에 투명성이 보장되었다. 또한 업무 시간 이외에는 절대로 약속을 잡지 않았다. 공적인 업무로 만나도 심심찮게 핑크빛 소문으로 확대되었기에……. 하지만 태호를 향한 사랑에 빠진 상대방의 눈빛이 문제였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태호는 감정 없는 메마른 시선으로 상대를 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텐데……. 그가 감정 실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는 남 비서가 알기론 오직 주원식품 주리아 팀장뿐이었다.
“서둘러. 한류 스타 강수미를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
그 말에 남 비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강수미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사님, 강수미를 너무 믿진 마세요.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여자입니다.”
남 비서의 걱정도 일리는 있었다. 강수미와 한 사장의 꼬인 인연도 그렇고, 어린 나이지만 쉽게 겉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격도 그렇고. 하지만 지금 그녀는 태호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줄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스캔들이 일어나는 것도 무릅쓰고 정기적으로 강수미를 만났다.
“걱정하지 마. 수미는 아직까진 우리 편이니까.”
태호는 남 비서를 안심시키며 회의실로 이동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
“원래는 주 회장과 만나는 자리였는데…….”
표 과장의 보고를 받는 한 사장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갔다.
“주 회장 대신 주 팀장이 나타났답니다.”
“그 얘길, 왜 지금에야 하는 거야?”
그리고 결국 언짢은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그땐 미처 심각한 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앞으론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 그러라고 비싼 돈 주고, 사람 쓰는 거잖아.”
“네, 사장님.”
표 과장이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한 사장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가 나간 쪽을 노려보며 서둘러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태호가 처음 출근한 날이다. 수진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수진아, 뭐하니? 아빠랑 점심 같이 먹을래?”
딸이 걱정된 한 사장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별로 생각 없어.]
역시나 수진의 풀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얼른 사장실로 와.”
[하아…….]
수진은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곧 마음을 바꾼 듯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수진이 전화를 끊자, 한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딸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사실 그 자신이 수진보다 더 속에서 열불 나는 상태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건지……. 그가 주원식품의 안양공장을 눈독 들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이다. ㈜정직 시설에 세워진 생산 설비이기에 주원식품과 KJ푸드에겐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불법으로 자금 압박까지 해가면서 주원식품을 궁지로 몰았다. 안양공장을 차지하면 태호의 후계자 자리가 더욱 굳건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리아와 태호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알 턱 없는 한 사장은 리아가 먼저 정혼을 들먹이며 도움을 청했다고 넘겨짚었다. 후계자 경쟁에서 우위를 다지려, 태호는 그녀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을 테고.
“……주리아, 그거 보통이 아니야.”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아 간 것도 괘씸한데,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이유도 그녀 탓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제길.”
한 사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야말로 원하던 목표에 아주 가깝게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정직 시절부터 강 회장의 오른팔 소리를 들으며 충성한 세월이 얼만데, 그는 아직도 KJ푸드 사장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물론 규모로 보나, 수익률로 보나 KJ푸드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꿈은 한낱 식품 회사 우두머리로 끝날 만큼 소박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그룹 중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KJ쇼핑 사장 자리를 꿰차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카드가 필요했고, 그건 바로 강태호였다. 태호가 강 회장 뒤를 잇고 수진과 결혼한다면, 쉽게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한 사장 눈에 수진은 천사처럼 어여쁜 외동딸이었고, 태호가 수진에게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그랬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주리아가 등장하며 모든 계획을 수포로 만들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미 작고한 창립자부터 시작해서 주 회장, 주 팀장. 주씨 집안 모두는 한 사장에겐 거슬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낙담하고만 있진 않을 거다. 2세대에 걸친 굳건한 인연도 갈라놓았는데, 정략결혼 커플 하나 못 갈라놓을까.
“어떻게든 바로잡고 만다.”
창밖을 바라보는 한 사장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 정 여사가 점심 약속이 있다고 외출하자,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소정이 리아에게 다가왔다.
“어머니가 처음엔 무뚝뚝하셔도 지내다 보면 나름 다정하세요.”
흠, 과연 그럴까? 리아가 생각하기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정 여사가 소정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태호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어머니를 닮아서라면, 정 여사가 다정하게 나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소정과 태문은 결혼하기까지 꽤 큰 시련을 겪었다. KJ푸드 직원이던 소정은 우연히 사내에서 태문과 마주치며 인연을 맺었는데, 두 사람의 연애는 평탄하지 않았다. 부모를 여의고 이모네 집에 더부살이하는 소정을 강 회장 내외가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헤어지고 몇 달 후, 결혼 허락이 떨어졌다. 두 사람의 결합은 ‘21세기 신데렐라’라며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말 편하게 놓으셔요, 형님.”
동갑이지만, 태문의 아내이니 소정은 리아에겐 손윗사람이 된다. 리아가 형님이라고 호칭하자, 소정은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서방님, 좋은 분이셔. 시작은 정략일지 몰라도, 난 동서가 곧 서방님과 사랑에 빠질 거라고 믿어.”
그 말에 리아는 영혼 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이미 한 번 사랑했다가 헤어진 사이라고 털어놓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솔직히 리아는 왜 소정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겉으로만 이러고 속으론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경계해야 하는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호의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전쟁터 한복판에서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지를 구별해야 하는 것처럼 머리가 복잡했다. 아니면 그녀 혼자 지나친 생각을 하는 걸까? 마음 편히 상대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어서 빨리 일주일이 지나가, 둘만의 보금자리 신혼집으로 갔으면 좋겠다. 잠깐! 아무 생각 없이, 속으로 투덜거리던 리아는 순간 멈칫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둘만의 보금자리? 아…… 닭살! 자신이 한 말이지만, 못 견디게 느끼한 리아는 양손으로 소름 돋은 팔을 문질렀다. 그때였다. 잠에서 덜 깼는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에서 리아를 불렀다.
“새언니.”
뒤를 돌아보니, 이제 일어났는지 파자마 차림의 태희가 부스스한 얼굴로 거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친 발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그냥 스친 정도라…….”
“다행이네요.”
발에 붕대를 감은 것으로 봐선 스친 정도가 아닌 것 같지만, 태희는 일부러 모른 척 외면했다. 자신이 밀친 것도 아니고, 리아가 혼자 놀라서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린 거니까.
“엄마는요?”
태희의 질문에 소정이 빠르게 대답했다.
“어머님, 외출하셨어요. 아가씨, 아침은요?”
“지금 시간이면 아침이 아니라 점심 아닌가? 하아아암!”
태희는 대답하다 말고 크게 하품하며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곧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었다.
“강태희.”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음산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히익!”
태희는 거실 입구에 서 있는 태호를 발견하곤 놀란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 시각에 작은오빠가 왜 집에 있는 거야? 어쩌면 좋지? 엄마 외출하고 없는데!
“너, 어제, 어떻게 된 거야!”
태호는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뚜벅뚜벅 태희에게 다가왔다. 악! 범이 내려온다! 여기서 지금 그녀를 살려줄 사람은 리아와 소정뿐이었다. 하지만 소정은 아니다. 전에 태호 밑에서 근무했다고, 백 퍼센트 태호 편만 들었다. 아직 파악이 끝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정보다야 낫겠다는 생각에 태희는 얼른 리아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언니, 저 좀 살려주세요. 구미호가 저, 죽일 거예요.”
“강태희, 그만해.”
살벌한 모습을 새 식구에게 보이기 싫은 걸까? 태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자, 태희는 대놓고 리아에게 매달렸다. 리아가 방패라도 되는 양,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새언니, 우리 점심 먹어요. 해장도 할 겸 우리, 낌새 라면 먹을래요?”
“낌새 라면이요?”
리아는 혹시 자신이 잘못들은 건 아닐까, 되물었다. ‘낌새 라면’은 주원식품에서 출시하는 제품으로 매운맛 1위에 선정된 라면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태희가 KJ푸드 라면이 아닌 경쟁사 제품을 먹자고 한 게 중요한 거다. 태희는 왜 그리 놀란 얼굴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요. 오빠도 그 라면을 얼마나…….”
“강태희.”
태희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태호가 끼어들었다.
“너 방금 분명 해장하자고 했어. 어제 술 마신 거 실토한 거지?”
“앗!”
자신이 말실수한 걸 깨달은 태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술이나 마시고. 밤새워 클럽에서 놀기나 하고.”
“오빠는 대학 다닐 때 클럽 안 갔어?”
“안 갔어. 난 대학 다닐 땐 도서관에서…….”
“그건 아니지.”
그러자 잠자코 듣기만 하던 리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클럽 가곤 했잖아.”
입을 삐뚤어졌어도 말을 바로 하랬다고, 태호의 거짓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클럽을 안 갔다니, 그건 말이 안 된다.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는 바로 클럽이었다. 아, 그날 밤을 어찌 잊으랴! 태호도 리아와 같이 그날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서히 빛바랜 과거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