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사역 요건 (3)
[“진짜? 뭔데?”]
“삼강에서 운영하는 사체 처리장. 거기에 한번 가보고 싶어.”
사냥한 몬스터들 중 활용 가치가 있는 것들은 사체 처리장으로 옮겨졌다.
가죽, 뼈, 고기, 힘줄, 지방, 피, 뿔, 이빨, 손발톱, 독샘, 침샘, 위액 등 수요에 따른 체계적인 분리 작업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티팩트와 포션의 재료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몬스터의 희소성과 레이드의 난이도에 따라 거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한마디로 던전 안에서 썩히기엔 아까운 돈벌이 수단이 된 셈이다.
[“사체 처리장을? 갑자기 거긴 왜?”]
태주의 생각지도 못한 요구 사항에 두 귀를 의심한 재룡이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로 물었다.
“상위 던전엔 어떤 몬스터들이 있나 궁금해서.”
삼강 하베스트처럼 대형 길드와 계약을 맺은 메이저 채굴 회사의 경우 A급 이상의 게이트에서 사냥한 강력한 몬스터들의 사체를 대량으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사체 처리장의 방문 목적이 구경만은 아니었지만.
사실 태주가 원하는 것은 몬스터의 피였다.
부츠의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양의 피가.
[“그게 다야?”]
“어. 일단은.”
태주가 추가적인 제안을 위한 여지를 남기며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아버지한테는 일단 그렇게 전할게.”]
“그래. 그럼 내일 보자.”
통화를 마친 태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
*
*
다음 날.
레이드의 기초 수업을 들으러 온 태주의 곁으로 대엽이 다가왔다.
“태주야.”
“어, 대엽아.”
휴대폰으로 자신의 기사를 찾아보고 있던 태주가 대엽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뭐 보고 있었어?”
“어? 어, 그냥 뭐, 이것저것.”
적당히 둘러댄 태주가 쥐고 있던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 속에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근데 오늘따라 표정이 밝아 보이네? 무슨 좋은 일 있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태주가 새삼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좋은 일? 있지.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러 온 거야.”
태주의 짐작을 부정하지 않은 대엽이 친형인 주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어제 형이랑 처음으로 한잔했거든.”
“주엽 선배랑? 설마 단둘이?”
두 사람의 관계가 껄끄럽다는 것을 알기에 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대엽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네가 먼저 마시자고 했어?”
“에이, 그럴 리가. 형이 먼저 나오라고 했어. 동네 편의점 앞으로.”
“편의점 앞?”
“어. 그냥 테이블에서 조촐하게 맥주나 한 캔씩 했거든. 술자리가 길어지는 게 서로 어색하기도 했고.”
“그래. 뭐, 장소보단 대화를 시도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럼 네가 말한 좋은 일이란 게 주엽 선배랑 가까워진 거야?”
“아니. 그보단 형이 패배를 인정해서 좋았어.”
태주에게 그랬듯 친동생인 대엽에게도 선배로서의 자존심을 깔끔하게 내려놓은 주엽이었다.
“형이 어제 네 칭찬을 엄청 했거든. 어디까지 성장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고.”
“주엽 선배가?”
“어. 의외지? 남의 잠재력 따윈 관심조차 없던 사람이 누군가의 능력을 높이 사는 게.”
“결국 네가 원하는 대로 됐네.”
“다 네 덕분이지 뭐. 애초에 내 힘으론 어림도 없던 일인데. 아무튼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내가 조만간 맛있는 거 살게.”
“맛있는 거? 주엽 선배는 맛있는 거 말고 비싼 걸로 얻어먹으라던데? 천하의 민주엽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니 그 정도 대가는 받아야 된다고.”
태주가 대엽의 은밀한 부탁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주엽의 의미심장한 참견을 떠올리며 말했다.
“뭐? 형이?”
“어. 일단 모른 척 잡아떼긴 했는데,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긴 하더라.”
대엽의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의 발칙한 계획이 들킨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술 마실 때 따로 얘기 안 해? 나한테는 네가 특히 좋아할 거라고까지 했는데. 내가 자길 눌러 줘서.”
“아니. 전혀. 그냥 한 30분 동안 네 얘기만 하다 들어갔어. 크게 될 녀석이니까 앞으로도 너랑 친하게 지내라고.”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의 대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럼 주엽 선배가 속이 깊은 거네. 친동생인 네가 나한테 무슨 부탁을 했는지 알면서도 서운함을 느끼기는커녕 관계 회복을 위해 먼저 손까지 내밀었으니까.”
“뭐?”
태주의 합리적인 추측에 대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니의 비교와 형의 우월감에 위축된 나머지 역지사지의 심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대엽이지만, 막상 태주의 말을 듣고 나니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화풀이를 한 선택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하나뿐인 형인데 매사에 경쟁자로만 여기는 건 좀 아니잖아. 솔직히 네가 아니어도 늘 누군가의 비교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게 주엽 선배의 일상인데.”
“그야 그렇지. 초기 각성 이후부터 쭉 선망의 대상이자 시기의 대상인 삶을 살아왔으니까.”
태주의 진심 어린 조언에 수긍한 대엽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말대로 앞으론 형이랑 잘 지내볼게. 솔직히 좋은 일이라고 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후련한 마음이 들진 않았거든. 그냥 내 뜻대로 됐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기뻤던 거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대엽이 주엽과의 술자리에서 느낀 모순적인 감정을 태주에게 고백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어차피 누가 널 형이랑 비교하든 네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으니까.”
오 대표와 하 대표 사이의 오랜 앙금을 풀어준 것에 이어 형제간의 우애마저 회복시킨 태주가 대엽의 왼쪽 팔뚝을 가볍게 토닥였다.
“고마워 태주야. 이렇게 상담까지 해주고. 덕분에 마음이 좀 후련해진 것 같아.”
뜻밖의 가르침을 얻은 대엽이 태주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던 바로 그때.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
함 교수의 지각을 예견이라도 한 듯 뒤늦게 수업 장소에 나타난 재룡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 어, 뭐, 별거 아니야. 아, 그리고 태주야,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 테니까 혹시 교수님이 먼저 오시면 나한테 톡 좀 해줘. 알았지?”
재룡의 물음에 어물쩍 대답을 회피한 대엽이 뜬금없는 부탁을 남긴 채 슬쩍 자리를 피했다.
“어, 그래. 편하게 갔다 와.”
가정사에 해당하는 사적인 문제라 대엽의 어설픈 핑계에도 눈치껏 장단을 맞춰 준 태주였다.
“아 참, 태주야, 네가 어제 나한테 사체 처리장 얘기를 했잖아.”
대엽의 분주한 뒷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재룡이 자신의 허벅지 옆을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따로 말씀드렸는데, 너 편한 시간에 아무 때나 오래. 저번처럼 염 기사님을 보내주신다고.”
태주의 예상대로 몬스터의 피를 구하기 위한 일차적인 관문은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염 기사님을?”
12년을 붙어 다닌 재룡에 비해 만남의 횟수는 초라했지만, 태주와 염 기사는 이미 재룡에게 밝힐 수 없는 여러 가지 비밀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왜? 같이 다니기 불편했어?”
태주의 반응을 오해한 재룡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불편하다니. 저번에도 얼마나 편하게 데려다주셨는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염 기사가 태주에게 실수를 한 건 아닐까 내심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던 재룡이 다시금 순박한 미소를 되찾았다.
“아, 그건 그렇고, 오늘 아침에 오승훈 대표님께서 또 아버지한테 연락을 하셨어.”
“오늘도? 그동안 못 했던 걸 몰아서 하시나 보네. 이번엔 또 무슨 말이 오갔는데?”
동맹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증명하는 반가운 근황을 접한 태주가 흐뭇한 마음으로 물었다.
“아버지 말로는 태동 길드에서 낙찰받은 모든 게이트의 채굴 작업을 우리 회사한테 맡기기로 하셨대.”
“어? 진짜? 완전 잘 됐네.”
“그러니까. 회복의 기미가 없던 갈등의 골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메워질 줄 누가 알았겠어. 물론 네가 없었다면 여전히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겠지만.”
활을 완성시킬 목적으로 나선 계산적인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전설 등급의 활과 더불어 두 거물급 인사의 신임까지 얻게 된 태주였다.
“아무튼 태동에서 들어가기로 예정된 A급 게이트가 하나 있는데, 그 작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협력 관계를 이어갈 것 같아.”
“A급 게이트? 그게 정확히 언젠데?”
태주는 사체 처리장의 방문 일정을 레이드 당일이나, 늦어도 그다음 날로 정할 작정이었다.
수요가 존재하는 몬스터의 피는 극히 일부이다 보니 활용 가능성이 없는 피는 별도의 보관 절차 없이 특수한 정화 장치를 거쳐 버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점을 노리는 편이 다량의 피를 확보하는 데 훨씬 더 유리했다.
“이번 주 토요일 아침.”
“아아, 토요일 아침.”
태주에겐 그리 나쁘지 않은 시간대였다.
10시부터 12시까지 과외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레이드에 소요되는 시간과 채굴 시간 등을 고려해 봤을 때, 최소한 해가 떨어진 이후에야 몬스터의 사체들을 처리장으로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음 날 역시 휴일이었기 때문에 태주의 입장에선 크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럼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오전에 가도 돼? 이왕이면 어떻게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는지도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물론 두 번 와도 좋고.”
거절이라는 선택지를 두고 있지 않았던 재룡이 태주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일단 아버지한테 얘기해 둘게. 염 기사님한테도 그렇고.”
“근데 주말이라 실례가 되는 거 아니야?”
“실례는 무슨. 원래 주말과 공휴일을 일일이 챙길 수 없는 게 채굴 작업이야. 심지어 대표인 아버지께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같이 출근하고 계시는데?”
365일 비상근무 체제인 게이트작전사령부가 그렇듯 헌터 업계에서 종사하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비슷한 고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주말이라고 해서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 어차피 민폐라고 생각할 사람도 없으니까.”
채굴 회사의 근무 방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재룡이 손사래를 치며 태주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래. 그럼 일단 토요일 저녁에 가는 걸로 할게.”
구체적인 약속을 잡는 데 성공한 태주가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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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아파트 입구에 나와 있던 태주의 앞에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뒷좌석에 오른 태주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염 기사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룸미러로 눈을 마주친 염 기사가 재룡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네. 기사님께서도 별일 없으셨죠?”
“아니요. 전 별일이 좀 있었습니다.”
“네?”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시트에 기댔던 태주가 생각지도 못한 대화의 양상에 허리를 곧추세우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