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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 아주 잘해. (5/81)

5. 나, 아주 잘해.2021.03.17.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리아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리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16559914648114.jpg“아무래도 직접 와 봐야 할 것 같아서.”

태호는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리아에게 다가왔다.

16559914648122.jpg“저…… 팀장님?”

팀원들은 놀란 표정으로 리아와 태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태호가 리아를 만나러 오다니,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찍는 건 아니겠지? 모두는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원래는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정상인데, 오늘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뭔가 달랐다.

16559914648114.jpg“오늘 모두 시간 어떻습니까? 제가 한턱내고 싶은데.”

태호는 정중하게 팀원들의 의견을 물으며 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16559914648132.jpg“앗!”

전혀 예상하지 못한 친근한 스킨십에 리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팀원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끌어안은 팔을 힘껏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더 가깝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좋은 말로 할 때 안 떨어져? 리아는 불쾌한 눈으로 힐끗 태호를 흘겨보았다. 헐,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 평소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되받아칠 줄 알았는데, 반대로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이 돌아왔다. 순간 리아의 등줄기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연기가 너무 과하잖아! 정말 그 스토리로 갈 셈인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

16559914648122.jpg“……저, 그런데……. 질문 있습니다.”

차마 무슨 일이냐고 묻진 못하고 눈치만 보는 팀원들 사이에서 채영이 용기 있게 나섰다.

16559914648122.jpg“왜 이사님이 우리에게 한턱을 내시는 거죠?”

16559914648114.jpg“결혼 전에 하는 인사라고 해두죠.”

당돌한 질문이었지만, 태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팀원들 사이에서 “결혼? 무슨 결혼?”, “누가 결혼하는데?” 하는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어수선한 반응에 태호는 리아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16559914648114.jpg“이런, ……아직 말을 안 했나 보군요.”

순간 리아의 머릿속에서 위험 감지기가 ‘삑!’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16559914648114.jpg“주리아 팀장과 저는…….”

안 돼, 하지 마! 결혼 발표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여야 한다. 그래야만 조금이나마 팀원들이 배신감을 덜 느낄 것이다.

16559914648132.jpg“여러분!”

리아는 다급히 태호의 말을 끊으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16559914648132.jpg“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한데, 강 이사와, 저…….”

난처한 얼굴로 팀원을 둘러보던 리아는 긴 숨을 들이쉰 후, 이내 말을 이었다.

16559914648132.jpg“우리 결혼해요.”

  *** 회식은 졸지에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16559914648122.jpg“팀장님, 제 잔 받으세요.”

채영이 환하게 웃으며 리아의 잔에 술을 따랐다.

16559914648122.jpg“그동안 힘겨운 사랑 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젠 꽃길만 걸으셔야 해요.”

16559914648132.jpg“고마워, 채영 씨.”

꽃길보단 가시밭길에 가까웠지만, 리아는 잠자코 잔을 비웠다.

16559914648122.jpg“제 잔도 받으세요, 팀장님.”

16559914648132.jpg“네, 박 주임님.”

리아는 연달아 팀원들이 따라주는 잔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마셨다. 말할 새도 없이 기사가 터져버려 속상하기도 하고, 회식에 참가하지 않고 먼저 가버린 민훈에게 미안해서 술이라도 마셔야지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민훈에게는 이미 결혼에 관해 말해 두었다는 것이다. 태호와 결혼하기로 한 날, 바로 그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16559914678353.jpg―강 이사와 결혼해야 한다고?

그날 민훈은 충격 받은 얼굴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웃어 보였다. 상처받은 본인보다 그녀 앞날이 더 걱정되는지, 민훈은 리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16559914678353.jpg―리아야. 너, 괜찮겠어?

민훈의 한결 같은 마음에 리아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이별을 말하는 쪽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16559914678353.jpg―그럼, 괜찮지 않고. 내 걱정은 하지 마.

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서둘러 민훈에게서 등을 돌려야만 했다. ……미안해, 선배. 리아가 민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주 최악은 아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어쩌면 민훈에게는 잘된 일일 수도 있으니까. 오래된 선후배 호감으로 데이트를 시작했지만, 민훈과 함께 있으면 편하기만 할 뿐 그 이상으론 감정이 발전하지 않았다. 그래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불꽃이 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리산에서 태호와 밤을 보내며 그건 노력으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끝내지 않아도 결국, 그녀는 민훈와 이별의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래서 더 착잡하다. 그걸 깨우치게 해준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니. 너무 위험했다. 그보다는 그녀 자신을 믿을 수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

16559914648132.jpg“후우.”

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빈 잔 가득 술을 따랐다. 취하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술이 들어갈수록 몸도 마음도 물먹은 솜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리아와는 반대로 태호는 적진 한가운데에서도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태호가 직속 상사이고 그녀는 경쟁사 사람인 줄 알겠다. 하여간 뻔뻔하기도 하지. 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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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9914648132.jpg“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회식이 끝나자, 팀원들은 빠르게 뿔뿔이 흩어졌다.

16559914648122.jpg“티장……니임.”

술에 취한 채영 만이 리아 옆에 남겨졌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탓에 가족이 데리러 올 때까지 상사인 리아가 책임지기로 해서다.

16559914648122.jpg“그런데 두 분…… 끄윽.”

비틀거리는 몸을 리아에게 기대며 채영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9914648122.jpg“……만리장성은 쌓으셨어요?”

16559914648132.jpg“큭.”

순간 리아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신세대라서 그런지, 술에 취해서 그런지, 채영은 폭탄 질문을 던지고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16559914648122.jpg“헤헤, 당연한 걸 물었다. 그죠?”

16559914648132.jpg“……채영 씨.”

16559914648122.jpg“앗! 오빠다. 팀장니임, 저거 우리 오빠 차예요.”

채영은 앞으로 다가온 차에 냉큼 올라타더니 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16559914648122.jpg“팀장니임, 월요일에 뵈어여.”

16559914648132.jpg“그래. 채영 씨, 조심해서 가.”

리아는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리 기사를 부르려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선뜻 번호를 누를 수 없었다. 채영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을 쌓지 않았다고 대답했다면 채영은 과연 믿어줬을까? 대학교 2학년부터 사귀다 졸업 후에 헤어졌으니, 연인이었던 기간이 결코 짧은 건 아니었다. 몰래 사귀느라 애로사항은 많았지만, 그래도 연인이 하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해봤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연인끼리 손만 잡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끝까지 가진 못했다. 물론 만리장성을 쌓을 기회는 꽤 있었다. 꼭 밤에만 별을 따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어째서인지 두 사람 모두 마지막 선을 넘을 수 없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앞에 놓인 집안 문제가 무의식중에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도 이별을 염두에 두고 만났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의 결혼이 이혼을 정해두고 행해지듯이 말이다. 리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어두운 밤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끝을 계획하고 시작하는 인연이 쉬울 리 없겠지. 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오늘 그녀는 평소 주량을 훌쩍 넘기게 마셨다. 그래도 팀원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어 최대한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는데……. 채영을 보내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취기가 몰려왔다. 그때 뒤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온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59914648114.jpg“바래다줄게. 대리 기사 부르지 마.”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밤 그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리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어지럽지만, 그래도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16559914648132.jpg“……그보단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갔으면 해. 할 말 있어.”

16559914648114.jpg“할 말?”

16559914648132.jpg“응. 오늘 터진 기사도 그렇고, 결혼식 올리기 전에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오늘 해야 할 말을 내일로 미루고 싶진 않았다. 주차장까지 걷다 보면 어느 정도 술도 깰 것이다.

16559914648114.jpg“그렇다면 앞으로 지낼 곳도 볼 겸, 한남동으로 가지.”

한남동은 두 사람의 신혼집을 가리킨다.

16559914648132.jpg“그래, 좋아.”

강 회장 본가와 가까운 곳에 신혼의 보금자리가 마련되었지만, 리아는 태호에게 모든 걸 맡기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5년 동안만 살게 될 집인데, 굳이 관심 가질 필요가 없어서였다. 차에 타고 시동을 걸자, 히터에서 더운 바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추운 몸에 더운 바람을 쐬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오르며 눈앞이 핑 돌았다. 아깐 그래도 알딸딸하다 뿐이지,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16559914648132.jpg“……으.”

그녀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16559914648114.jpg“왜 그래?”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태호는 급히 갓길에 차를 세우고 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아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16559914648132.jpg“……그게.”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힘겹게 입술을 달싹거리던 리아는 그대로 안기듯 태호의 품에 쓰러졌다.

16559914648114.jpg“리아야?”

눈앞이 캄캄해지며 자신을 부리는 목소리가 먹먹하게 흐려졌다. 여기서 필름이 끊기면 안 되는데…….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현실은 까마득하게 멀어져갔다.

16559914648114.jpg“……리아야.”

태호는 한동안 리아를 껴안은 채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미 지리산 별장에서 그녀를 끌어안았지만, 그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때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지금은 그녀 스스로 안긴 거니까. 술에 취해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그게 뭐 중요하랴. 리아가 먼저 안겨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단단한 가시로 무장한 주제에 그녀는 가끔 이렇게 무너지며 그의 심장을 푹 찌르곤 한다. 자신이 어떤 아픔을 주는지도 모르는 채 리아는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숨을 쉬었다. 태호는 손을 들어 흘러내린 리아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16559914648114.jpg“후우, 그래. 내가 다 아플 테니까. 넌 아프지 마라.”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입에서 낮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5년 전,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 헤어졌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아프지만 않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16559914648114.jpg“……리아야,”

너에게 할 말이 정말 많은데……. 해주고 싶은 말도 정말 많은데…….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듯 나직하게 부르는 것뿐이었다.

16559914648114.jpg“……리아야,”

나의 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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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9914648132.jpg“……으음.”

아침 햇살이 번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리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차 안이었는데 지금 그녀는 낯선 침대에 누워 있었다.

16559914648132.jpg“아…….”

몸을 일으키던 리아는 지독한 숙취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 많이 마시긴 정말 많이 마셨나 보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리고. 리아는 주위를 살피며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눈앞에 긴 복도가 있는 걸 보니 호텔은 아닌 것 같고. 여기는 그럼 신혼집인가? 복도에 발을 내딛자,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달그락 소리를 따라 가보니 아침을 차리는 태호의 모습이 보였다.

16559914648114.jpg“일어났어?”

16559914648132.jpg“……어제, 어떻게 된 거야?”

16559914648114.jpg“어떻게 되긴. 할 말 있다더니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잖아.”

식탁에서 의자를 빼며 그가 말을 이었다.

16559914648114.jpg“앉아. 해장국 끓였으니까.”

16559914648132.jpg“……괜찮아. 생각 없어.”

16559914648114.jpg“속 쓰리지 않아? 뜨거운 국물이 간절할 텐데.”

그건 그렇다. 뜨거운 국물이 간절하다 못해 절실했다. 고소한 냄새까지 맡으니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리아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니까. 앞에 놓인 해장국은 건더기가 수북하니 제법 훌륭한 비주얼이었다. 보나 마나 KJ푸드 즉석요리 중 하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국물을 떠먹었는데…….

16559914648132.jpg“하아.”

속이 뻥 뚫리는 느낌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16559914648132.jpg“이거 즉석요리야? 아니면 네가 끓인 거야?”

16559914648114.jpg“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거 보니까, 입맛에 맞나 보군.”

16559914648132.jpg“……뭐, 나쁘진 않네.”

경쟁사 제품을 맛있게 먹어주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숟가락질을 멈출 순 없었다.

16559914648114.jpg“……너도 그 부분에선 만족할 거야.”

너무 열심히 먹는 탓에 그만 앞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뭘 만족한다고? 리아는 입안 가득 국물을 머금은 채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16559914648114.jpg“결혼 생활에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결혼 생활에 중요한 걸 만족시켜 준다는 거야? 결혼 생활에 중요한 거라면…….

16559914648122.jpg―벌써 만리장성 쌓으셨겠네요?

왜 갑자기 어젯밤 채영이 한 말이 떠오르는 거지? 혹시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주로 밤과 새벽 사이에 행해지는? ……설마. 혼란스럽게 표정이 변해가는 리아를 바라보며 태호가 말을 이었다.

16559914648114.jpg“나, 아주 잘해.”

악, 맞나 보다! 19금,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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