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서로를 집어삼키듯2021.03.31.
부부끼리라고? 그래, 부부끼리라고 한다면 나도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거든! 어차피 선크림을 바르긴 발라야 하니까. 강렬한 태양에 화상이라도 입으면 나만 손해지. 결국, 리아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손길에 등을 맡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고 말았다. 무슨 선크림 하나 발라주는데도 뭐 이렇게까지 자극적인 거야! 손바닥으로 등 한가운데 선크림을 펴 바르더니, 마사지하듯 어깨와 허리를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강약을 조절하며 자극하는 손길이 너무나 황홀해서 태연한 척하려 해도, 자꾸만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예민한 부분에 손끝이 다가오나 싶더니 약 올리듯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아쉬움에 한숨마저 흘러나왔다. 그러나 리아는 곧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분위기가 로맨틱하다고 줏대 없이 홀라당 넘어가고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자,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다 됐어.”
어깨와 등 전체에 선크림을 바른 태호는 순순히 손을 떼고 물러났다. 이어서 자신도 선크림을 바르고 풍덩,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그 틈을 타, 리아는 등 뒤로 손을 돌려 벗겨진 비키니 상의 끈을 묶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유자적하게 물살을 가르는 태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어깨와 튼튼한 팔로 물살을 가를 때마다 하얀 물보라가 일어났다. 리아는 무릎을 껴안고 앉으며, 말없이 그가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래 사귀었지만, 둘이 함께 수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몰래 하는 연애이니,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선정에 걸림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땐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그땐 그랬다. 지금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지지만……. 이젠 사랑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경우에 따라선 목숨 같은 사랑일지라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생각에 잠긴 리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몰랐던 때가 좋았는데…….”
그때 수영을 마친 태호가 요트로 올라왔다. 뒤숭숭한 마음에 그와 얼굴 맞대기 껄끄러운 리아는 그를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이후에도 될수록 태호를 피했다. 그러나 아무리 요트가 넓다고 한들, 끝까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끝내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태호와 부딪쳤다.
“바닷물에 선크림이 씻겼을 거야. 다시 발라줄게.”
“괜찮아. 워터프루프니까.”
리아는 빠르게 거절하며 그의 곁을 지나쳤다. 다행히 그는 잡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도움을 뿌리친 결과는 그날 밤, 처참하게 돌아왔다.
***
“아아아!”
리아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요트에선 몰랐는데 리조트로 돌아오니, 햇볕에 노출되었던 부분이 슬슬 붉어지며 가렵기 시작했다. 일광화상 증상은 대부분 3~6시간의 잠복기를 거친다고 하더니, 증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태호는 묵묵히 거실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리조트 직원이 알로에 젤을 들고 나타났다. 나중에 알았는데, 일광화상을 당하는 손님이 자주 있어, 리조트엔 항상 알로에 젤이 준비돼 있단다.
“엎드려.”
이번엔 사양할 수 없었다.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등과 어깨가 동시에 화끈거려 도저히 혼자선 불가능이었다. 리아는 얌전히 침대에 엎드린 다음, 조심조심 상의를 벗었다. 벌거벗은 등이 훤히 드러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흐윽.”
차가운 젤이 살갗에 닿자,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햇볕에 잘 익은 홍시처럼 빨갛게 익은 주제에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고통 속에서도 짜릿함을 느끼다니. 어디 감각세포가 고장 난 게 분명하다.
“많이 아파?”
신음에 그가 바르던 손길을 멈추었다.
“아파. 살살해.”
“……후.”
그러자 태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경이 될 정도로 버틴 그녀가 한심하다고 느껴졌을까? 그럴 거다, 그녀 자신도 본인이 한심해서 미치겠는데 당연하다.
“난 거실에서 잘게.”
알로에 젤을 모두 바르고 몸을 일으키며 그가 말했다. No pain, No gain!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말처럼, 일광화상 덕분에 리아 혼자 원형 침대를 독차지하게 됐다. 영광의 화상이랄까?
“소파에서 자면 불편할 텐데.”
그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소파에서 자려면 몸을 웅크려야 할 것이다. 자신의 부주의로 생긴 일이라, 리아는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소파 베드니까.”
태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곤 문 쪽으로 향했다. 응? 소파 베드? 리아는 황당한 눈으로 태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소파 베드라면 소파를 침대로 변환할 수 있다는 거네. 뭐지? 이 사기당한 것 같은 느낌은? 어젯밤도 소파 베드에서 자면 되는 거였잖아! 속았다고 생각하니, 방금까지 들었던 미안한 감정이 싹 사라져버렸다. 그날 밤, 리아는 화끈거리는 등을 부여안고 원형 침대에서 홀로 잠을 청했다. 훨씬 편하게 잘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뭔가 허전한 게, 도통 잠이 오지 않……. 아니, 그게 아니다. 등이랑 어깨가 너무 화끈거려서 잠이 안 오는 것뿐이다. 난 지금 환자니까! 그런데 왜 화끈거리는 통증보다 허전한 아픔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걸까? 낯선 타국에서 혼자 아파하려니, 외로워서? 태호가 진짜 남편이었다면, 수시로 들여다보며 그녀가 어떤지 살펴보았겠지.
“하아.”
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속이 허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 따끔거리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후우.”
한숨을 쉬며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태호는 결국 소파 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맨정신으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태호는 거실 구석에 놓인 바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잔 가득 술을 부었다.
“……제길.”
한 모금 술을 들이켜자, 저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어리석은 자신에게 화가 치솟았다. 천천히 다가가겠다고 하면서도 너무 성급하게 굴었다. 쉽게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리아가 끙끙거리며 신음할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거지? 태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굳게 잠긴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리아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법적으로만 남편일 뿐이니까.
“너와 난…….”
한숨과도 같은 속삭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우린 얼마나 멀어진 걸까. 멀어진 거리만큼 다시 되돌릴 순 있는 걸까. 태호는 잔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잔 가득 위스키를 채웠다. *** 일광화상은 12~24시간 이내에 가장 증상이 악화한다더니……. 아침이 되자, 화끈거리는 어깨와 등이 어젯밤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날 하루, 리아는 침실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도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식사는 두 사람 모두 룸서비스로 해결했다.
“계속 객실에만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너라도 나가고 싶으면 나가.”
자신은 그렇다 치고 태호도 외출하지 않자, 리아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상할 거 없어. 오히려 객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더 자연스럽지.”
“어째서?”
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정말 모르겠냐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갓 결혼한 커플이 호텔 룸에서 뭘 하고 싶겠어?”
순간 리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들 신혼부부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태호는 퉁명스럽게 내뱉곤 그대로 침실을 걸어 나갔다. #갓결혼한커플, #신혼여행, #호텔룸에짱박힘, #알로에젤, #룸서비스, #불타는신혼 등등. 야한 해시태그가 연달아 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건 누가 봐도 육체적 접촉에 몰두하느라 방에만 처박혀 있다고 오해할 상황이다. 물론 활활 타오르게 뜨거운 건 맞다. 근데 그게 온몸이 아니라 등과 어깨뿐이니까 문제인 거지. 하지만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랴.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소문나면 득이 되면 득이 됐지, 나쁠 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로스카보스를 떠나는 날이 되고서야, 독채를 나갈 수 있었다. 태호는 소파 베드에서 잔 이후부터 계속해서 굳은 표정이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고선, 아무래도 여행을 망쳐서 불쾌한 것 같았다. LA 공항에 내려서도 표정을 풀지 않자, 리아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로스카보스에선 두 사람을 알아보는 한국인이 적어서 괜찮았을지 몰라도 LA는 다르다. 혹시라도 서먹한 모습을 누가 휴대폰으로 찍어 SNS에 올린다면 골치 아플 게 뻔했다.
“저기 두 사람.”
“와, 신혼여행 여기로 왔나 봐.”
아니라 다를까! 벌써 두 사람을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리며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건 모두 한류 스타 강수미와 스캔들로 온라인 뉴스를 도배했던 태호 탓이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리아는 앞서 걷는 태호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팔짱 정도는 껴야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접촉에 놀란 듯 태호가 걸음걸이를 늦추고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아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연기해야지. 자, 웃어. 응?’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무 반응이 없자 울컥, 짜증이 밀려왔다. 누군 지금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서로 합의하고 식을 올렸으니 이젠 그녀도 그와 한배를 탄 셈이었다. 사람이 책임감이 있어야지! 리아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태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오빠, 천천히 걸을래? 나, 다리 아파.”
연애할 때조차 오빠라고 부른 적 없으면서, 코맹맹이를 소리를 섞어가며 애교를 부렸다. 순간 얼음 같던 태호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효과가 있자, 리아는 반달 모양으로 눈꼬리를 휘었다.
“오빠, 천천히. 응?”
태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빠? 물론 그녀는 연기를 하는 것뿐이다. 그도 그녀의 장단에 맞춰야 하겠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한번 움직이고 나면 그 후엔 통제할 자신이 없는데…….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억지로 충동을 참다 보니, 화난 표정이 되어버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리아는 생전 안 하던 애교를 부렸다. 누이동생인 태희가 ‘오빠’ 하며 애교를 부릴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물론 너무 좋아서다. 오빠라니……. 유치원 시절, 첫 만남 이후 지금까지 리아는 한 번도 그를 오빠라고 불러준 적 없었다. 처음부터 태호였다. ‘야, 강태호.’ 그녀는 항상 그렇게 불렀다.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 태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얼마나 천천히?”
이윽고 꽉 닫혔던 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화난 것 같은 표정은 그대로였다. 끝까지 표정 안 풀지?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 오기가 생긴 리아는 팔짱을 풀고 대신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좀 더 가까이 밀착되었다. 태호가 얼마나 힘들게 참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리아는 아주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제길! 원래 참고 참다가 터지면 더욱 크게 터지는 법이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태호는 이성적으로 사태를 파악했다. 어쩌면 이곳이 제일 안전한 장소일지 모르겠다. 밖이라서 어차피 끝까지 갈 순 없을 테니까. 태호는 기회를 이용해 조금만 선을 넘어보기로 했다. 먼저 연기하자고 다가온 사람은 그녀였으니까. 마음을 굳힌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앗.”
눈 깜짝할 사이에 단단한 품 안에 갇힌 리아가 놀란 듯 탄성을 질렀다. 연기가 너무 과하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순간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심상치 않은 눈빛에 리아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왜 고개를 숙이는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옆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럴 수 없었다.
“하아.”
간질이듯 부드러운 숨결이 닿는 순간,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이윽고 서로를 집어삼키듯 두 입술이 맞물렸다. ……아! 심장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며, 뜨거운 열기가 입안으로 훅,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