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결혼식은 빠를수록 좋겠어.2021.03.14.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란 말에 태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조건이란 단어가 듣기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말을 꺼내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러니까 듣기 싫어도 들어! 리아는 태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고작 자금 지원 하나 받으면서 결혼까지 하다니. 내가 너무 밑지는 거래야.”
“……밑지는 거래라.”
태호는 재미있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며칠 전만 해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그녀다. 그런데 오늘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 당당하게 나오자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좋아. 원하는 걸 말해 봐.”
“네가 그룹 경영권을 차지하게 되면, 그때 바로 이혼해 줘.”
괜한 호기심이었나? 태호는 결혼도 전에 이혼부터 꺼내는 리아가 못마땅했다. 과거에도 먼저 헤어지자고 하더니, 이번엔 시작도 전에 이별부터 꺼낸다.
“하.”
태호는 낮게 실소를 터뜨리며 다시금 표정을 굳혔다. 예상보다 싸늘하게 반응에 리아는 잠시 곤혹스러웠다. 왜 저러지? 내 말이 거슬렸나?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이혼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뭐 어떻다고. 어차피 끝을 알고 시작하는 결혼이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될 건지,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하는 게 나을 거라고 리아는 믿었다.
“처음부터 깔끔하게 정리하고 시작하는 게 모두에게 좋아.”
한 치의 틈도 주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에 태호의 입매가 저절로 비틀어졌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은 할 수 없다. 그저 따를 수밖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가 차갑게 물었다.
“위자료로 얼마를 원해?”
이번엔 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뭔가 오해를 했나 본데…….”
그녀가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줄 아나 보다. 자신을 꽃뱀 취급하는 그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경영권을 위해 그녀와 결혼할 정도이니, 얼마나 모든 것에 계산적일까.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아 한편으론 씁쓸했다.
“위자료는 필요 없어. 대신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원식품을 크게 키워 놓을 테니까, 5년 후 KJ그룹은 식품 사업 접고 우리 주원에게 KJ푸드를 넘겨.”
그녀의 설명에 굳었던 태호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그룹 수익 면에서 식품 분야가 차지하는 부분 미비하잖아. 오히려 대기업으로 성장한 KJ그룹이 아직도 골목 싸움에 뛰어든다며, 좋지 않은 여론만 있지. 결국엔 그룹 차원에서도 정리해야 할걸.”
정곡을 찌른 탓일까? 태호는 아무 말 없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리아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한동안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좋아.”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 받아들이지. 대신 구두 계약으로 끝내.”
“어째서?”
“계약서 써봤자, 어차피 그걸 재판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 계약을 모두에게 알릴 작정이야?”
그의 말이 맞긴 하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계약서였다. 그게 변호사라고 할지라도. 그녀가 아는 강태호는 무서울 정도로 냉혹한 사업가였지만,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좋아.”
계약 성립의 의미로 리아는 태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결혼식은 빠를수록 좋겠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태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입으론 결혼을 말하면서 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겉은 냉담해 보일지라도,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드디어. 그동안 준비했던 계획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니까. 리아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시작도 전에 끝을 말하고 있지만, 그는 아니었다. 다시는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이 결혼은 아주 교묘하게 설계된 미로다. 한번 들어오면 절대로 나갈 수 없는……. 리아를 바라보는 눈에 작은 불꽃이 일렁이다 곧 사라졌다. ***
“리아야, 바쁘지 않으면 이거 한번 봐줘.”
퇴근을 30분 앞두고 신제품 견본을 양손에 든 민수가 리아를 찾아왔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한시라도 리아와 떨어지게 되면 참을 수가 없나 보다. 집에서 실컷 얼굴을 보면서도 민수는 회사에서도 틈만 나면 리아의 사무실에 들렀다.
“민수야, 넌 퇴근 준비 안 해?”
“……응. 이제 슬슬 해야지.”
민수는 지나가는 투로 대답하며 벽에 걸린 캘린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으로 리아를 돌아보았다.
“벌써 다다음 주네?”
“뭐가?”
“뭐긴 뭐야. 네 결혼식이지. 진짜 빠르다.”
“……아.”
그 한마디에 리아의 얼굴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흐려졌다. 그렇지. 빠르긴 진짜 빠르지. 결혼식 준비 기간 달랑 3주. 이건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수준이 아니고, 통돼지를 구워 먹는 수준이었다. 웨딩드레스 제작에 5일, 수선에 고작 2일이 소요됐다. 5명의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와 장인들이 밤샘 작업을 하며 달려든 결과였다.
“하아. 내가 강태호와 결혼을 하게 되다니?”
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한때 그와의 결혼이 그녀가 원하는 전부였던 적이 있다. 그와 함께라면 세상 끝 어디에라도 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할 땐 이루어지지 않더니, 앙숙이 된 지금에 억지로 결혼하게 된다니…….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는 리아에게 민수가 다가와 어깨동무하듯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민수는 비밀 연애를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민수로 인해 사귀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사람 인연에 아주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민수는 두 사람의 이번 결혼에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가족과 친한 친구 이외엔 아직 아무에게도 결혼 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마케팅 팀원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다. 리아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에서 깨어나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
“흐음.”
기사를 훑어보는 태호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떠올랐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피어난 ‘로미오와 줄리엣’ 세기의 사랑> ‘오늘의 검색란’에 올라간 기사는 이제 곧 무서운 속도로 퍼질 것이다. 리아의 반응이 어떨지 직접 확인하려 태호는 퇴근을 서둘렀다.
“오빠!”
막 사무실을 나서는데 갑자기 나타난 태희가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태호는 귀찮은 기색을 감출 생각이 없는 듯, 10살 어린 막냇동생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웬일은? 오빠 보려고 왔찌!”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희는 애교를 떨며 태호의 팔에 매달렸다.
“나, 배고빠아. 저녁 짜주세요, 오라버닝.”
“향수 냄새 밴다. 저리 떨어져라.”
“아이, 오빠아앙.”
떨어지기는커녕 태희가 더욱더 달라붙자, 태호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자꾸 혀 짧은 소리 내면 진짜로 혀가 짧아지는 수가 있어.”
“흡.”
무지막지한 협박에 태희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강태호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이름에 호랑이 ‘호’ 자가 들었다고 자기가 진짜 호랑이라도 된 줄 아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를 호랑이가 제 새끼 절벽에서 굴리듯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다. 오죽하면 별명이 꼬리 아홉 달린 호랑이, 구미호(九尾虎)일까! 누가 지어준 별명인 줄은 모르겠지만, 완전 찰떡 같은 표현이다.
“형한테나 가 봐. 난 선약 있어.”
“선약? 누구랑? 언제? 지금? 왜 만나는데?”
꼬치꼬치 캐묻는 태희가 귀찮다는 듯 태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었는지 태희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비밀.”
순간 태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간다. 이따 집에서 보자.”
태호는 한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말도 안 돼! 태희는 넋 나간 표정으로 멀어지는 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활짝 웃다니! 비웃느라 입매를 비트는 게 아니라, 눈가에 주름까지 만들어가며. 게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저 소리는…… 콧노래? 아니! 작은오빠, 왜 저래? 태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게 분명하다! ***
“어?”
아무 생각 없이 온라인 뉴스를 클릭했던 리아는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피어난 ‘로미오와 줄리엣’ 세기의 사랑> 무슨 제목이 이리도 유치찬란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경쟁사에 몸담은 두 사람은 주위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잠깐,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인데……?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 내려간 리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이달 말 J식품 J 팀장과 K푸드 K 이사는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J식품 J 팀장? K푸드 K 이사라고? 이거 우리 이야기잖아! 조만간 결혼 소식을 언론사에 배포할 예정이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리아는 재빨리 비슷한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몇몇 문장만 다를 뿐, 이미 온라인 전체에 같은 기사가 쫙 퍼져 있었다. 아무리 이니셜을 사용했다곤 하지만, 다음 주 결혼 소식이 보도되면 유치원생도 J 팀장과 K 이사가 두 사람이라는 걸을 눈치챌 것이다.
“왜 그래?”
리아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자, 민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가 읽던 온라인 뉴스로 눈길을 돌렸다. 곧 그의 얼굴도 리아를 따라서 창백해졌다.
“도대체 이거 누가 흘린 거야!”
리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민수의 등을 밀었다.
“넌 좀 가. 난 팀원들이랑 회의 좀 해야겠어.”
경쟁사 동향을 살피려 항상 온라인 뉴스를 주시하는 채영이 발견하기 전에 긴급회의라도 해야겠다.
“팀장님, 기사 보셨어요?”
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민수를 내보내는 동시에 채영이 태블릿을 들고 헐레벌떡 리아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이 기사 진짜예요? 아니죠? 팀장님!”
채영은 태블릿을 들이대며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긴급회의 응급처치는 전혀 먹히지 않겠네.
“……그게 말이지.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리아는 차분하게 목소리를 다듬으며 신속하게 할 말을 찾았다. 어떻게 하면 팀원들에게 경쟁사 강태호 이사와 결혼한다는 걸 충격적이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회사가 부도나게 돼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됐다곤 말할 순 없지 않은가. 팔려 간 신부도 아니고.
“오늘 회식할까 하는데, 모두 시간 되겠지? 채영 씨,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봐 줄래?”
그래, 이런 이야기를 맨정신에 할 순 없다. 술이나 한잔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다 보면……. 아, 아니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속내 따위가 뭐가 있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으르렁대던 앙숙이고 오늘도 그리 다르진 않은데. 두 집안 역시 아직도 원수처럼 이를 가는데, 조부 때 언약한 정혼 운운하는 것도 좀 그렇다. 기사 내용대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이라고 말해 버릴까? 아니, 그전에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따져봐야겠다. 채영이 방을 나가자, 리아는 급히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뭐가?]
“기사 말이야. 네가 모르는 기사가 나갔을 리가 없잖아.”
[아, 그거…….]
태호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높낮이 없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홍보실에서 정리한 내용을 언론사에 보냈을 거야.]
그러면 그렇지. 천하의 강태호 모르게 이런 일이 진행되었을 리 없었다.
“그럼 기사에 나간 내용, 홍보실 작품이라는 거야?”
[응. 갑자기 우리가 결혼한다고 하면 모두 어리둥절할 거야. 원수 집안끼리 정혼이라는 것도 우습고. 좀 더 관심을 끌 만한 스토리가 필요했어.]
그래서 ‘집안의 반대를 초월한 사랑, 드디어 결혼으로 결실을 맺는다!’라는 내용을 언론사에 뿌렸다고? 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새빨간 거짓말을 잘도 내뱉는구나! 피노키오처럼 코나 주욱 늘어나라!
“강태호, 몰랐는데 너 거짓말 참 잘하네.”
[거짓말은 아니지. 우리가 예전에 헤어졌다는 사실만 뺀 거야. 시시콜콜 모든 걸 다 밝힐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따박따박 팩트를 던져버리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두 사람이 아주 오래전 부모의 눈을 속여가며 몰래 사귄 건 사실이니까.
“좋아.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해? 언론사에 넘기기 전에 적어도 나에겐 말해줬어야지.”
[지금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착오가 있었어. 내일 언론사에 넘기라고 했는데 부지런한 직원이 오늘 넘겼더군.]
“착오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때 사무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어머!”라는 비명도 아닌 감탄사도 아닌 정체불명의 소리도 들렸다. 팀원들이 벌써 온라인 기사를 봤나? 리아는 휴대폰을 든 채로 급히 밖으로 나가보았다.
“……!”
정체불명 소리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 서 있는 남자. 강태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