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하극상 (4)
도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5분.
쿨타임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던 태주가 싱가포르 여정에서 만난 민주엽의 학원 동기, 이규호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일단 여유를 부리게 만들어야 되는데.’
규호가 알려준 주엽의 안 좋은 습관, 여유.
태주는 적을 농락하는 경향이 있는 주엽의 퍼포먼스적인 측면을 이용해 감점 요소를 만들어 낼 작정이었다.
- “어? 스켈레톤이다.”
선두 그룹에 있던 한 학생이 두세 마리씩 모여 있던 해골 병사들을 발견했다.
‘다수의 만만한 적이라…….’
태주의 눈에 비친 해골 병사들은 민주엽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기 위한 좋은 미끼들이었다.
- “나도 킬 좀 올려 보자.”
- “스켈레톤 따윈 걸어 다니는 보너스지.”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아이들이 해골 병사들을 향해 기세 좋게 전진했다.
“한 마리는 내가 먹는다.”
태주의 예상대로 몸풀기 상대가 필요했던 주엽이 단검을 움켜쥔 채 놀라운 속도로 치고 나갔다.
“합!”
적진 깊숙이 단숨에 파고든 주엽이 간결하고 예리한 움직임으로 해골 병사의 목을 벴다.
그리곤 잘린 두개골에서 떨어져 나간 투구를 머리에 쓴 뒤 해골 병사가 된 듯한 포즈를 취했다.
- “뭐야, 마왕군으로 전입한 거야?”
- “참교육도 적당히 해. 해골들 울겠다.”
- “나도 하나 써볼까?”
- “넌 대가리가 커서 안 돼.”
주엽이 부린 여유가 동기들 사이에서도 하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 “어느 마디부터 분리시켜 줄까나.”
- “야, 왼쪽에 있는 궁수는 내 거다.”
- “이따 끝나고 뼈해장국이나 먹을까?”
주엽의 장난에 자신감을 얻은 아이들이 해골 병사와 뒤섞여 본격적인 교전을 펼쳤다.
‘지금이다.’
혼란한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태주가 느슨해진 레이드에 긴장감을 주었다.
▶ 스킬 『도발』이 발동되었습니다.
어그로에 반응한 해골 병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주엽을 향해 돌아갔다.
삐거덕! 삐거덕!
곧이어 해골 병사의 칼끝과 화살의 방향 또한 같은 곳을 가리켰다.
잔여 병력의 처리를 동기들에게 맡긴 채 여유를 부리고 있던 주엽에게 예기치 못한 위협이 엄습한 것이다.
쉬이익!
“……?!”
주엽이 갑자기 날아든 해골 병사의 화살에 황급히 자세를 낮췄다.
텅!
화살촉이 주엽이 쓰고 있던 투구의 양옆에 달린 뿔을 맞고 튕겨 나갔다.
한쪽 무릎을 꿇지 않았다면, 필시 어느 한 곳이 관통되었을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뭐야!”
투구가 날아간 주엽의 두 눈이 처음으로 휘둥그레졌다.
해골 병사의 전투 지능상 동기와 싸우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목표물을 노린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슥. 슥슥.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교수와 조교들이 위기를 자처한 주엽의 긴장감 없는 태도에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여유는 머리가 굳지 않게 해 판단력을 높여 주지만, 던전 안에선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조차 전력을 다하는 맹수의 자세가 더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됐다.’
주엽을 응시하고 있는 심사 위원들의 분주해진 손놀림을 확인한 태주가 화살의 종류를 교체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주엽을 노리고 있는 해골 병사들을 대신 처리함으로써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매뉴얼에 따라 위험에 처한 동료를 엄호를 했다는 인상을 모두에게 심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쉬이익! 쉬이익!
태주가 날린 화살이 주엽의 뒤에 있던 해골 병사들을 차례차례 제거했다.
‘이거 꼴이 말이 아닌데?’
태주의 도움을 받은 주엽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제부턴 진지하게 임해야겠어.’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한 주엽이 눈에 띄게 달라진 눈빛으로 해골 병사들의 목을 베어 내고 또 베어 냈다.
물론 감점법의 특성상 태주가 실수를 하기 전까진 그 어떤 활약으로도 기울어진 균형을 바로잡을 수 없었지만.
*
*
*
잠시 후.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독한 한기와도 싸워야 했던 학생들이 결국 얼음 동굴의 가장 은밀한 곳에 위치한 보스의 방 앞까지 도달했다.
“여기가 끝인가 보네.”
선두에서 동기들을 이끌던 주엽이 개운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플레이에 안정감이 생길수록 초반에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가 자꾸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보스는 누가 잡지?”
S급 법사 슬아가 5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설인에게 눈독을 들였다.
태주와 주엽의 대결이 부각되는 바람에 존재감이 줄어들긴 했지만, 슬아 역시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1등에 대한 욕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긴 누구야. 먼저 잡는 게 임자지.”
앞선 실수들을 만회하고 싶었던 성규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성급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 “야, 좀.”
- “아아, 저 새끼, 진짜.”
검은색 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성규의 독단적인 행동에 동기들의 원성이 터져 나왔지만, 얼음 박쥐 사냥에 실패한 이후에도 태주에게 몇 차례 더 농락을 당한 터라 조급할 대로 조급해진 마음을 쉬이 다스릴 수 없었다.
쉬이익!
결국 말릴 틈도 없이 발사된 화살이 보스몹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물론 E급 게이트라 해도 보스는 보스였지만.
팅!
보스몹이 갈퀴처럼 생긴 기다란 손톱으로 성규의 화살을 쳐냈다.
“이런 씨!”
만회는 고사하고 상대를 자극하는 꼴만 된 성규가 짜증 섞인 얼굴로 다음 화살을 준비했다.
쿠아아아아아!
성규의 선제공격에 화가 단단히 난 보스몹이 학생들을 향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포효했다.
그리곤 온몸을 뒤덮고 있던 가늘고 긴 설백색의 털들을 곤두세워 바늘처럼 만들었다.
- “어! 뭐야 저거!”
보스몹의 위협적인 신체 변화에 당황한 학생들이 주춤하는 기색을 엿보였다.
- “야, 저건 설인이 아니라 고슴도치인데?”
- “고슴도치? 저 정도면 그냥 성게 아니야?”
- “설마 저 상태로 돌진하진 않겠지?”
- “그러게. 혹시 모르니까 실드부터 쳐야겠는데?”
보스몹의 외모 평가를 시작으로 공격 패턴과 그에 대한 대응 방안까지 논의하고 있던 아이들이 서서히 간격을 벌리며 보스전에 대비했다.
“보스를 잡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에겐 보스의 사체에서 나온 마정석을 선물로 줄게.”
학생들의 적극성을 끌어올리고 싶었던 이 교수가 한 가지 유인책을 내걸었다.
물론 그 이면엔 학생들의 실수를 유도해 시험의 변별력을 확보하겠다는 평가적인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지만.
- “오오, 대박. 그럼 헌터 마켓에 팔아도 돼요?”
레이드 장비나 던전에서 얻은 부산물 등을 거래할 수 있는 사이트를 각성자들은 헌터 마켓이라 통칭하고 있었다.
“어. 그건 받은 사람 마음이야.”
이 교수가 한 학생의 현실적인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 “야, 된다는데?”
잡몹인 얼음 박쥐에서 보스몹인 설인에 이르기까지 던전 안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은 몸속 어딘가에 마정석을 품고 있었다.
특히 마정석은 아티팩트의 재료나 대체 에너지원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는데, 게이트의 등급과 몬스터의 강함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 “어? 그럼 E급 게이트에서 나온 보스몹의 마정석이니까 못해도 5백만 원은 받겠네?”
시세를 알고 있던 학생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정확한 평가액은 협회에서 공인한 거래소를 통해 감정을 받아 봐야 알 수 있었지만, E급 게이트의 경우 보통 보스몹의 마정석이 오백에서 천만 원 선으로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야, 여름방학 때 여행이나 한번 다녀올까?”
- “난 장비 바꾸는 데 보태야겠다.”
마정석의 가치에 솔깃해진 학생들이 의욕적인 눈빛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 교수의 노림수가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 “야, 누가 준대? 막말로 민주엽에 신태주, 거기에 공슬아까지 딱 버티고 있는데.”
- “하긴, S급이 셋이나 되는데, 우리한테까지 기회가 올 리 없지.”
물론 객관화가 잘 된 대다수의 아이들은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녀석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삼파전 양상을 예측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쫄리면 빠지시든지!”
동기들이 술렁이고 있는 사이, 절친인 장세종과 함께 팀플레이를 모의한 박성규가 다시 한번 활시위를 놓았다.
쉬이익!
성규의 화살을 신호탄으로 협공을 시작한 세종이 무리에서 벗어나 설인을 향해 과감하게 돌진했다.
“간다!”
장세종 역시 박성규와 마찬가지로 박쥐 떼의 몰매에 제대로 망신을 당한 이후 몇 차례 더 도발 스킬에 농락을 당한 상황이라 이미 물 건너간 A 학점 대신 보스의 마정석이라도 챙겨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팅! 팅! 팅!
보스몹이 얼굴로 날아든 화살을 갈퀴처럼 생긴 기다란 손톱으로 연거푸 튕겨냈다.
“뭐야 이 씨, 왜 이렇게 안 맞아!”
마정석의 판매 대금을 반반씩 나누기로 한 세종이 보스몹에게 무사히 접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일종의 시선 끌기용 공격이었는데, 제아무리 작전이라고는 하나 단 한 발의 화살도 명중하지 않다 보니 성규의 입장에선 민망함이 밀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야!”
성규의 도움으로 유효 타격 거리까지 좁히는 데 성공한 세종이 가시처럼 돋친 털로 빈틈없이 뒤덮인 설인의 복부를 향해 너클을 낀 주먹을 날렸다.
깡!
세종의 너클이 설인의 털끝에 닿는 순간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경쾌한 쇳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 “……?!”
성규의 엄호는 물론 세종의 일격까지 무위로 돌아가자 지켜보고 있던 동기들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뭐지? 화살이랑 주먹이 전혀 안 먹히는데?”
- “그래도 검은 다르지 않을까?”
- “근데 저 정도 강도의 털이면 검도 안 들어가는 거 아니야?”
- “그럼 결국 법사가 나서야 되나?”
삼파전 양상을 점치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S급 법사인 슬아에게로 옮겨졌다.
‘이건 기회다.’
동기들이 거는 기대감을 느낀 슬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불 속성 마법을 준비했다.
바로 그때.
두 팔을 휘둘러 세종을 물러나게 만든 설인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탄력적인 점프와 긴 손발톱을 이용해 동굴 벽에 달라붙었다.
쿠아아아아아!
그리곤 얼음 동굴의 천장까지 빠르게 이동한 뒤 학생들의 머리 위쪽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고드름들을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 “야! 피해!”
- “으아악!”
위험을 직감한 학생들이 사방으로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15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길이 3미터의 대형 고드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물리적 대미지를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드!”
속성 공격을 날릴 참이었던 슬아가 황급히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팍!
돔 형태의 방어막 위로 떨어진 대형 고드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났다.
쿠아아아아아!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천장에 붙어 있던 설인은 자리를 옮겨가며 사방에 고드름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팍! 팍! 팍! 팍!
‘슬슬 전리품이나 챙겨볼까?’
어수선한 대피 상황 속, 천장에 붙은 보스몹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던 태주가 반경 20미터 안에 있는 대상의 급소, 약점, 손상 부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간파 스킬을 활성화했다.
▶ 스킬 『간파』가 발동되었습니다.
순간, 간파 대상의 공략 포인트가 태주의 머릿속에 데이터처럼 전송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