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갑자기 아이라니?2021.04.07.
“초콜릿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깜빡 잠이 들었던 태호는 익숙한 노랫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이 노래는……? 어릴 적, 리아가 자주 부르던 노래다. 원래는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고 떡장수 아줌마를 협박하는 구절인데 떡을 싫어한 리아는 자기 마음대로 떡에서 초콜릿으로 개사했다. 리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초콜릿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노래를 부르며 태호에게 손을 내밀곤 했었다. 태호 이름의 ‘호’가 호랑이 ‘호(虎)’라는 걸 모르는 채……. 그렇게 하룻강아지 리아는 호랑이 태호에게서 넙죽 초콜릿을 받아 갔다. 아주 가끔 그의 뺨에 쪽 소리 나게 뽀뽀도 해주면서……. 그러나 아쉽게도 리아는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유치원 다닐 때 일을 누가 일일이 기억해.
어릴 적 일이 기억나지 않느냐고 묻는 태호에게 리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었다. 물론,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태문조차 드문드문 기억할 뿐 세세한 건 기억하지 못하니, 리아에게만 뭐라 할 건 아니었다. 그래도 서운한 것 사실이다. 어린 그의 뺨에 먼저 뽀뽀해 놓고선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니…….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초콜릿을 입에 넣는 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 냄새 때문일까? 아니면 리아가 오빠라고 불러줘서일까? 방금 태호는 어린 시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태호가 건네준 초콜릿을 다람쥐처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지금은 초콜릿을 입에 넣고 살살 굴려 먹지만.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눈꼬리를 휘면서 초콜릿을 먹는 건 여전하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그런 리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말랑말랑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하룻강아지 호랑이가 무서운 줄 모른다!’가 아니라, ‘하룻강아지 호랑이를 마구 홀린다!’가 아닐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리며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리아는 모를 것이다. 그녀 앞에서 무장 해제되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일부러 더 차갑게 더 매섭게 바라봐야 했다는 사실을. 그때는 때가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역시, 때가 아니다. 어떻게 계획해서 끌어낸 결혼인데, 섣불리 행동했다가 모든 것을 망치게 할 순 없었다. 그래도 잠시만 경계를 푸는 것쯤은 괜찮겠지. 리아는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걸 모른 채,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어려선 그렇게나 초콜릿을 좋아하더니, 나이 들어선 초콜릿 먹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었다. 세상이 달콤하기보다는 씁쓸하다는 것을 깨달아서일까? 지금도 그렇다. 입안에 달콤한 초콜릿이 한가득하면서 그녀의 얼굴이 쓴 약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일그러졌다.
“왜 그래?”
태호가 묻자, 리아는 찡그린 얼굴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것 좀 봐!”
리아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뜨거운 신혼여행’이라는 태그와 함께 두 사람이 키스하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영락없이 두 사람이었다. 누가 개인 SNS이나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린 사진이 순식간에 퍼져나간 모양이다. 공항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사진 아래엔 친절하게 모그룹 차남과 J식품 차녀라는 설명까지 적혀있었다. 얼마 전, <치열한 경쟁 속에서 피어난 ‘로미오와 줄리엣’ 세기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기사까지 올랐으니, 대부분 손쉽게 두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것이다. 한껏 짜증 난 표정인 리아와 달리, 태호는 피식 입매를 비틀었다.
“잘됐네.”
“잘되긴 뭐가 잘돼?”
태호의 담담한 반응에 리아의 목소리가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불화설에 휩싸이는 걸 막으려 한 것뿐이지, 이렇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키스하는 사진이 온라인에 도배되길 원한 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어. 연기가 너무 과했다니까! 그녀와는 반대로 태호는 오히려 상황을 즐기는 표정이었다.
“내일 주원식품이랑 KJ, 주식 좀 오르겠네.”
“뭐?”
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렸다. 무슨 얘기만 나왔다 하면 사업과 연관을 짓는 거야! 아무리 사업상의 이유로 결혼한 거라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지만 사람들 눈이 있으니 뭐라고 쏘아붙일 수도 없고, 가만히 있으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리아가 흘겨보든 말든 태호는 그녀 쪽으로 가만히 얼굴을 기울였다.
“이제부터 공공장소에선 오빠라고 불러.”
그녀만 들을 수는 있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일등석 승객이라곤 두 사람 외에 맨 끝 좌석에 앉은 외국인 한 명밖에 없었지만,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싶어 조심스러웠다. 이번엔 리아가 그에게 얼굴을 기울였다. 귓속말을 나누는 모습이 멀리서 보기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같았다. 내용은 전혀 그게 아니지만…….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라는 호칭이 좀 더 자연스럽고 진짜 같으니까. ‘여보’라고 부르긴 좀 그렇지 않나?”
이건 뭔 또 수작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부로서 호칭을 정리하긴 해야 했다. 지금처럼 ‘야, 강태호!’라고 부를 순 없고, ‘여보’라고 부르려니, 한 20년 같이 산 부부처럼 느껴졌다. 47분 먼저 태어났다고 오빠가 된 민수와 달리, 태호는 그녀보다 6개월은 먼저 태어났으니까 오빠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오빠’라는 호칭이 제일 만만하기도 하고.
“그래, 오빠.”
‘오빠’는 마법의 단어라더니, 맞는 모양이다. 그녀가 오빠라고 불러주자, 태호의 입꼬리가 한껏 휘어졌다. 흥, 오빠라는 소리가 그렇게 좋나?
“내가 오빠라고 불러주면 넌 날 뭐라고 부를 건데?”
그녀는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는 그녀를 계속해서 ‘리아’로 부른다면 뭔가 밑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나’라고 부를 순 없잖아!
“글쎄……. 뭐라고 부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태호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자기야? 베이비?”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리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됐어. 그냥 이름 불러.”
리아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기울였던 몸을 빠르게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 대화는 그만이라는 표시로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틀었다. 아으, 자기라니, 베이비라니! 무시무시하게 낯간지러운 호칭에 오소소 닭살이 돋는다. 그런데 한편으론 소름 돋는 그 느낌이 묘하게도 좋았다. 일종의 일광화상 후유증인가? 리아는 감각 기관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Baby, baby, baby, you’re my baby~♬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헤드폰에서 흘러나왔다.
*** 인천공항에서 두 사람을 픽업한 남 비서는 곧장 한남동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당연히 신혼집으로 간다고 생각했는데 차가 신혼집을 지나치자, 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첫 일주일은 본가에서 지내야 해.”
태블릿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태호가 짧게 말했다.
“그런 말 없었잖아.”
“물어봤다면 얘기해줬겠지.”
신혼여행지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신혼여행 후의 일정 역시 전혀 관심 없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신혼집 아니면 청담동 친정으로 갈 줄 알았지, 곧장 시댁으로 갈 줄이야. 강씨 집안엔 결혼하면 적어도 본가에서 5년은 살아야 한다는 집안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강 회장은 집안 전통을 깨고 두 사람에게 분가를 허락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건가? 한마디로 일주일 동안 짧은 시집살이 체험을 하라고? 잠시 뽀로통했던 리아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고작 일주일인데, 뭐. 후계자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가 넓은 아량으로 받아준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있었다. 리아는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말을 꺼냈다.
“나니까 오케이 하는 거야. 원래는 신혼여행 다녀오면 친정부터 가는 거라고. 시댁이 아니라.”
“빈집에 가서 뭐 하려고? 장인어른 지금 동남아 출장 중이시잖아. 장모님은 자선 행사로 제주도 가셨고.”
의외였다. 그가 그녀 가족의 일정을 훤히 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결혼했다고 따로 챙기는 걸까? 아니면 경쟁 상대의 동향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어서일까? 리아에게서 아무런 말이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그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청담동은 장인어른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가도록 해.”
“그래.”
리아는 짧게 대답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장인어른, 장모님이란 호칭이 영 적응이 안 된다. 솔직히 결혼식은 올렸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긴 했다. 시댁도 시댁 같지 않고, 친정도 친정 같지 않았다. 시작부터 그랬다. 양가가 한자리에 모이는 상견례부터 상견례 같지 않게 진행되었으니까. 식사도 없이 차 한 잔 앞에 놓고 끝났다. 아무리 조부 뜻에 따라 사돈을 맺기로 했다지만, 깊은 앙금의 골이 메워진 건 아니라서, 강 회장과 주 회장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었다.
―흐흠.
―허험.
서로 헛기침 주고받고, 끝이었다. 대학 선후배 사이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정숙희 여사와 민성은 여사만 형식적으로 결혼식 준비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긴 세월 경쟁하며 살았는데, 어제의 적이 오늘의 사돈으로 한순간에 바뀔까 싶다. 그게 쉬었으면 예전에 정치판으로 뛰어들었겠지. 역시나 오늘도…….
“왔구나.”
“어서 와라.”
리아를 맞이하는 강 회장과 정 여사는 그리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건 장남인 태문도 마찬가지였다. 예의상 미소는 지었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리아가 어렸을 때, 강 회장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전의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따뜻하게 대해주셨을까? 긴장하지 않으려고 해도, 은근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시월드가 이런 느낌이구나. 뭔가 서늘하면서도, 어색하고, 어딘지 모르게 압박받는 느낌이랄까.
“모두 시장하시죠? 저녁 준비가 다 됐어요.”
주방에서 나온 태문의 아내 소정만이 진심으로 기쁘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소정은 며느리끼리 서로 아군이라는 것처럼 리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우선 식사부터 하자꾸나.”
정 여사의 제안으로 온 가족이 저녁 식탁에 모였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갔다는 막내 태희만 나타나지 않았다.
“태희는 어디 가고요?”
태호가 태희를 찾자, 정 여사가 변명에 나섰다.
“태희가 요즘 공부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나 보다.”
“공부 재미가 아니라, 노는 재미겠죠.”
태호의 비아냥거림에 정 여사는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휴대폰을 꺼놓았는지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확인 안 하는 걸 보면, 태호 말대로 노느라 정신없는 게 분명하긴 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비서라도 딸려 보낼 것을. 그래도 새 식구인 리아 앞에서 막내딸을 흠잡고 싶진 않은 정 여사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어찌 됐든 이제 두 사람, 부부가 되었으니, 과거는 잊고 한 가족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음식 식기 전에 어서 먹자꾸나.”
정 여사의 덕담에 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용은 그럴싸하지만, 그저 말뿐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리아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상한 건 아니었다. 애초부터 기대한 것도 없었다. 드러내고 싫은 티만 내보이지 않아도 다행이라 여겼다. 강 회장은 짧은 덕담조차 없이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말 한마디 없이 모두 침묵 속에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하는 리아의 가족과는 정반대였다. 최고급 만찬이 놓여있으며 뭐 하나?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매일 밥을 먹지? 리아가 막 음식을 한입 삼키려고 할 때였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집안 전통을 깨고 분가를 허락한 이유, 잘 알고 있을 거다.”
네에? 분가에 이유가 있었다고요? 금시초문인 리아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하지 않으마. 어서 낳기만 해라. 그러면 부부간에 없던 애정도 생길 테니까. 아이만 태어나면 KJ푸드를 그룹에서 독립시켜, 너희 2세에게 물려주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강 회장의 핵폭탄급 발언에 리아는 한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처럼 뻣뻣하게 얼어버렸다. 갑자기 아이라니! 우리 결혼에 그런 계획은 없었잖아! 리아는 황급히 옆에 앉은 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만큼 놀랐을 거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아버지.”
어? 그럴게요? 뭐가 ‘그럴게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