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명색이 첫날밤인데2021.03.24.
신혼여행 떠나기 전, 호텔에서 보내는 첫날밤. 쏴아아―.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적막한 스위트룸에 울려 퍼졌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빗던 리아는 빗질을 멈추고 굳게 닫힌 욕실 문을 노려보았다. 조금 있으면 샤워를 마친 태호가 걸어 나올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결혼은 처음이다 보니, 긴장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결혼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태호였다.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그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고 했어.”
하아, 말하고 나니 기가 막힌다. 가슴 설레는 첫날밤을 두고 ‘호랑이 굴’이라니.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거지? 속으로 투덜거리던 리아는 인상을 쓰며 브러시를 움켜쥐었다. 툭―. 그때, 샤워기 잠그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끊겼다. 덩달아 리아의 심장도 쿵 소리를 내며 멈췄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샤워가운을 입은 태호가 걸어 나왔다.
“먼저 잠든 줄 알았는데…….”
머리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던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은 리아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피로연이 끝나자 바로 지인과의 뒤풀이로 이어졌다. 신혼여행은 내일 떠나고 오늘 밤은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자, 모두들 밤늦게까지 놀자고 졸랐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이 호텔에 도착한 것은 자정에 가까워서였다. 결혼식을 위해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인 리아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건 당연했다. 앞서 샤워를 마친 그녀가 당연히 곯아떨어졌을 것으로 여겼다.
“명색이 첫날밤인데, 먼저 잠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태호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보란 듯이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았다. 어차피 남들 다 겪는 첫날밤인걸. 괜히 순진한 척,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호랑이 굴에 끌려온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를 잡으러 당당하게 굴에 들어온 토끼니까. 앞으로 5년 동안, 두 사람은 좋든 싫든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지는데, 시작부터 강하게 나가야 했다. 리아의 도발에 태호는 픽 입매를 비틀며 손으로 물기 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바람에 가운 앞자락이 벌어지고 맨 가슴이 드러났다. 미처 닦지 못한 물방울이 매끈한 근육의 갈라진 틈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난생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리산 별장에선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 밝은 침실 조명 아래 훤히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하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상체는 그리스 조각품을 연상시켰다. 양심상 혼자만 보기 미안할 정도다. 모르는 사람들은 저런 남자를 남편으로 차지하게 되었다고 엄청 부러워하겠지. 사실은 그게 아닌데…….
“먼저 잠드는 건 예의가 아니다……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태호는 무감각한 시선으로 리아의 몸을 훑어 내렸다. 꼭 여민 가운 사이로 리아의 뽀얀 속살이 드러났지만, 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정확히 그게 무슨 의미지?”
“특별한 의미 따윈 없어.”
“그래?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겠군.”
태호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리아에게 허리를 굽혔다.
“앗!”
갑작스러운 행동에 리아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그만 중심을 잃어버려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녀가 침대에 쓰러지자 태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을 뻗어 리아 양어깨 옆을 짚었다. 어쩌다 보니 등으론 포근한 이불이 받치고 앞에선 단단한 몸이 내리누르는 야한 자세가 돼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리아는 평정을 가장하며 태호를 차갑게 노려봤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글쎄?”
태호는 묘한 미소를 띠며 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리아를 향해 신비스럽게 반짝거렸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단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뻐근하고 눈앞이 아찔했다. 별거 아냐. 너무 가까워서 그런 거야. 너무 가까워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겁먹은 건가?”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리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며 태호가 말했다.
“겁먹긴 누가 겁먹었다고 그래!”
리아가 날카롭게 반박하자, 언뜻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달래듯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주리아답지.”
나직한 속삭임은 뜨거운 숨결이 되어 닿을 듯 말 듯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숨 막히는 것처럼 가슴이 조이고,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봐도 지금 그는 그녀를 테스트하는 거니까. 리아는 주먹을 움켜쥐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누가 바들바들 떨면서 움츠릴 줄 알고?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라며……. 어디까지 다가올 거야?”
입술이 닿을까 말까 한 지점에 이르자, 결국 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물론 닿을 때까지.”
“……뭐?”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리아는 움찔 미간을 찌푸렸다. 재빨리 옆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얼굴이 포개진 상태라 쉽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키스하는 건 아니겠지? 그때 ‘촉’ 소리와 함께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닿은 곳은 입술이 아니라 이마였다.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태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잠들지 않고 기다려준 신부에게 굿나잇 키스쯤은 해줘야 예의일 것 같아서.”
방금 그녀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이 그에서 흘러나왔다. 나, 지금 한 방 먹은 거 맞지? 상황을 깨달은 리아는 발끈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뭐라고 쏘아붙이는 대신 재빨리 침대 속으로 들어가 턱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래, 명색이 첫날밤인데 싸울 수야 없지.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리아는 태호에게서 등을 돌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가운을 벗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곧 불이 커지고 침대 반대쪽이 출렁거렸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태호만의 체취가 코끝에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리아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려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굴렸다. 하지만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몸은 엄청 피곤하지만,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쿵쾅거리던 심장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깐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설렜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욘 없었다. 그냥 들떠서 그런 거니까. 아무리 형식적이라도 오늘 식을 올렸는데 조금은 들뜨는 게 당연하다. 리아는 궁색한 자기변명을 늘어놓으며 잠들기 위해 넓은 들판에 뛰노는 양 떼를 상상했다. 빨리 잠드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천 마리쯤 세었나? 날뛰던 심장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더니 이윽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흠, 그런데……? 분명 세는 동물은 복슬복슬한 양이 맞는데……. 왜 하얀 털이 아닌, 노랑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지 모르겠다.
*** 잠들었는지, 불규칙하던 리아의 숨결이 어느새 고르게 변했다. 등을 보이고 누운 그녀의 어깨가 오늘따라 가냘파 보이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 것이다. 말없이 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호는 가만히 어두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침대에 누워 있지만, 아직도 리아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깨어나면 다시 홀로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할 정도였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라며……. 어디까지 다가올 거야?
귓가에 맴도는 리아의 싸늘한 목소리. 이제 시작인데 첫날부터 밀어붙여선 안 되겠지. 결국, 계획한 대로 결혼했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다. 원래 계획보다 반년을 앞지른 까닭에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흐음.”
태호는 그립던 달콤한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
“수진아, 그냥 집에 가도 되겠어? 아빠랑 따로 한잔할래?”
“아냐, 됐어.”
수진은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결혼식이 끝나고 먼저 집에 갔던 한 사장은 뒤풀이가 끝난 수진을 데리러 직접 차를 몰고 나타났다. 먼저 간 아내를 대신해 엄마 노릇까지 해가며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이기에 혹여 잘못이라도 될까 봐 걱정돼서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강태호가 유부남이 된 날이 아니던가.
“우리 수진이, 술 많이 마셨구나.”
수진이 차에 타자마자, 술 냄새가 강하게 진동했다.
“응.”
“그런데 하나도 안 취했네?”
“그러게. 오늘은 술이 좀 받네.”
수진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차를 출발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도 수진만큼이나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엮이게 하려고 일부러 수진을 KJ푸드에 취직시켰건만, 태호는 수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녀석,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리기라도 했나? 우리 수진이가 어디가 어때서! 마음 같아선 태호에게 달려가 따지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 난데없이 왕 회장 생전에 오고 갔던 정혼 이야기가 튀어나오더니, 철천지원수로 여기던 주 회장 딸과 덜컥 결혼해 버렸다. 부녀가 사이좋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돼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밖으로 불만을 드러낼 순 없는 일이다. 항상 그랬듯이 뒤에서 진행해야 한다. 처음에만 어렵지, 그 뒤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수진아, 조금만 참아라. 운전대를 잡은 한 사장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리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 비행기가 착륙했기 때문이다. LA 공항에 내린 두 사람을 태운 비즈니스 제트기는 텍사스 휴스턴 공항이 아닌 멕시코 로스카보스 공항에 두 사람을 내려놓았다. 물론 휴스턴보단 세계적인 고급 휴양지로 알려진 로스카보스가 신혼여행지로 적합하긴 하다. 그러나 일 중독자인 강태호가 이곳을 선택했을 리가 없었다. 결혼식에서부터 신혼집까지 모두 태호에게 맡긴 터라, 솔직히 리아는 정확히 어디로 신혼여행 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LA행 비행기 편인 걸로 보아, KJ푸드 미국 지사와 생산설비를 둘러보러 가는 거라고 짐작했다. 5년 후면 주원식품이 인수할 터이니, 어깨너머로 배울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멕시코라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어이없는 곳에 내리고도 태호는 느긋해 보였다.
“한국에선 아직 로스카보스 직항편이 없어. 불편해도 LA를 경유해야 해.”
착오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면…….
“멕시코에도 KJ푸드 공장이 있어?”
그녀의 질문에 태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모았다.
“신혼여행 와서 공장 이야기가 왜 나와?”
리아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우리 지금 신혼여행 온 거야?”
“그럼 신혼여행이 아니면 이혼 여행 온 거겠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로라하는 재벌 3세들은 업무 일정 때문에 신혼여행도 뒤로 미룬다고 하던데……. 말뿐인 결혼이면서 이리도 야무지게 신혼여행을 챙길 줄이야. 리조트에 도착한 리아는 초호화 비주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르른 바다에 둘러싸인 리조트는 멀찍이 따로따로 독채로 지어진 풀 빌라 형태로 누구도 엿볼 수 없는, 신혼부부가 머무르기에 완벽한 구조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개인 풀장에서 19금 애정행각을 벌인다고 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아니었다. 거실에 들어선 리아는 로맨틱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곳곳에 뿌려진 꽃잎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서 일주일이나 지내라니.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침실로 들어간 리아는 흠칫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건 또 뭐야?”
산 넘어 또 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