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사역 요건 (2)
부츠를 바닥에 내려놓은 태주가 잃어버렸다고 했던 반지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반지를 오른쪽 검지에 낀 태주가 이번엔 모든 능력치를 증폭시켰다.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
재앙 등급의 저주를 버텨내기 위한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준비 과정이었다.
물론 저항과 폭주 스킬만으로는 역부족이란 걸 클로버 컨테이너에서의 첫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대외 활동 목록】
1.
[난이도 하]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의 사역 요건 충족하기 (더 보기▼)
대외 활동 목록을 연 태주가 더 보기를 눌러 재앙의 찬가와 사역 요건을 확인했다.
《재앙의 찬가》
《전장의 웅덩이를 가득 채운 약자들의 피. 그곳에 얼굴을 담가 사리사욕을 채운 난 피식자들의 비명을 나침반 삼아 검붉은 발자취를 남긴다네. 난 가장 낮고 더러운 곳과 맞닿은 포식자의 하수인.》
‘그래. 재앙의 찬가를 힌트 삼아 장화의 사역 요건을 유추해 봤을 때, 이건…….’
《사역 요건》
《장화의 갈증을 멈추시오.》
‘장화의 밑바닥을 몬스터의 피에 담그는 거다.’
태주가 다시 부츠를 집어 들었다.
화려한 금속 장식이 붙어 있는 가죽 부츠는 여전히 착용 전후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초경량이었다.
물론 부츠에 접촉하는 순간 느껴지는 원인 모를 위압감도 그대로였지만.
축!
갈증을 호소하고 있는 부츠를 파란 피가 고여 있는 곳에 살짝 내려놓았다.
‘자, 이제 스펀지처럼 빨아들여라.’
태주가 긴장된 마음으로 부츠의 변화를 지켜봤다.
예상이 적중할 경우 재앙 등급의 아티팩트를 통제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각성자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15초 후.
‘…….’
부츠의 밑창이 피에 잠겼음에도 불구하고 기포가 올라온다거나 피가 줄어드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이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린 태주가 부츠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설마.’
부츠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태주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용도대로 사용하거나 착용하는 순간 사용자를 파멸로 이끄는 저주의 힘이 발휘된다는 재앙 등급 아티팩트의 기초적인 주의 사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고 들어가야 되나?’
새로운 접근법을 택한 태주가 오른발부터 부츠 안에 넣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도라 발을 밀어 넣는 행위에 거침이 없었다.
쓰윽.
발을 집어넣을 때마다 살짝 커 보였던 부츠의 사이즈가 태주의 발볼과 길이에 맞게 저절로 조절되었다.
“후우.”
부츠를 신은 태주가 긴 날숨과 함께 호흡을 가다듬었다.
유경험자임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기분 나쁜 무력감이 태주의 육체와 정신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 나갔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끝내자.’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태주가 피가 고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 두 발을 담갔다.
축!
‘뭐야, 왜 반응이 없어.’
1초가 유독 길게 느껴지는 탓에 10초도 지나지 않아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방법도 아니었나?’
별다른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태주가 뒤로 물러서려던 바로 그때.
뽀글.
피에 잠긴 부츠 주위로 작은 공기 방울 하나가 올라왔다.
‘……?!’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지만, 태주의 눈엔 올라오자마자 터져 버린 작은 기포 하나가 무언가의 호흡처럼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뽀글.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공기 방울.
우연이 아님을 직감한 태주가 저주의 고통도 잊은 채 발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비로운 현상들에 집중했다.
‘제발 되라. 제발.’
행여나 사역 요건 충족에 방해가 될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던 태주가 마른침을 삼키던 바로 그때.
뽀글뽀글. 뽀글뽀글.
더 많은 기포들이 걸쭉한 피 위로 떠올랐다.
점점 더 많이,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어!’
이번엔 피가 줄어드는 것을 육안으로 목격했다.
피에 잠겨 있던 부츠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쓰으으으읍!
마치 컵에 든 내용물을 빨대로 남김없이 빨아들이듯 고여 있던 피가 사라지고 동굴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 태주의 귓가에 탐욕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전장의 웅덩이를 가득 채운 약자들의 피에 얼굴을 담가 사리사욕을 채운다는 재앙의 찬가 속 수수께끼 같던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을 알 것 같았다.
‘목이 엄청 말랐나 보네.’
자식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한 방울의 피라도 더 마시기 위한 부츠의 욕심 많은 모습이 태주의 눈엔 그저 흡족할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
▶ 장화의 갈증이 조금 해소되었습니다.
태주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역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실마리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됐다!”
보스의 방으로 돌아온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태주가 처음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의 사역 요건 충족도 (0/100)
‘어? 근데 왜 아직도 0이지?’
기대와 달리 100퍼센트를 기준으로 한 충족도의 진척 상황엔 변함이 없었다.
▶ 1퍼센트 미만의 변화에 대해선 별도의 수치가 표시되지 않습니다.
태주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듯 0의 의미에 대한 시스템의 답변이 연이어 떠올랐다.
‘뭐야, 이 정도 피로는 기별도 안 간다는 거야?’
▶ 아티팩트에 걸린 저주는 100퍼센트의 충족도를 달성했을 때 풀립니다.
“하아. 결국 조건이 충족될 때까진 버티라는 거네.”
어느 정도 궁금증은 풀렸지만,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부츠의 고통스러운 착용감에 한숨부터 나왔다.
▶ 아티팩트에 부착된 버프나 기타 옵션들 역시 사역의 성공 시점에 공개됩니다.
재앙 등급의 경우 전설 등급 이하의 장비들과 달리 이름과 등급을 제외한 모든 세부 스펙들이 물음표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먹일 수 있는 건 다 먹여 봐야지.’
바닥에 머물러 있던 태주의 시선이 설인의 왼쪽 허벅지로 옮겨졌다.
마정석을 꺼내기 위해 세로로 낸 약 40센티미터의 자상에선 여전히 파란 피가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론 태주의 관심사는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소량의 피가 아닌 5미터에 육박하는 설인의 거대한 몸뚱이 안에 든 다량의 피였지만.
‘꼭 두 발을 동시에 먹여야 되는 건 아니겠지?’
태주가 밀어차기를 하듯 부츠를 신은 오른발을 벌어진 상처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푹!
발목까지 들어간 부츠가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꾸룩! 추즈즈즈!
어찌나 알뜰하게 포식을 하는지 허벅지를 타고 흐르던 피가 다 그칠 정도였다.
▶ 장화의 갈증이 조금 해소되었습니다.
사역 요건이 충족되고 있음을 알리는 반가운 메시지가 또 한 번 태주의 눈앞에 떠올랐다.
피를 꼭 동시에 먹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그로부터 약 1분 후.
츠츠츠츠!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은 느낌이 들던 부츠의 밑창이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 먹었나?’
쑤욱!
오른발을 조심스럽게 빼낸 태주가 허리를 굽혀 벌어진 상처 안을 들여다보았다.
‘와아, 핏물이 제대로 빠졌네.’
피가 제거되고 나니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처럼 근육과 지방, 그리고 뼈의 형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의 사역 요건 충족도 (0/100)
물론 충족도는 여전히 0을 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걸 언제 다 채우지?’
태주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게이트에 드나드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학부생의 특성상 충족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인턴십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여름 인턴십 역시 E급 게이트에서 진행될 예정이라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일일 과제 중엔 안 되겠지?’
아침에 이미 과제를 수행하고 온 터라 내일 새로운 과제가 뜨기 전까진 검증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 돌아가야겠다.’
설인의 사체에서 물러난 태주가 얼른 부츠를 벗었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던 몸 상태가 신발을 갈아 신은 것만으로도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다.
*
*
*
다음 날.
▶ 현실로 돌아갑니다.
일일 과제를 마친 태주가 강렬한 빛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안 되네.’
떨떠름한 표정의 태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츠의 반응 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지만, 아쉽게도 과제 속에선 사역 요건의 충족도가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업이나 들으러 가야겠다.’
큰 숙제 하나를 얻게 된 태주가 콘텐츠 제작의 이해를 수강하기 위해 방을 나서려던 바로 그때.
지이잉!
재룡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함께 수업을 듣는 날도 아니었기에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급한 일인가?’
용건이 있어야만 통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아침 일찍 오는 전화는 대부분 그 목적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현관으로 향하던 태주가 늦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어, 태주야, 난데. 지금 어디야?”]
“나? 지금 집에서 나가고 있는데, 왜? 무슨 할 얘기 있어?”
[“어.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버지가?”
태주의 예상과 달리 용건이 있는 쪽은 재룡이 아닌 삼강의 하도철 대표였다.
“갑자기 왜?”
[“태동의 오승훈 대표님께서 어제 아버지한테 따로 연락을 하셨거든.”]
재룡의 대답을 듣는 순간, 자신이 하 대표에게 연락을 취하기 전까진 화해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했던 오 대표의 당부가 떠올랐다.
[“활도 합쳐진 마당에 다시 얼굴이나 보고 지내자고.”]
“다행이네. 근데 그 중요한 걸 왜 이제 얘기해.”
[“넌 어제 더 중요한 시험이 있었잖아. 심지어 기사까지 났던데?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 신태주, 첫 레이드의 전리품은 보스몹의 마정석.”]
재룡은 실전 테스트를 앞둔 태주에게 방해가 될까 연락을 삼간 것이었다.
[“역시 대단해. 선배들 틈에서도 언제나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게.”]
“최고는 무슨. 그리고 아직 성적이 나온 것도 아닌데 뭐.”
재룡의 극찬이 민망했던 태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 그리고 오승훈 대표님께서 그런 말씀도 하셨대. 두 분의 화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너라고.”]
약속대로 오 대표는 태주가 중간에서 어떻게 힘을 썼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잊지 않고 전한 상태였다.
[“그래서 말인데, 아버지가 너한테 고맙다고 하시면서 필요한 게 있는지 꼭 좀 물어보라고 하셨어.”]
“필요한 거?”
부츠의 갈증을 멈출 수 있는 효율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 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으음. 필요한 게 하나 있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