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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런 게 정말 시월드구나! (13/81)

13. 이런 게 정말 시월드구나!2021.04.14.

어디 가는 거지? 침실을 빠져나가는 리아가 궁금해 태호는 뒤를 몰래 따라왔었다. 주방에서 우유를 데우는 것을 보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비명이 들렸다. 나직한 리아의 짧은 비명과 쩌렁쩌렁 울리는 태희의 긴 비명. 눈으로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집안사람들 몰래, 차고를 통해 주방 뒷문으로 들어오던 태희가 리아와 맞닥뜨렸을 것이다. 불길하게도 비명에 이어 대리석 바닥에 유리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태호는 리아가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이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다. 정 여사와 태희, 그 누구도 다친 리아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사이 안 좋은 집안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 리아를 번쩍 안아 올린 태호는 싸늘하게 정 여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리아 다친 건 안 보입니까?”

“어……, 그랬니? 몰랐구나.”

태호의 지적에 정 여사는 유리 파편이 흐트러진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하얀 우유에 섞인 핏자국을 발견하곤 비위가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조심하지 않고선. 어쩌다가 컵을 깨뜨렸니?”

얼핏 듣기엔 걱정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리아의 잘못이라는 말투였다. 와, 다들 시월드, 시월드 하더니 이런 게 정말 시월드구나! 리아는 대답할 생각을 잊고, 가만히 정 여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걱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녀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민 여사부터 시작해 주 회장, 민수까지 달려와 ‘리아야, 괜찮아? 많이 아파?’ 하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선 걱정은커녕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남의 집 귀한 딸, 며느리가 되었다고 다운그레이드된 건가? 하아, 괜히 서러워지려고 하네. 그렇다고 입 다물고만 있을 리아가 아니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들어온 누구 때문에 놀라서 그랬겠죠.”

맞아,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형체. 리아의 시선이 저절로 태희에게 옮겨갔다. 태희는 원망의 화살이 자신을 겨누자, 놀란 얼굴로 재빨리 정 여사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살려달라는 듯 정 여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가족 중 제일 무서워하는 건, 강 회장도 정 여사도 아닌 작은오빠 강태호였다. 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줄도 모르고 새벽까지 술 마시고 놀았는데……. 들키면 끝장이다! 정 여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태희의 등을 다독거리더니 태호를 향해 엄한 표정을 지었다.

“태호야,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온 동생에게 그게 무슨 말이니?”

“요샌 도서관에 술 반입이 되나 보죠?”

정 여사는 그제야 태희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를 알아채고,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계집애. 작작 좀 마시지. 이래 가지곤 태희를 감싸고돌 수 없었다. 그래도 정 여사는 엄마가 지켜주겠다는 듯 태희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태호는 그런 모녀를 차갑게 바라보다, 그대로 지나쳐 주방을 걸어 나갔다. 바들바들 떠는 와중에도 태희는 리아를 안고 걸어가는 태호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앙숙이던 두 사람이었는데……. 신혼여행에서 갑자기 사이좋아졌을 리는 없고. 뭐지?

“엄마, 오빠 왜 저래?”

“글쎄, 왜 저런다니?”

정 여사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게스트룸으로 돌아온 태호는 리아를 침대에 앉히고,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다행히도 깊게 베인 건 아닌지, 피는 어느새 멎어있었다. 그는 잠자코 소독약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냈다.

“살짝 스치기만 한 거야.”

“가만히 있어.”

상처 소독을 끝낸 태호가 붕대를 감으려 하자, 리아는 발을 뒤로 뺐다. 그러자 태호는 꼼짝 못 하게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아래층엔 왜 내려간 거야?”

“아, 그게…….”

배고파서 내려갔다고는 절대로 말 못 한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좀 나을까 해서 내려갔었어. 그런데…….”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태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붕대를 마저 감았다.

“아프지 마.”

혼잣말하듯이 그가 낮게 속삭였다. 제대로 못 들은 리아가 눈을 깜빡거리자, 다시 한번, 이번엔 힘을 주어 말했다.

“제발, 아프지 좀 말라고. 화상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가 걱정하는 듯한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결혼하기로 한 이후부터, 때때로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진지하게 나온 적은 없었다. 왜 마음 써주는 거지? 시댁에 있다고 편들어주는 걸까? 그녀가 아는 강태호는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남자였다. 시댁에서만큼은 그녀가 약자일 테니, 조금이나마 배려하는 걸까? ……아니면 이것도 연기일까?

“알았어. 조심할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리아는 대충 이쯤에서 대화를 정리하기로 했다. 오늘은 확실히 그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줬으니, 기분 좋게 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야, 됐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던 태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방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버섯 크림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우유 대신 이거라도 먹어. 잠 안 올 때, 좋아.”

고소한 냄새를 맡자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맛은 더 감동이었다. 한 입 먹자마자, 진한 버섯 향과 고소한 크림 맛이 입안 가득히 번졌다. 이것도 저번처럼 KJ 제품인가? 정말로 사람 감동하게 하는 맛이었다. 경쟁회사 제품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맛있네. ……고마워.”

“그래.”

태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침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로 몸을 뉘었다. 널찍한 등이 눈에 들어오자, 리아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먼저 잠든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넓은 어깨에 얼굴을 비비곤 했었는데……. 그러면 그는 잠결에 뒤돌아 누우며 그녀를 품에 안아주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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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물론, 그럴 수 없다. 그런데도 리아는 그를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바라만 봐도 가슴이 설렜다. 리아는 그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하아, 이 바보야. 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경계가 허물어지려고 하다니. 정신 차리자, 주리아! 앞으로 5년이야, 5년을 버텨야 한다고. 리아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될수록 태호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노력하며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눕혔다. *** 다음날,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난 리아는 테라스에 나가서 아침을 먹었다. 어제는 두 사람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라 온 가족이 함께 식사했지만, 평소엔 다 따로따로 식사한단다. 태호는 출근하는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리아는 휴가가 아직 며칠 더 남아서 다음 주에야 회사로 출근한다. 마음 같아선 당장 출근하고 싶었지만, 어젯밤 발을 다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기로 했다. 점심 때쯤, 정 여사가 차 한잔하자며 리아를 거실로 불렀다.

“다친 데는 어떠니?”

“별거 아니에요. 살짝 스친 정도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정 여사는 리아 발에 감긴 붕대를 보고도 별말 하지 않았다. 태호가 있을 때, 그나마 있던 미소는 태호가 없으니, 연기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정 여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작은 했겠지만, 나는 두 사람 결혼 반대했단다.”

리아를 바라보는 눈빛이 얼음처럼 싸늘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만큼 엄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 여사의 눈빛이 강렬하다고 해도 태호만큼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 교환이라면 이미 태호와 지겹게 주고받았다.

“저도요, 어머니.”

리아는 생긋 웃으며 정 여사를 따라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순간 잘못 들었나? 정 여사의 눈가가 흠칫 떨렸다.

“저도 원해서 한 결혼, 아니에요.”

리아는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힘을 주며 말을 덧붙였다. 당신 아들이 원해서 한 결혼이니까, 제게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불쌍한 며느리 코스프레라면 사양이었다. 하, 얘 좀 봐라! 정 여사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신을 대하는 리아를 보며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처음엔 괘씸했지만, 조금 지나니, ‘태호의 짝으로 딱 맞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뱃속에서 나은 자식이지만, 정 여사는 태호가 어려웠다. 누굴 닮아서 그리 똑똑한지, 태어날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너무 뛰어나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매사 까칠하게만 하던 아들이기도 했다. 과연 누가 태호와 결혼하게 될지, 혹시 태호를 감당하지 못하고 맨날 울면서 신세 한탄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다행히도 리아는 태호로 인해 맘고생 할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래, 너도 내키지 않은 결혼을 했으니, 불편하겠구나.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이 쉽지는 않을 거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강 여사가 말을 이었다.

“너도 힘들 테니, 시집살이까지 시키진 않으마. 집안 행사 일일이 챙길 필욘 없다. 회장님 생일이나 가끔 그룹 행사 때 얼굴만 비추면 돼.”

어떻게 보면 쿨한 시어머니 같겠지만, 어떻게 보면 은근히 기분 나쁘다. 철저하게 울타리를 치고 우리 가족 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표현이랄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 여사를 따라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리아가 대답했다. 어차피 5년 후면 다시 남남이 될 사람들인데,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이 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댁에 온 지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리아는 벌써 집이 그리웠다. ***

“신혼여행은 어땠어?”

소파에 앉으면 민수가 물었다. 태호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리아가 일광화상을 당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침실에만 있었다고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행히 민수는 곧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어제 남 비서에게 대충 이야긴 들었어. 나중에 너에게 자세히 들으라고 하더군.”

“응.”

“이번 건도 한 사장 장난이란 소리잖아. 예상은 했지만……. 후.”

감정이 격해지려 하자, 민수는 말을 멈추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자금 압박 음모의 배후로 너희 아버지, 강 회장님을 지목하게 판을 짰겠지.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간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야. 5년 전, 그때처럼…….”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많은 이들은 강 회장을 배후로 지목했다. 하지만 태호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로 강 회장이 벌인 짓이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완벽히 처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 터뜨릴 거야? 아니, 그보다 리아에게는 언제 사실을 털어놓을 거야?”

“아직은 아니야.”

민수의 물음에 태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리아가 원하는 대로 이별을 받아들였지만, 한시라도 그녀를 마음에서 놓은 적은 없었다. 태호는 헤어지고 나서도 주원식품의 부도를 막으려 뛰어다녔다. 그러다 몇몇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어떤 세력이 중간에서 장난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정직이 두 회사로 쪼개진 이유부터 시작해서 꽤 많은 사건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상대를 건드릴 순 없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버리면 큰 낭패니까. 태호는 시간을 가지고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두 계획은 서로 맞물리듯 얽혀 있었는데, 먼저 실행할 계획은 사건의 배후를 찾아내 두 집안 오해를 푸는 것이다. 이미 꼬리를 잡았고 차곡차곡 증거를 모아, 결정타 날릴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다른 하나는 돌아선 리아의 마음을 다시 얻어내는 것. 첫 번째 계획이 성공해 두 집안끼리 오해를 푼다고 해도, 그녀가 다시 그를 사랑할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원래는 서서히 다가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리아가 대학 선배와 사귄다는 말을 민수에게 전해 듣는 순간,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민훈과 사랑에 빠지면, 다시는 그녀를 되찾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할 수 없이 결혼 계획을 급히 6개월이나 앞당겼다. 그래서인지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거 같다.

“헤어진 지, 벌써 5년이나 지났어. 그동안 서로 좋은 얼굴로 본 것도 아니고. 상처가 너무 깊어. 아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런데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신혼여행에선 일광화상을 당하고, 어젯밤엔 피까지 보았다. 멀쩡하게 잘 지내던 그녀가 자신과 결혼하고 나서 자꾸만 다치는 것 같아, 태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도 한남동 본가에 혼자 있을 리아가 걱정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혼자 괜찮을까? 지금에라도 당장 집으로 달려가고만 싶었다. 태호는 벽에 걸린 애꿎은 시계만 빤히 노려보았다. 아, 오늘따라 시간이 너무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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