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게 뭐 어때서? 부부끼리인데.2021.03.28.
침실 한가운데 원형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원형이라 가장자리에선 잘 수 없고 반드시 중앙에 누워야 한다. 물론 허니문 침대니까 남녀가 끌어안고 자게끔 디자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번 강조하지만, 두 사람은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아니었다.
“당장 침대 바꿔.”
기겁하는 리아와 달리 태호는 원형 침대를 보고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바꾸는 게, 침대 시트 바꾸는 것처럼 쉬운 줄 알아?”
“그러면 일반 침대가 있는 객실로 바꿔.”
“바꿀 객실 없을 텐데……. 대부분 1년 전에 예약이 끝나거든. 원래는 키안이 예약한 건데 내게 양보한 거야.”
말이 계속될수록 리아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래서 지금 저기서 자라고? 심각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리아에게 태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겁이라도 먹었나?”
그의 도발적인 태도에 걱정은 사르르 사라지고, 화르르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겁먹다니, 그럴 리가.”
리아는 앞으로 팔짱을 끼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몸을 맞대고 자야 한다면 나보단 네가 힘들걸?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그래, 누가 견디나 보자. 마침 때를 맞춰, 짐을 가져온 리조트 직원이 누른 벨 소리가 들렸다. 태호가 직원을 맞으러 거실로 나가자, 리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침대를 노려보다,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굴리던 리아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바꿀 수도 없는데……. 그래, 물침대 아닌 게 어디냐. 이참에 ‘긍정의 여왕’이 되어보기로 했다.
*** 긴 비행에 지친 두 사람은 리조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잘 자.”라는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침대에 들어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간격을 두었다. 리아는 최대한 가장자리에 가까운 자리로 몸을 옮겼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아예 가장자리에 눕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면 그럭저럭 누울 만했다. 대신 조금이라도 다리를 뻗으면 침대에서 벗어난 발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가장자리에서 바동거리는 리아와 달리 태호는 당연한 듯 침대 중앙을 차지했다. 워낙 키가 크니까 몸을 구부려도 가장자리에선 잘 수 없을 테니, 뭐, 이해는 한다. 그래도 그렇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리아는 이게 웬 고생이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데 잠자리가 불편해 도통 잠들 수 없자,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결국 리아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중앙에 몸을 굴렸다. 서로 살이 닿으면 좀 어때. 예전에는 꽉 끌어안고 잘만 잤는데. 잘 자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더라! 등에 닿을 듯 말 듯 태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그는 이미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첫날밤에도 그렇고, 비행기 안에서도 그렇고.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드는 것 같다. 잠자리 까다롭지 않아서, 좋으시겠어? 비아냥거리듯 투덜거리는데, 뒤쪽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리아 어깨에 무언가 툭 닿았다.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인 것 같다. 먼저 잠든 것도 얄미워 죽겠는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라고 화가 날 줄 알았는데……. 뭐지? 심장이 철컹 내려앉으며 짜릿한 기분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옆으로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잠결에 안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미련이 남아서일까? 완벽하게 정리해서 흔적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곤혹스러운 마음에 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다. 그저 낯선 여행지에서 느끼는 일탈 같은 감정일 거다. 영화 속 주인공같이 멋진 남자가 포근히 안아주는데……. 이 상황에서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게다가 어찌 됐든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는 공식적인 남편이었다. 법적으로 내 남자라고! 그러자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았다. 이어서 손에 힘이 가해지며 그녀의 몸이 그에게 밀착되었다.
“……흡.”
탄성이 터져 나오려 하자, 리아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 때문인지, 은은한 체취 때문인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에라도 팔을 뿌리치고 가장자리로 가면 되겠지만……. 다시 몸을 웅크리기고 잠을 청하기엔 너무나 피곤했다. 어차피 잠들면 모를 텐데, 눈 딱 감고 가만히 있을까? 혼자 골똘히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으로 피곤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거라고, 한숨 푹 자고 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으며 리아는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이윽고 리아가 잠속에 빠져들자, 태호는 조금 더 가깝게 그녀를 자신에게 잡아당겼다. 팔을 뿌리치고 멀리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너무 확대하여 해석하진 않기로 했다. 가장자리에서 자는 게 불편하고, 긴 여행으로 피곤하기도 할 테니까. 태호는 리아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결코 모를 것이다. 전제 리조트 독채 객실 중, 그의 요구로 오직 이곳에만 원형 침대가 놓였다는 사실은……. *** 둘째 날은 아침 식사 후, 요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다. 선장과 선원, 요리사까지 딸린 럭셔리 요트는 갑판 위에 풀장과 야외 스파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처음에 리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따라나섰지만, 곧 연한 에메랄드색과 진한 코발트색이 어우러진 바다에 반해버렸다. 지금까지 휴가도 없이 일에만 매달렸는데, 잠시라도 휴식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 온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한 나 자신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라고 여기자. 그 후부터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태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근사한 곳으로 그녀를 데려왔으니까. 근데 왜 하필 로스카보스일까? 발리도 있고 몰리브도 있을 텐데…….
“왜 여기로 신혼여행 온 거야?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그녀의 물음에 태호는 픽 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내게 그랬었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자고. 기억나?”
“아…….”
한순간 리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기억난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있었다. 그 당시 리아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민 여사는 3선 국회의원 아들과 선 자리를 마련했다. 태호와 사귀면서도, 리아는 민 여사의 손에 끌려 선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리아는 취할 때까지 혼자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한밤중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보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리아를 위해 단번에 달려왔었다.
―태호야, 우리 어디론가 가버릴까?
그의 품에 안겨,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졸랐었다. 그땐 정말 그러고 싶었다. 가족, 미래 모두 버리고 오로지 단둘이만 있고 싶었다. ……그땐 그랬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네가 도망가자며 가리켰던 곳이 바로 여기야.”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태호에게 남미 대륙 어딘가를 가리켰던 것 같긴 하다. 아무 생각 없이 콕 찍었던 건데……. 그게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 최남단에 있는 로스카보스일 줄이야. 그가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래서 이곳을 신혼여행지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더 놀라웠다. 왜? 어째서?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졌다. ……혹시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한 건 아닐까?
“너, 혹시……?”
뭔가에 홀린 것처럼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말이 문장을 갖추기 전,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리아는 경솔한 자신을 꾸짖으며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혹시, 뭐?”
“아냐. 아무것도. 나 수영하고 올게.”
대신할 말을 찾지 못한 리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나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리아는 단번에 원피스를 벗고 풍덩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원피스 안에 비키니를 입고 와서 정말 다행이다.
“하아.”
차가운 물에 뛰어드니 정신이 번쩍 났다. 리아는 힐끗 요트 쪽을 바라보았다. 그도 따라서 들어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태호가 휴대폰을 집는 모습을 보며, 리아는 재빨리 물속으로 잠수했다. 깊게 잠수하면 할수록 가슴은 답답했지만, 반대로 머릿속은 맑아졌다. 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에 큰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이 드문 신혼여행지를 찾다 보니, 우연히 맞아떨어졌겠지. 태양열이 너무 뜨거워서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봐. 리아는 허황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자신을 비웃으며 더욱더 깊숙이 잠수했다. *** 태호는 리아를 바라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급히 아셔야 할 일이 있어서요.]
휴대폰 너머로 남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원식품 자금 조달이 막힌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이사님이 예상한 대로입니다.]
보고를 받은 태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주 이사도 알아?”
[아직은 아닙니다.]
“알았어. 민수에겐 내가 직접 말할 테니까, 남 비서는 계속해서 그쪽 동향을 파악해줘.”
[네, 이사님. 저, 그런데…… 두 분, 잘 지내고 계십니까? 혹시 벌써 싸웠다거나, 그런…….]
진정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에 태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남 비서가 보기에도 아슬아슬 위태로울 것이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이니까.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물론 리아는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 바짝 경계하곤 있지만, 그래도 아직 싸우진 않았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걱정을 덜었는지 남 비서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잠수를 마친 리아가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머리를 흔들며 물기를 털어내는 모습이 물 만난 인어공주처럼 신나 보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태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내 손 잡아.”
한참 수영하고, 보트에 오르려는 리아에게 태호가 손을 내밀었다. 리아는 별생각 없이 그의 손을 잡고 요트에 올라섰다. 그러나 곧, 눈앞의 광경에 급히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흡.”
어느새 그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녀도 비키니 차림이니 솔직히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다. 다만, 몸매 자랑이라도 하려는지 최대한 천을 아껴 만든 수영복 디자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넉넉한 트렁크 수영복도 많을 텐데, 왜 저런 걸 고른 거야!
“나, 좀 씻어야겠어.”
괜히 얼굴이 붉어지려고 하자, 리아는 서둘러 갑판 구석에 놓인 샤워부스로 향했다. 하지만 바닷물을 씻어내는 동안에도 자꾸만 시선이 태호에게 쏠렸다. #초콜릿복근, #짐승남, #눈감아, #어깨깡패 등등, 수많은 해시태그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어느 것도 그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진 못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불이 화르르 타오르게 하는 몸매랄까? 아름다운 조각상에 감동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떼려고 해도 저절로 눈길이 갔다. 그러나 태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리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멀찍이 떨어진 라운지체어로 향했다. 힘 빠지게 수영도 했으니, 이젠 광합성 할 차례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라운지체어에 수건을 깔고 몸을 엎드린 리아는 그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기분 좋게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데, 낯선 손길이 등에 느껴졌다. 옆으로 고개를 틀자, 언제 왔는지 옆으로 다가온 태호가 비키니 끈을 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던 리아는 가슴이 썰렁한 것을 깨닫고 재빨리 엎드렸다. 이미 끈이 반쯤 풀려 아슬아슬 벗겨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태닝 자국 남으니까 벗고 있어.”
“나보고 벗고 있으라고?”
“괜찮아. 갑판 위로는 아무도 안 올라오니까. 네 몸 볼 사람 아무도 없어.”
이게 지금 말이야? 소야? 볼 사람이 없다니. 그럼 지금 앞에 있는 앉아계신 분은 사람이 아닌가요? 호랑이인가요? 리아는 황당하다는 듯 노려봤지만, 태호는 그녀가 노려보든 말든 선크림을 손바닥에 펴 발랐다.
“선크림 발라줄게.”
손이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흠칫 몸이 굳어버렸다.
“됐어, 하지 마.”
당황한 리아는 재빨리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유혹하는 듯 나직한 목소리가 귓속에 흘러들었다.
“이게 뭐 어때서? 부부끼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