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태호, 너! 리아 울렸어!2021.04.04.
쌍둥이인 리아와 민수가 4살, 형제인 태호와 태문이 각각 5살, 8살이 되던 해. 주씨 집안, 강씨 집안, 양가가 가족처럼 가깝게 자주 왕래하며 지낼 때의 일이다.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난 민수가 지방 외가댁으로 요양을 하러 가게 되자, 혼자 남은 리아가 걱정된 어른들은 같은 또래인 태호와 어울리게 했다. 하지만 리아는 어려운 말만 늘어놓는 천재 꼬마 태호보단 평범한 소년 태문을 더 좋아했다. 태문도 까다로운 동생 말고 리아와 노는 게 더 편했다. 리아는 얼굴도 예쁜 데다, 생글생글 잘 웃고, ‘오빠, 오빠’라고 따르며 말도 잘 들었으니까.
“오빠아.”
“리아야.”
그렇게 리아와 태문은 만나기만 하면 우당탕 집 안을 휘젓고 뛰어다녔다.
“쳇.”
혼자 남겨진 태호는 그런 둘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특히 리아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태호의 눈에 리아는 툭하면 ‘꺅’ 비명이나 지르고, 조잘조잘 말 많은 시끄러운 아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나이도 한 살 어리면서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거다. 빠른 연생인 리아는 한 살 어려도 태호와 같은 유치원생이어서, 같은 유치원생끼리는 오빠, 동생이 될 수 없단다. 초등학생이고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태문만이 오빠라나? 그런 말 같지 않은 이유를 대다니! 리아는 머리가 나쁜 게 분명하다고 태호는 생각했다. 유치원에선 서로 태호 옆에 앉겠다고 싸움이 나는데, 리아는 태호를 아예 없는 아이 취급했다. 미적분도 못 풀고 이제 겨우 곱셈과 나눗셈을 하는 멍청한 형, 태문만 졸졸 따라다녔다. ‘바보는 바보끼리 어울리나 보다.’ 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은근히 괘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리아와 태문은 주로 숨바꼭질하며 놀았는데 태호에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놀이였다. 숨어봤자 어차피 집 안이고, 다른 차원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닌, 그저 눈에 안 보이게 숨는 것뿐이니까. ‘눈 가리고 아웅’으로 왜 시간을 낭비할까? 그럴 시간이 있으면 책이라도 한 권 더 읽는 게 낫겠다. 태호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언제나 리아와 태문 중 한 명이 들어와 급하게 숨을 곳을 찾곤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둘이 귀찮은 태호는 테라스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것만 잠시. 테라스로 가버리면 테라스로 쫓아오고, 식당으로 가면 식당으로 따라왔다. 독서를 방해하려고 일부러 심통 부리는 게 분명하다. 혼자 분을 삭이던 태호는 결국, 자신도 두 사람의 숨바꼭질을 훼방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리아가 서재로 뛰어들었다. 여기저기 숨을 곳을 찾던 리아는 여의치 않자, 창가의 묵직한 커튼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후, 술래인 태문이 서재로 들어왔다. 커튼 아래로 리아의 발이 삐죽 튀어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바보 같은 태문은 엉뚱한 곳에서 리아를 찾아 헤맸다. 하여간 멍청해서는……. 태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푹 한숨을 쉬었다.
“형, 잠깐만.”
태문이 서재를 그대로 나가버리려 하자, 태호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얘, 여기 숨었어.”
태호가 커튼을 확 걷어버리자, 숨어 있던 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앗!”
화들짝 놀란 리아는 ‘너 죽을래?’ 하는 눈으로 째려보았지만, 태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무시해버렸다. 쪼그만 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뭘 봐?”
태호를 매섭게 노려보던 리아는 뭐가 그리도 억울한지 주먹을 움켜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아앙.”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울음을 터뜨렸다.
“태호, 너! 리아 울렸어!”
숨은 리아를 찾아줬는데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태문은 어른들께 이른다며 서재를 뛰어나갔다. 태문이 안 보이자, 리아는 더 크게 목 놓아 울었다.
“앙, 아아앙!”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성격인가? 왜 이런 걸로 울지? 태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리아가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고작 술래에게 들켰다고 울 것까진 없잖아! 하지만 이렇게 놔두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어른들이 오면 서로 화해하라면서 억지로 손을 잡으라고 하겠지. 태문과 싸울 때도 항상 그랬다. 정말이지 그런 유치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런 울보와는. 그러려면 울음부터 그치게 해야 하는데…….
“울지 마.”
“아아아앙!”
울지 말라는 소리에 울음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그렇지, 울지 말란 소리에 뚝 그칠 아이면 애초에 울지도 않았겠지.
“야, 이거 너 먹어.”
할 수 없이 태호는 아까 어른들이 나눠 준 초콜릿을 리아에게 내밀었다. 리아와 태문은 초콜릿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게 눈 감추듯 해치웠고, 태호는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두었었다. 이빨 썩는다고 하루에 딱 한 개만 허락되는 소중한 초콜릿. 태어날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3살에 한글을 떼고, 4살에 영어 구사, 5살에 미적분을 푸는 태호라도 아직 아이는 아이였다. 또래처럼 초콜릿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황금 덩어리와 초콜릿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초콜릿일 정도로 말이다. 지금 그 귀중한 걸 이 울보에게 양보한 거다.
“와아.”
초콜릿을 본 리아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대신 울지 마.”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 그쳤다.
“응. 안 울어.”
아직도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한 주제에 리아는 활짝 웃으며 초콜릿 바를 손으로 꼬옥 움켜쥐었다. 얘는 먹는 거에 약하구나. 뭐가 그리도 좋은지 리아의 통통한 뺨이 발그레 붉어졌다. 그리고 온 세상을 가진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한 입 먹어보란 소리 없이 야금야금 초콜릿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태호는 다람쥐를 구경하듯 리아가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신기했다. 그 순간만큼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과 빨개진 얼굴이 귀엽게 보였다. 그다음부터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리아를 힐끔힐끔 훔쳐보게 되었다. 초콜릿을 안 먹고 숨겨두었다가 리아가 오면 손에 슬쩍 쥐여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리아는 눈꼬리를 휘며 예쁘게 웃었다. 그때부터인 거 같다. 리아가 눈꼬리를 휠 때마다 가슴이 설레며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게……. 하루는 조금 더 큰 초콜릿을 줬다고 좋아하며 팔짝팔짝 뛰더니, 와락 끌어안으며 볼에 뽀뽀까지 날렸다. 그날이 바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날이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초콜릿을 다 먹은 후에도 그대로 태문에게 달려갔다. 오로지 초콜릿을 건네줄 때만 태호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간식을 주면 꼬리치고 애교 부리다, 간식을 끝내면 ‘왈왈’ 짖고 도망가는 댕댕이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깜짝 놀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 형이랑 리아랑 결혼한다고?”
“응. 우린 정혼한 사이래.”
정혼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태문은 뻐기듯 대답했다. 수컷의 본능일까? 이거 하나만은 잘난 동생보다 우위를 차지한 것 같아 우쭐한 것 같았다.
“집안끼리 정혼인데 왜 꼭 형이 해야 해?”
“그거야 내가 첫째니까. 내가 첫째니까 회사도 물려받는 거고, 내가 첫째니까 리아랑 결혼도 하는 거야.”
그날 태호는 5살짜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나쁜 말을 속으로 외쳤다. 다른 것은 몰라도 리아를 형수로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 시간이 흘러, 동업이 깨지며 두 집안의 관계가 틀어졌었을 때, 태호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형이랑 리아가 결혼할 일은 없겠구나. 두 집안 사이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리아와 사이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태호에겐 두 집안의 불화가 행운으로 다가왔다. 대학에 들어가고, 리아와 재회하게 될 때까진……. *** 현재, LA 국제공항. 뜨겁고 진하게 내리눌렀던 입술은 제 할 일을 끝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곧바로 떨어져 나갔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이별 후, 처음으로 입술이 닿아서일까, 아니면 입술이 닿으니 감정이 연결된 느낌이 들어서일까.
“하아.”
리아는 티 나지 않게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래서 키스가 위험하다는 거다. 괜히 멀쩡한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아니, 마음만 싱숭생숭하면 다행이게.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감각 또한 급속도로 되살아났다. 기억력이란 녀석은 어쩌면 이다지도 재생력이 뛰어난지, 과거에 느꼈던 감각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포개던 모습에서부터 숨 막히게 얽히던 숨결,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파고들던 열기 등등. 마치 서로에게 미쳐 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다리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주저앉지 않으려면 그의 허리를 꽉 움켜쥐어야 했다. 지금 순간 그녀를 흔들리게 하는 것도 그였고, 지탱하게 하는 것도 그였다. 한 번 더 확실히 하려는 듯 태호가 또다시 입술을 내렸다. 이번에도 짧게 머물다 곧 물러났다. 그래서 더 애가 탄다. 희롱만 하다 약 올리듯 도망가는 거 같아서…….
“사랑해.”
입술을 떼며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뭐? 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랑한다고? 순간 유리창이 깨지듯 리아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파열음이 일어났다. 동시에 설레던 분위기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아, 맞다, 우린 지금 연기하는 중이었지. 태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가 그녀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어째서냐고? 둘이 사귀는 동안, 태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적 없었으니까. ‘너밖에 없어, 보고 싶다, 내 곁에만 있어.’ 등등 많은 표현 중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너무 쑥스러웠을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말 한마디보단 으스러지게 끌어안아 주던 행동에서, 사랑을 확신했다. 그랬었는데……. 지금 그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헤어지고 5년이나 지난 지금에, 법적으로만 남편일 뿐 감정상으론 타인과도 같으면서 그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정말 대단하네, 강태호. 아무리 연기라도 그렇지.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속삭이다니. 리아는 기가 막힌 듯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아예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아예 마음이 없어서 쉽사리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게 없다더니,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자, 괜스레 울컥한 감정이 치솟았다. 좋아, 나도 똑같이 대처하면 그만이야. 속은 싸늘하게 식었지만, 리아는 겉으론 태연한 척 연기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나도 사랑해, 오빠.”
리아가 다시 오빠라고 부르자, 태호는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오빠라고 불릴 때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인상을 쓰며 ‘야, 강태호!’라고 소리칠 때도 참기 어려웠는데, 눈꼬리를 휘며 애교를 부리면,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연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설렌다. 결국, 태호는 팔을 뻗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연기로 받아들였는지, 가만히 몸을 맡겼다. 약간 몸을 바르작거리긴 했지만,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태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하지만 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은 거두지 않았다. 다시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그는 그녀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
“초콜릿 주면 안 잡아먹지~♬”
리아는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기내 간식으로 나온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이미 볼만한 영화는 모두 보았기에 온라인에 접속해 지루한 비행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기내 와이파이에 휴대폰을 연결했다.
“이건?”
여기저기 포털 사이트를 둘러보던 리아의 눈이 한곳에 멈췄다.
“왜 그래?”
무슨 일이냐고 묻는 태호에게 리아는 짜증 난 얼굴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것 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