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움직이지 마.2021.04.11.
“우리 계획에 아이 갖는 건 없었잖아.”
두 사람만 있게 되자, 리아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리아와 태호는 태호의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서로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분가를 허락한 이유,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
“왜? 이유 알았으면 분가 안 했을 거야?”
……음, 그건 아니다. 분가는 해야지. 오늘처럼 식사했다간, 소화불량으로 제 명대로 못 살 거다. 하지만 그래도 분가 조건이 빨리 아이를 낳는 거였다니! 마른하늘에 벼락이 수천 번 내리쳐도 이렇게까진 놀라지 않겠다.
“회장님, 우리 2세에게 회사 물려줄 생각, 언제부터 하신 거야? 넌 알고 있었어?”
태호는 대답 대신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였다.
“내가 알았든 아니든, 상관있나?”
“야, 강태호!”
물론 태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니까. 태호는 정혼 이야기를 꺼내며 넌지시 강 회장에게 두 사람의 아이에게 KJ푸드를 물려주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강 회장 세대에선 쪼개진 ㈜정직이 손주 세대에서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거니까. 정혼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강 회장은 손주 이야기에는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진실을 알 까닭이 없는 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째, 그녀가 예상했던 결혼 생활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감정 같은 거, 완벽히 정리하고 이젠 희미한 흔적만 남을 줄 알았는데…….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자꾸만 태호에게 끌려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데 이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아이 문제라니! 아까 분위기로 봐선, 당장 올해 안에 임신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장남인 태문은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2세 소식이 없다. 그래서 이젠 차남인 태호에게 부담을 주는 걸까? 끝내 리아와 태호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강 회장은 어떻게 나올까? 리아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며 경우의 수를 구했다.
“5년 후, 네가 경영권을 차지하면 그때 KJ푸드를 넘겨받기로 하고 결혼에 동의한 거야. 그런데 회장님은 우리 2세에게 물려줄 생각이시라며. 자칫 잘못했다간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
“어차피 아버진 5년 후면 은퇴하셔. KJ푸드 인수 건은 그 후에 내가 처리하면 돼.”
그 말은 즉 5년 동안 아이를 낳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소리다. 이름뿐인 정략결혼이라 시부모가 손주 볼 마음이 없다면 몰라도, 저렇게 대놓고 어서 낳기부터 하라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5년 동안,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으면……. 그때 회장님이 어떻게 나오실지, 생각해봤어? 태문 오빠가 우리보다 먼저 아이라도 낳아봐. 경영권이 그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
리아의 진지한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태호가 피식 웃었다.
“그럴까?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네.”
“너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웃지 말라는 데도 태호의 입꼬리는 아까보다 더 위로 말려 올라갔다.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이제 막 결혼했어. 2세 계획은 천천히 해도 돼.”
“뭐?”
천천히 하긴, 뭘 천천히 해! 우린 애초에 그런 계획이 없었다고!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말문이 막힌 리아는 털썩 창가에 놓인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태호는 그녀 옆에 따라서 앉으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아버진 능력 있는 사람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실 거니까.”
과연 그럴까? 그렇겠지? KJ그룹이 구멍가게도 아니고 자식이 있고 없고 하는 문제로 후계자 문제를 처리하진 않겠지? 그건 오로지 ‘막장 드라마’에나 나오는 단골 소재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리아가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처럼 보이자, 태호는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가 모두 열리고 그가 셔츠를 벗으려고 하자 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젠 자주 벗은 몸을 봐서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아직도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태호는 태연한 얼굴로 리아를 마주 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려면 옷 갈아입어야지.”
“여기서?”
“그럼 내 방에서 갈아입지. 어디서 갈아입어?”
아, 맞다. 여긴 그의 침실이었다. 그제야 리아의 눈에 방금 자신이 앉았던 싱글 베드가 들어왔다. 키 큰 사람을 위해 제작된 싱글 베드라 길이는 제법 길었지만, 폭은 한 사람이 넉넉하게 누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일주일간 여기서 머물러야 하는데, 이 좁은 침대에서 함께 자라는 건 아니겠지? 리아는 서둘러 방 안을 둘러보다, 가죽 소파를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저거 소파 베드지.”
“아니, 그냥 소파.”
아이 씨, 정말! 리아는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신혼여행에서부터 왜 침대가 말썽인 거야! 태호는 어쩔 줄 모르는 리아를 뒤로 한 채, 셔츠를 벗으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리아는 매끈한 근육으로 뒤덮인 남자다운 등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난 오늘 소파에서 잘게.”
“소파에서 자면 허리 아플 텐데?”
괜찮아. 내가 그냥 허리 아프고 만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온 태호는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겁먹은 표정은 뭐지?”
리아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엔 겁먹었다. 침대가 좁아도 너무 좁거든.
“큭.”
그때 갑자기 태호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게스트룸 준비해놨어. 우리 거기서 지낼 거야.”
……어? 태호의 말에 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짐 모두 옮겨놨을 테니까, 잠옷은 거기서 갈아입으면 돼.”
말을 마친 태호는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침실을 걸어 나가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리아는 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또 속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리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멀어지는 태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두고 보자, 강태호!
***
“캬아! 역시 맥주는 원 샷이지.”
태희는 잔을 말끔히 비우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작은오빠가 집에 없으니 날아갈 것같이 행복하다. 그런 태희에게 친구 서현이 찬물을 끼얹었다.
“태호 오빠, 신혼여행 잘하고 있을까?”
“울 오빠 신혼여행을 왜 네가 걱정해?”
뜬금없는 질문에 태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티격태격 치고받던 앙숙끼리 신혼여행을 갔는데 넌 걱정 안 돼?”
“글쎄? 지금쯤 새언니, 펑펑 울고 있으려나?”
태희는 자기가 상관할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설마.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겠지.”
“너도 당해봤으면서 모르냐?”
“하긴…….”
서현도 새벽까지 클럽에서 놀다가 태희와 함께 태호에게 끌려간 적이 있었다. 자기 동생 벌주면서 동생 친구까지 덤으로 혼내는 무시무시한 오빠라니! 서현은 암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서현의 눈에, 당시 두 사람을 잡으러 왔던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헐! 태희야, 숨어! 남 비서 떴어.”
“어?”
태희는 술집 안에 들어서는 남 비서를 발견하고 서둘러 맥주 피처 잔 뒤로 얼굴을 숨겼다. 남 비서는 누구를 찾는 듯 실내를 둘러보더니, 이내 창가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괜히 남 비서 눈에 띄었다가 태호 귀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골치 아프게 된다. 태희과 서현은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심조심 자리를 벗어났다. 남 비서는 일행과 대화 하느라, 두 사람이 지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라도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인지라, 태희는 힐끗 남 비서의 일행을 훔쳐보았다. 어라? 상견례와 결혼식장, 딱 두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새언니, 주리아와 똑같은 얼굴이니까. 남 비서가 왜 사돈을 만나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남 비서에게 안 들키고 도망가는 게 우선이다.
“근데 이상하네?”
무사히 술집을 빠져나온 태희은 우뚝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싸한 기분이 드는 게……. 순간 태희는 뭔가를 깨달은 듯 급히 휴대폰 전원을 켰다. 아니라, 다를까! 휴대폰을 켜자, 정 여사에게 온 문자 알림이 화면을 채웠다. 악, 어떡해! 날짜를 착각했어.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작은오빠 돌아오는 날이야!
“빨리 집에 가야 해. 작은오빠 돌아왔대!”
태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 자정이 넘은 시각. 리아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꼬르륵―. 아까부터 계속해서 뱃속에서 불쌍한 신호를 보냈다. 핵폭탄급 발언 탓에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배고파서 통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좀 먹을걸……. 도저히 안 되겠다. 뭐라도 먹어야지. 결국, 리아는 태호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소리 나지 않게 하려고 슬리퍼도 벗은 채, 맨발로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은 쉽게 찾았지만, 전등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불 켜지 않아도 가전제품에서 나오는 불빛 덕분에 충분히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리아는 불 켜는 것을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냉장고로 다가갔다.
“어?”
냉장고 문을 연 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냉장고 안은 텅 빈 상태였다. 음식은 고사하고 된장, 고추장, 드레싱 종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무슨 재벌 집 냉장고에 달랑 생수병이랑 우유밖에 없는 거야! 재벌도 그냥 재벌이 아니라, 식품회사까지 가진 재벌이면서! ‘음식 냉장고는 또 따로 있나?’라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두워서 어디까지가 벽이고, 어디부터가 캐비닛인지, 뭐가 냉장고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유나 데워 먹기로 했다. 막 전자레인지에서 유리컵을 꺼내려는데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이런 집에 쥐새끼가 들락거릴 리는 없고. 뭐지? 전자레인지에서 컵을 꺼낸 리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시꺼먼 형체가 눈앞을 휙 지나갔다.
“헉!”
깜짝 놀란 리아가 소리를 내자, 시꺼먼 형체에게서 커다란 비명이 흘러나왔다.
“꺄아아악!”
쩌렁쩌렁한 소리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유리컵을 떨어뜨렸다. 퍽, 소리가 나며 컵이 깨지고 유리 파편이 대리석 바닥에 흩어졌다. 동시에 뜨거운 우유가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 위에 쏟아졌다.
“……아.”
날카로운 통증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주위가 온통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라 조금이라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니?”
그때 정 여사의 목소리가 들리며 컴컴한 주방이 순식간에 훤해졌다. 불이 들어오자, 시커먼 형체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런 바로 태희였다. 그녀는 식겁한 얼굴을 하고 얼음 땡 자세로 앞에 서 있었다.
“태희야?”
“엄마!”
태희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쪼르르 정 여사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집안사람 깨지 않게 몰래 차고 통해서 들어왔는데, 주방에 누가 있잖아. 나, 너무 놀랐어!”
“어머, 이런. 많이 놀랐니?”
정 여사는 안쓰러운 얼굴로 태희의 등을 토닥거렸다. 리아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부둥켜안은 모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리아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조금만 신경 쓴다면 유리 파편 때문에 꼼짝달싹을 못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아, 나는 지금 시월드에 와 있구나, 하는 현실을 깨닫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선 “지금 너무들 하신 거 아니에요? 저, 다쳤다고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댁 입성 첫날이니, 조금만 참아보기로 했다. 경기로 치자면 탐색전이랄까? 우선은 시댁 식구들의 성향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하니까.
“……아.”
다시금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자, 리아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리 파편이 튀면서 발을 벤 모양인지, 피가 흐리고 있었다. 하얀 우유에 피가 번져 분홍색이 된 모습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딸기 우유를 쏟은 줄 알겠다.
“리아야, 괜찮아?”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태호가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한 번에 상황을 파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쳤어?”
“어, 조금…….”
“움직이지 마.”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 리아를 황급히 말리며 태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리퍼 아래로 유리 파편이 파삭, 으스러졌다. 이윽고 그녀 앞으로 다가온 태호는 손을 뻗어 단번에 리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당황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치 백마 탄 왕자님에게 구원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온몸을 감싸고, 시원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왠지 모르게 울컥 감정이 솟구치려 하자, 리아는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아, 그가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