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결혼할게. 대신 조건이 있어!2021.03.10.
“비슷해.”
“뭐? 비슷해?”
기가 막힌 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와,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날강도네! 돈 몇 푼 쥐여주고 경영권을 가져가겠다고? 아무리 싸움에서 상대의 약점을 공략해야 한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다.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
“이제 그만 할아버지의 뜻을 따를까 해서.”
리아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태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생전에 집안끼리 정혼 맺은 거 기억나?”
어? 왜 대화가 다른 방향으로 튀지? 갑작스럽게 바뀐 내용이 언뜻 이해되진 않았지만, 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나.”
두 집안이 가족처럼 가까이 지낼 때, 양가 조부는 손주끼리 맺어주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조부 모두 세상을 뜨고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회사가 둘로 쪼개졌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정혼 언약도 잊혔다.
“원래 네 정혼 상대는 우리 형이었어. 하지만 형은 이미 결혼했으니까, 상대는 이제 내가 되겠지.”
“응?”
말뜻이 이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해 가지 않는다. 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태호가 하는 말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버지 예전 같지 않으셔. 나이가 드셨는지 마음이 꽤 약해지셨어. 할아버지 회사를 둘로 쪼갰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 힘든 날을 보내고 계시지.”
“……그런데?”
“할아버지 뜻대로 내가 너와 결혼하면 아버지의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해.”
“하!”
그제야 정확하게 말뜻을 이해한 리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5년 동안, 끊임없이 부딪치다 보니, 어느새 부모 세대만큼 이를 가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이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지나가던 댕댕이가 ‘야옹’ 하고 비웃을 거다.
“지금 효자 코스프레라도 하겠다는 거야?”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태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번 그래 보려고.”
며칠 안 본 사이, 사고라도 당했나? 뇌를 다친 거 아냐? 언제나 냉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의 입에서 결혼하잔 말이 나오다니!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 그녀에게 감정이 남아서는 절대 아닐 것이다. 지리산 별장에서 보낸 밤 때문에 다시 옛 감정에 빠진 것도 아니라는데 5만 원 건다. 생생한 정보통 덕분에, 리아는 얼마나 많은 여자가 태호 곁을 스쳤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그는 한류 스타 강수미와 스캔들을 일으키며 온라인 뉴스를 도배했었다. 그런 남자 입에서 나온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태호는 흔쾌히 인정했다.
“5년 후, 아버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실 거야. 차기 회장은 주주총회에서 결정할 거고. 형과 내가 그 자리를 다투게 되겠지.”
태호보다 3살 연상인 강태문은 지금 KJ그룹에서 전무직을 맡고 있다. 아무리 차남인 태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장남인 태문에게 회장직을 맡겨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주주들은 대부분 ‘정직’ 때부터 함께한 분들이야. 아직도 그때의 향수에 젖어 있지. 만약 내가 ‘정직’의 반쪽인 주원식품 후계자와 결혼한다면 차기 회장으로서의 명분이 서게 돼.”
주 회장이 은퇴하면 리아가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경영권을 원한다고 표현한 걸까?
“또 하나, 스캔들로 얼룩진 사생활을 깔끔하게 덮을 기회이기도 해. 어차피 결혼해야 한다면 모르는 사람과 위험 부담을 안고 하느니, 적이라도 아는 사람과 하는 게 안전하겠지.”
아는 사람이라고? 리아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는 헤어진 연인을 그렇게 표현하는구나. ……아는 사람. 이젠 옛 연인이 아니라 최대 앙숙이니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쓴물이 올라온 것처럼 입안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건 아니지만, 흔적은 희미하게 남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그에겐 조그만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 같다.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저리 쉽게 그녀와의 결혼을 도구로 삼아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녀는 그에게 흔적을 남길 만한 존재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선 그녀를 사업적으로 이용할 순 없을 것이다. 오래전에 헤어졌고, 지금은 서로 얼굴을 붉히는 앙숙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그에게 화나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단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상대가 저리 뻔뻔스럽게 나오는데 과거에 연연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 흔들리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리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감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지? 남자라도 있나?”
순간 민훈이 떠올랐다. 아, 선배와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자, 태호가 차갑게 말했다.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정리해.”
“내 사생활이야.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마.”
“제안을 거절하는 거라면 좋아. 네 뜻 존중하지.”
“거절이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태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그녀가 낮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녀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지금 주원식품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는 KJ그룹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이제껏 결혼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더더욱 정략결혼은 그녀에겐 딴 세상 이야기였다. 게다가 결혼할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태호라는 점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을 거야. 시간이 촉박한 건 우리가 아니니까.”
“알아.”
짧게 대답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리아가 떠나고 잠시 후. 비서실과 연결된 다른 쪽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방문객끼리 부딪쳐서 곤란할 경우, 다른 한쪽이 따로 대기할 수 있는 방과 연결된 문이었다.
“이제 들어가 보시면 됩니다.”
남 비서는 방문객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는 남 비서에게 옆자리 박 비서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신입 사원인 그녀는 종종 질문을 던지곤 했다.
“과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 들어간 손님. 방금 나간 분과 똑같이 생긴 거 맞죠?”
다른 게 있다면 지금 들어간 방문객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거.
“쉬이.”
남 비서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앗, 죄송합니다.”
웬만해선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남 비서가 날카롭게 노려보자, 박 비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신속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누구지? 박 비서는 굳게 닫힌 이사실 문을 쳐다보며 들썩이는 호기심을 꾹꾹 내리눌렀다. ***
“후유, 부딪치는 줄 알았네.”
이사실에 들어선 민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리아, 쟤는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거야?”
민수의 질문에 태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으로 민수가 앉을 소파를 가리켰다. 주리아와 주민수. 두 사람은 이란성 쌍둥이지만, 일란성 쌍둥이처럼 꼭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튼튼하게 태어난 리아와 달리 민수는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났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선이 가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민수는 남자치곤 작은 편인 173cm였고, 리아는 여자치곤 큰 편인 172cm이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체격까지 비슷해 만약 민수가 머리카락을 기른다면 자칫 리아와 헷갈릴 정도였다. 나이는 민수가 한 살 더 많았다. 각각 12월 31일 밤 11시 28분과 1월 1일 새벽 12시 15분에 태어난 탓이다.
“리아가 뭐래? 결혼하자니까 많이 놀라?”
태호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설치한 바로 걸어갔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뜨거운 술이라도 흘려보내야 조금이라도 속이 뚫릴 것 같았다. 항상 그렇다. 리아를 만난 후에는 언제나 같은 후유증이 그를 힘겹게 했다. 깊은 상처가 벌어지며 아직도 뜨거운 피가 흘러나오니까. 심장이 얼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을 듣는 그가 이러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 자신도 사랑 자체를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안 되는 줄 알면서 리아와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려 했다. 리아가 가족을 선택하며 그를 버리지 않았다면, 현재 그의 위치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별을 말하던 리아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선 감정을 내리눌러야 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얼마 전, 지리산에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기 전까진……. 그날 이후로 그는 다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 거다. 그저 그녀를 품에 안은 것만으로도 단단하던 중심이 흔들리다니…….
“너도 한잔할래?”
“아니, 난 이거 마시면 돼.”
민수는 고개를 저으며 리아가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몇 번 태호의 사무실에 들렀지만, 리아는 한 번도 잔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옆에 놓인 물컵조차 건들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착한 남 비서는 꼬박꼬박 마실 것을 내왔다. 어느 날, 그가 불현듯 물었었다.
―왜 안 마셔? 독이라고 탔을까 봐?
리아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 물건에 내 립스틱 자국 남기기 싫어.
리아는 잔인할 정도로 끊음이 확실했고, 그럴 때마다 아물지 못한 그의 상처는 저릿하게 욱신거렸다.
“리아가 제안 받아들일 것 같아?”
민수의 질문에 태호는 얼음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주리아라면…….”
오늘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눈빛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가족 때문에 그를 버렸으니, 이번엔 가족 때문에 그를 선택할 것이다. 태호는 서서히 얼음과 섞이는 호박색 액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한 사장 측 동향은 어때?”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는 태호에게 민수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예상했던 대로야.”
“그래? 그러면 조만간 칼을 뽑겠네?”
“응. 드디어 꼬리를 잡았으니까.”
자그마치 5년이었다. 길었다면 길었다고 할 수 있고, 짧았다고 하면 짧았다고 할 수 있는. 앞에 놓인 장애물을 하나씩 제어해가며, 차근차근 준비하고 기다린 시간. 그리고 이제 기회가 왔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며, 차갑게 식은 눈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준비는 이쯤 했으면 됐어.”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직 반년이 더 남아 있었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막을 올려야지.”
단번에 위스키 잔을 비우고 태호는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
“리아야.”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민훈의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던데, 혹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아냐, 걱정은 무슨. ……그냥 좀 피곤해서.”
리아는 힘없이 웃으며 슬그머니 민훈의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하긴 싫었지만, 지금 그녀가 가진 걱정거리를 그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게다가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데이트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무거운 주제로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된다. 하지만 의지와는 달리, 뮤지컬 관람이 끝나자 리아는 그대로 민훈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민훈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해 어쩔 수가 없었다. 주말이 끝나고 회사에 출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그녀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리아는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미안. 뭐라고 그랬죠? 잠시 딴생각 하느라…….”
“이번 달 말에 수아 돌잔치 합니다. 시간 되시면 꼭 와주세요, 팀장님.”
돌잔치 초대장을 내밀며 박 주임이 겸연쩍게 웃었다. 딸아이의 애교가 부쩍 늘었는지 요새 박 주임 얼굴에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시간 안 되도 가야죠. 수아 돌잔치인데…….”
“감사합니다, 팀장님.”
리아의 확실한 확답에 박 주임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박 주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렵다. 어려워. 만약 부도가 난다면 그녀 가족만이 아니라, 주원식품 전 사원에게도 불행이 미칠 것이다. 박 주임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지겠지? 만에 하나, 채권단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 구조조정에 들어갈 테고, 많은 이가 감봉 처분을 받거나 심한 경우 직장을 잃을 수도 있었다. 대신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대기업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옛 연인에게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껄끄럽고, 경쟁 상대와 결혼한다는 사실도 불편하다. 게다가 아무리 조부의 뜻에 따른 정혼이라도 아직 두 집안은 원수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 격인데……. 그렇다고 호랑이가 무서운 건 아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며칠을 고민해도 정해진 답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긴 싫었다.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고, 최악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바꿔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리아는 이번에도 약속 없이 불쑥 태호를 찾아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땐 그는 막 중역 회의를 마치고 이사실로 돌아온 직후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로 의자에 기댄 태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회의에 지친 듯 그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대답을 가지고 온 게 아니라면, 다음에 이야기하지.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해서…….”
“대답 가지고 왔어.”
그가 앉은 책상으로 다가가며 리아가 빠르게 말했다.
“결혼할게.”
순간 태호의 눈가가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너무 찰나라 확실하진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태호를 빤히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