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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원하는 건……. (2/81)

2. 내가 원하는 건…….2021.03.07.

16559913916236.jpg“딴짓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물론이다. 리아가 아는 강태호란 남자는 절대로 딴짓을 할 리 없었다. 그저 체온을 나누기 위해 그녀를 안고 있을 뿐. 온몸에 퍼지는 온기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버틴 게 억울할 정도로 그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그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잠시만 화해 모드로 가자. 이게 바로 ‘적과의 동침’이라는 건가? 리아는 두 눈을 감으며 아늑함에 몸을 맡겼다.

16559913916236.jpg“잠시라도 눈 좀 붙여.”

하지만 그도 그녀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어둠에 흩어지는 서로의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잠들지 못할 때의 숨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규칙하니까. 후, 이런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다니……. 이럴 땐 뛰어난 기억력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16559913916236.jpg“……후회한 적 없어?”

태호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에 리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뭘 후회하느냐고 묻는지는 안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녀가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니까. 대답은 언제나 같다.

16559913916251.jpg“없어. 한 번도.”

16559913916236.jpg“……그래? 다행이군.”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부모의 눈을 피해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 하지만 주원식품이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둘에게 시련이 닥쳤다. 주위에선 부도의 원인으로 경쟁사 KJ푸드를 지목했다. 그렇다고 리아는 태호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 민 여사가 충격으로 쓰러지게 되자, 결국 리아는 뼈아픈 현실을 깨달았다.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는데 그녀 혼자 한가히 사랑놀이를 벌일 순 없다는 것을……. 줄리엣은 가문을 버리고 로미오와 사랑의 도피를 계획했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태호를 사랑하는 만큼 가족도 소중했다. 5년 전 이맘때쯤, 리아는 태호에게 이별을 고했다. 지금 두 사람이 밤을 보내고 있는 별장, 바로 이곳에서. 이별은 쉽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별 직후 태호는 바로 해외 지사로 떠났고, 몇 년이 지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파티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 옆에는 화려한 여인들이 서 있었고, 그는 타인 대하듯 감정 없는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두 사람은 완전한 남남이며 오로지 적이라는 확실한 표현일 테니까. 자칫 감정이 남았더라도 활활 타버려 재가 될 만큼, 두 사람은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헤어진 연인이기보다는 앙숙 중에서도 앙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감정이 사라졌다고 몸의 반응까지 없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 은은하게 흘러드는 묵직하고 달콤한 체취에 마음이 설레고, 더불어 잊고 있었던 몸의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허리를 끌어당기던 커다란 손, 입술에 내려앉던 부드러운 숨결. 거칠게 안으로 밀려들어오던 뜨거운 열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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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몸은 하나도 잊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자, 리아는 반대쪽으로 등을 돌렸다. 정신 차려, 주리아!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 지나간 추억에 흔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다고. 리아는 밀려드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래도 한번 되살아난 기억은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얼마나 인내의 시간을 보냈을까? 새벽녘이 돼서야 겨우 잠이 든 것 같다.

16559913916251.jpg“……으음.”

눈꺼풀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느끼며 리아는 감은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썰렁하게 빈 옆자리였다. 손을 뻗자,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는 오래전에 일어나 자리를 뜬 것 같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비는 어느새 그치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5년 전, 헤어진 날에도 이랬다. 눈을 떴을 땐, 텅 빈 옆자리만이 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이별을 말했지만, 먼저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그였다. 멍하니 옆자리를 바라보던 리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공허감에 한동안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상처는 오래전에 아물었다. 하지만 그 흔적은 없어지지 않고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나 보다. ***

16559913916274.jpg“주 팀장, 잠깐만!”

회의실로 향하는 리아를 뒤따라온 정민훈 대리가 붙잡았다. 대학 선배인 그는 사무실에선 존대했지만, 둘만 있을 땐 편하게 말을 놓았다.

16559913916274.jpg“우리 이번 주말에 뮤지컬 보러 갈까?”

대학 시절부터 리아에게 호감을 나타냈던 민훈은 졸업 후에도 꾸준히 다가왔고 결국 리아는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게 한 달 전 일이다.

16559913916251.jpg“그래, 선배.”

리아가 흔쾌히 찬성하자, 민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16559913916274.jpg“알았어. 내가 표 예약할게. 회의 늦겠다. 올라가 봐.”

사무실로 돌아가는 민훈을 바라보던 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직은 식사나 영화를 보는 선에서 끝났지만, 민훈은 한시라도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아니다. 준비되었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16559913916251.jpg“……하아.”

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기댔다. 태호와 지리산 별장에서 밤을 보내고, 어느새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물론 헤어진 연인끼리 하룻밤 함께했다고 해서 딱히 연락할 필요는 없다. 서로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웠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일이라도 된다고. ……그래, 처음도 아니면서. 리아는 별거 아닌 일에 휘둘리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

16559913944948.jpg[주리아 팀장님.]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리아에게 회장 비서실로부터 연락이 왔다.

16559913944948.jpg[팀장님과 연락이 안 된다고 회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16559913916251.jpg“네. 회의 중이라서 휴대폰 꺼놓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죠?”

16559913944948.jpg[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지금 비행기가 뜰 수 없답니다.]

주 회장은 오늘 오후 일본 출장에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항상 눈코 뜰 새 없는 주 회장은 아마도 귀국 즉시 연이은 일정을 짜놓았을 것이다. 예정대로 귀국할 수 없다면 일정에 차질을 빚을 게 분명하다.

16559913944948.jpg[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는데, 전화로 통보하지 말고 팀장님이 직접 가서 양해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군데 그러지? 장관급 인사라도 되나?

16559913916251.jpg“상대가 누군데요?”

16559913944948.jpg[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약속 장소에 가시면 아실 거라고만 하셨습니다.]

16559913916251.jpg“알았어요. 시간과 장소 알려주세요.”

주 회장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걸 보면 꽤 중요한 상대인가 보다. 리아는 시간과 장소를 적은 후,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회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매니저가 직접 VIP 예약 룸으로 안내했다.

16559913944948.jpg“이쪽으로 오십시오. 일행께서는 먼저 와 계십니다.”

예약 룸에 들어선 리아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16559913916251.jpg“네가 왜 여기에?”

16559913916236.jpg“회장님께 말씀 못 들었나?”

재킷 단추를 잠그며 태호가 우아한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리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리아를 향해 태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16559913916236.jpg“저당 잡힐 담보를 가져오기로 하셨는데. 회장님 대신 네가 나타나다니. 단순한 우연인가?”

16559913916251.jpg“뭐?”

갑자기 밀려든 혼란에 리아는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16559913916251.jpg“네가 왜 우리 아빠를 만나?”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일까? 그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16559913916251.jpg“아니 그보단 저당은 뭐고, 담보는 또 뭐야?”

16559913916236.jpg“저당은 뭐고, 담보는 또 뭐냐고?”

태호는 리아가 한 말을 되풀이하며 희미한 조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16559913916236.jpg“……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순간 리아의 육감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저 미소. 그녀가 아는 한 아주 위험한 미소였다. 그건 칼자루를 쥔 자의 여유 만만한 표현이며 전형적인 갑의 태도였다. 바짝 긴장한 리아는 주먹을 움켜쥐며 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이번에 또 어떤 일로 난처하게 하려는 거지? 한동안 리아를 응시하던 태호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16559913916236.jpg“무슨 일인지는 회장님께 직접 듣도록 해. 내가 너의 궁금증을 풀어줄 의무는 없으니까.”

말을 마친 태호는 그대로 리아를 지나쳐 룸을 걸어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리아는 멍한 얼굴로 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연이은 비행기 출발 지연으로 주 회장은 밤늦게야 돌아올 수 있었다. 저녁 내내 초조하게 주 회장을 기다린 리아는 그가 귀가했다는 말에 곧장 서재로 향했다.

16559913916251.jpg“아빠, 어떻게 된 일이야?”

16559914003198.jpg“……그게 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주 회장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16559914003198.jpg“웬만하면 너에게까진 알리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급히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올해 안으로 부도날지도 모른다.”

16559913916251.jpg“말도 안 돼. 얼마 전엔 해외 판매로 ‘수출 톱 트로피’까지 받았잖아.”

현재 주원식품은 중국 시장 성공을 기반으로 러시아와 유럽, 미 대륙에 생산 설비를 구축하며 세계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도라고? 리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주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 회장은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리아에게 건넸다.

16559914003198.jpg“이게 지금 우리 재무 상태다. 남미 곳곳에 무리해서 공장을 세우느라 자금 사정이 나빠졌어. 올해 3분기부터 투자액을 갚아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금 조달이 막혔다.”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금 순환이 막히면 대기업이라도 휘청거리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니 아무리 재무 구조가 탄탄한 중견기업일지라도 홀로 버텨내긴 어려울 것이다.

16559914003198.jpg“당분간 엄마에겐 비밀로 해다오. 너도 알다시피 네 엄마 예민하잖니. 그때처럼 쓰러질라.”

16559913916251.jpg“민수는? 민수는 이 사실 알아?”

16559914003198.jpg“민수도 아직 모른다. 녀석도 될 수 있으면 모르는 게 좋겠지.”

민수는 리아의 이란성 쌍둥이 오빠로 주씨 집안의 장남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후계자 후보에도 오르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데다, 연구소에 틀어박혀 식품 개발에만 전념할 뿐 경영엔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이다. 5년 전, 부도 위기가 왔을 때 그녀가 태호에게 이별을 통보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휘청거리는 집안을 이끌 사람은 민수가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그때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또 위기라니. 그래서 KJ그룹에 담보를 잡기로 하고 도움을 요청한 건가?

16559913916251.jpg“아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기가 어디라고 찾아가?”

16559914003198.jpg“후우, 내가 찾아가고 싶어서 찾아갔겠니.”

주 회장은 침통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16559914003198.jpg“마지막 수단으로 찾아간 거다. 지금 우리를 도와줄 곳은 KJ푸드뿐이니까. 예전부터 안양 공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어. 그것만 넘겨줘도 급한 대로 불을 끌 수 있을 거다.”

안양 공장은 ㈜정직 시절에 세워진 생산라인으로 한 번도 가동이 멈춘 적 없는, 주원식품엔 상징적인 곳이었다.

16559913916251.jpg“그럼 태호가 말하는 담보가 안양 공장이야?”

16559914003198.jpg“……그쪽에선 다른 걸 원하는데……. 우선은 안양 공장을 밀어보려고.”

16559913916251.jpg“다른 거라니? 그게 뭔데?”

16559914003198.jpg“리아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주 회장은 대답을 회피하며 리아의 손을 잡았다.

16559913916251.jpg“……아빠.”

몇 번이나 더 물어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리아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채 서재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담보이기에 선뜻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날 밤, 리아는 곰곰이 궁리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끝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리아는 내키진 않았지만, KJ푸드 본사로 태호를 찾아갔다. 회사가 위기 상황인데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할 순 없으니까.

16559914032971.jpg“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남 비서가 찻잔을 놓고 물러가자, 태호는 힐끗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6559913916236.jpg“다음 회의까지 10분 여유 있어.”

16559913916251.jpg“도와주는 조건으로 뭘 원하는지 알고 싶어.”

리아는 미사여구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16559913916236.jpg“회장님께 아무 말 못 들었어?”

16559913916251.jpg“그러니까 널 찾아왔지. 안양 공장 말고 다른 걸 원한다고 들었어. 그게 뭐야? 경영권이라도 원하는 거야?”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태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16559913916236.jpg“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59913916236.jpg“내가 원하는 건…….”

그녀를 향한 눈빛이 위험스럽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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