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만히 있어.2021.03.03.
금요일 오후, 주원식품 마케팅 1팀 사무실.
“팀장님! 기사 보셨어요?”
주리아 팀장에게 다가온 막내 사원 채영이 어두운 표정으로 태블릿을 내밀었다.
“방금 올라온 강 이사 인터뷰인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요.”
여기서 ‘강 이사’란 경쟁사인 KJ푸드 전략기획팀 강태호 이사를 가리킨다. KJ그룹 회장의 차남이자,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는 그는 주원식품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특히 이 부분이요. ‘올해 KJ푸드는 들깨 요리 장인인 하 여사와 함께 다양한 메뉴를 개발할 예정으로…….’ 이거 하명은 여사님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인터뷰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리아의 눈매가 옆으로 가늘어졌다. 주원식품도 들깨 삼계탕, 수제비, 샐러드 소스 등 들깨 요리를 기획 중이기 때문이다. 주영철 회장은 자신의 딸인 리아에게 하 여사 영입 임무를 맡겼고, 이에 그녀는 지난 반년 동안 틈틈이 하 여사가 운영하는 지리산 새울 식당을 찾았다. 이제야 겨우 하 여사의 마음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KJ푸드에서 접근하다니.
“안 되겠어. 여사님께 가봐야겠어.”
리아는 급히 차 열쇠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KJ푸드에 발목을 잡힐 순 없었다. 재계 15위 대기업 계열사인 KJ푸드와 재계 200위인 주원식품과의 경쟁은 한마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라고? 그렇겐 못 하지. 리아는 이를 갈며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았다. 서너 시간 운전 후, 지리산 중턱에 도착하니 주위는 슬슬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엔 비 온다는 소리 없었는데…….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리아는 차에서 내려 식당을 향해 뛰었다.
“어머, 주 팀장님, 연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비를 털며 식당에 들어서니,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반갑게 리아를 맞았다.
“여사님 계시죠?”
“그럼요. 어머니! 주 팀장님 오셨어요.”
딸이 자신을 부르자, 안쪽에서 하 여사가 걸어 나왔다.
“자네 왔는가.”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자네 말고도 불청객 하나 더 있으니까.”
하 여사는 시큰둥한 얼굴로 창가를 가리켰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리아는 잿빛 슈트 차림의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조각처럼 뚜렷한 윤곽과 크고 시원한 눈매, 상대를 사로잡는 강렬한 눈빛. 존재만으로 허름한 식당 분위기를 고급스러운 화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남자. 불공평한 신은 그를 창조할 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 게 분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동 어린 시선을 보낼 테지만, 리아는 반대였다. 한껏 날 선 눈으로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바로 그녀를 이곳까지 오게 한 장본인, KJ푸드 강태호 이사니까. 리아의 방문을 예상한 듯 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잘 왔어. 그러잖아도 두 사람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우선 앉아 있어.”
하 노인이 딸과 주방으로 사라지자, 리아는 재빨리 창가로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짜증 어린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리아와 태호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나이는 태호가 한 살 더 많지만, 리아가 빠른 연생이라 둘 다 같은 해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학년이 같다 보니, 리아는 한 번도 태호를 오빠로 대한 적이 없다. 두 사람은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집안끼리 얽힌 악연 탓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 어쩔 수 없이 일로 부딪치게 될 때마다 서로를 더욱더 차갑게 대했다.
“여사님, 우리 주원 식품에서 먼저 접촉했어.”
“알아.”
태호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알면서도 중간에 끼어든 거야?”
리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태호는 피식 웃으며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계약서에 사인한 건 아니지 않나?”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계약서에 사인한 것도 아니고, 아직 하 여사에게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리아는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너, 상도덕 몰라?”
그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고 먼저 제안한 쪽과 꼭 함께 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일부러 경쟁자가 지목한 상대만 골라서 제안한다면 그건 또 이야기가 다르다. 지난 3년 동안 KJ푸드는 심심찮게 주원식품이 시도한 제품을 뒤따라 출시했다. 엿 먹일 작정으로 달려드는 게 아니면 뭔데?
“왜 사사건건 우리 일에 훼방이야?”
“훼방이라. ……글쎄, 난 관심사가 같아서 생긴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하,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소울메이트라도 되는 줄 알겠네.
“말 되는 소릴 해!”
결국 감정이 폭발한 리아는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흥분하든 말든 태호는 태연히 차를 마셨다. 괜히 안달 나게 해서 그녀를 약 올리려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 폭발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쯧쯧쯧. 또, 또 싸운다.”
그때 하 여사가 혀를 차며 딸과 함께 음식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
“니들 할아비가 이런 꼴 보시면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회사를 둘로 쪼갠 것도 모자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그렇다. 원래 주원식품과 KJ그룹은 한 회사였다. 두 집안 조부가 설립한 ㈜정직은 2세대에 와서 주원식품과 KJ푸드로 갈라섰다. 식품 분야에만 머문 주원식품과 달리, KJ푸드는 유통업, 관광&호텔업, 생명공학, 미디어 등 사업을 확장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서로 차이가 극명해질수록 사이는 더 나빠졌다. 두 조부와 지인이었던 하 여사는 그 점이 못마땅했다.
“니들 싸우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이번 사업은 없던 일로 해야겠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사님! 그건…….”
“듣기 싫어. 그래도 멀리서 왔으니 배는 채우고 가.”
음식을 내려놓은 하 여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험한 산길을 운전하고 와서,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다니……. 리아는 묵묵히 식사하는 태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 이 상황에서 잘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나 보다. 그러나 하 여사가 손수 차려준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녀는 점수를 잃을 테고, 그는 반대로 점수를 딸 것이다. 마지못해 리아도 수저를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자, 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빗줄기도 제법 굵어져 있었다. 리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어두운 산길도 운전할 자신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다니……. 그래도 비포장도로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럴 땐 앞차를 따라가면 운전하기 편한데 태호의 SUV는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흥, 댕댕이 응가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리아는 어두컴컴한 앞을 노려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거북이 운전으로 겨우 비포장도로를 벗어나나 싶었는데, 비상등을 켠 태호의 SUV가 포장도로 진입로를 막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태호가 차에서 내려 다가오자 리아는 유리창을 내렸다.
“토사가 덮쳐서 내려가는 도로가 통제됐어.”
“뭐?”
리아는 얼떨한 표정으로 비에 흠뻑 젖은 태호를 바라보았다.
“우선 재현이 형 별장으로 가자.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재현 씨 별장이라면…….”
순간 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곳은 5년 전, 두 사람이 헤어졌던 장소이다. 그 별장에서 리아는 인생 1막 1장의 막을 내렸고 사랑의 추억과 그에 얽힌 모든 애틋한 감정을 그곳에 묻고 떠났다. 그런데 지금 그곳으로 가자고?
“천천히 운전할 테니까, 잘 따라와.”
그녀의 침묵을 동의로 해석한 태호는 등을 돌려 SUV로 걸어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아무리 긴급 상황이라지만, 저리도 태연한 얼굴로 그곳을 언급하다니…….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데 괜히 그녀만 긴장한 모습을 보이긴 싫다. 리아는 멀어지는 태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나와. 우리는 경쟁하는 사이일 뿐이니까.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별장에 도착했을 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변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전속력으로 현관에 뛰어갔지만, 두 사람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몽땅 젖고 말았다. 태호가 문 앞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바라보자, 안면인식이 작동하며 저절로 문이 열렸다. 이어서 별장의 주인인 재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강태호, 이 빗속에 지리산엔 왜 간 거야?]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어, 형.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여자랑 같이 있어?]
여자랑 같이 있느냐는 질문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으로 종종 여자를 데려왔다는 말로 들리니까. 강태호가 문란한 생활을 하든 건전한 생활을 하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듣기가 불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태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응. 그래서 오늘 하룻밤만 신세 질게.”
[지금 공사 중이라서 난방이 안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벽난로 피우면 돼.”
[그래, 알았다.]
통화를 끝낸 태호는 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난방 안 돼서 추울 거야.”
일부러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덜덜 떨리게 추우니까. 리아는 조금이라도 추위를 떨치려 양손으로 팔을 감쌌다. 하지만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가뜩이나 밤이 되면 산속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옷까지 젖었으니 말 다 했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차 안에 있을걸. 그러나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빗속을 뚫고 다시 차로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비에 젖은 재킷을 벗으며 태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벗어.”
벗으라고? 뭘? 무슨 소리냐는 듯 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젖은 옷 입고 있으면 체온이 떨어지니까, 벗으라고.”
당황해하는 리아와 달리 태호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이어서 빠른 손놀림으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리아는 지금의 상황을 너무나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에게 짜증이 났다. 넌 왜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만큼 완벽하게 정리했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정리했어도, 저리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순 없다.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면 몰라도. 그래서일까. 리아는 냉소를 흘리며 신랄한 어조로 비아냥거렸다.
“그래, 옷 벗는다고 큰일 나겠어? 이번이 처음도 아니면서…….”
큰 효과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에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내고 싶었다. 순간 태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은 듯 입가에 흐린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처음은 아니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장작을 가지러 간다며 밖으로 나갔다.
“후우.”
혼자 남게 되자, 리아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상처 주려 꺼낸 말에 그녀 자신이 더 상처받은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항상 그랬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결국에 상처받는 쪽은 그녀다. 리아는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침실로 들어가 속옷만 남겨둔 채 젖은 옷을 벗었다. 그리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 비에 젖은 속옷이 축축하긴 했지만, 차마 그것까지 벗을 순 없었다. 몇 시간만 버티면 그럭저럭 마르겠지. 이불을 두르고 거실로 나가자, 어느새 돌아온 태호가 벽난로를 지피고 있었다.
“아쉽게도 쓸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벽난로 옆에는 달랑 장작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덮개가 날아가서 장작 대부분이 비에 젖었어. 마른 장작이 몇 개 없어서 밤새 불 피우기는 부족할 거야.”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리아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타닥, 타닥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말똥말똥 서로를 쳐다보는 것보단 이편이 나을 것이다. 못 견디게 어색해도 시간은 지날 테고, 날이 밝고 비만 멈추면 그대로 떠나면 그만이다. 그녀 혼자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혹여 아직도 감정이 남았다고 오해할지 모르니까. 감정 따위 깨끗하게 지운 지 오래다. 나도 너만큼 완벽하게 정리했어. 이곳에 모두 묻고 떠났다고! 그러니까…….
“으.”
상념에 젖어 있던 리아는 갑자기 등 쪽에서 한기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과거는 과거고……. 아, 인간적으로 너무 춥네. 난방 목적이 아닌 관상용으로 지어진 벽난로는 오로지 그 주위만 따뜻하게 했다. 옆에 앉은 그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추워?”
“아니.”
시베리아 벌판에 서 있는 사람처럼 오들오들 떠는 주제에 리아는 단호히 부정했다. 하지만 곧 말을 바꿨다.
“……참……을 만해.”
추위에 이가 딱딱 부딪치면서 춥지 않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니까. 거짓말까지 해가며 허세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태호는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떠는 리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한 그녀는 절대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주리아를 상대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강한 척하는 모습 뒤에 숨겨진 여린 부분이 드러나게 되면……. 애써 감추었던 감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할 수 없군.”
태호는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리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아!”
순식간에 리아의 몸이 옆으로 끌리며, 단단한 품 안에 갇혀 버렸다. 미쳐 반항할 새도 없이 태호는 리아를 껴안고 그녀 등 뒤로 이불을 둘렀다. 그리고 꼭 껴안은 채로 양탄자 위에 몸을 뉘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몸을 굳혔다.
“가만히 있어.”
그녀의 귓가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