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먹이 사슬 (9)
‘뭐야, 저건 또.’
고성이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태주가 비장한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S 게이트의 여섯 번째 응시자를 발견했다.
- “우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출발했어. 동선이 겹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한 주최 측의 배려였지. 하지만 저 녀석은 어때. 저 녀석의 추월은 나를 비롯한 다른 응시자들의 도전을 방해했어. 그런데 1등이라고? 아니. 난 절대 인정 못 해. 저건 명백한 실격 사유라고.”
순탄했던 초반 분위기와 달리 프레데터 등급의 커트라인을 넘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여섯 번째 응시자의 눈엔 자신을 앞지른 것으로도 모자라 역대급 점수까지 획득한 태주의 모든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 “하긴, 나도 나중에 출발한 사람한테 추월을 당하면 멘탈이 흔들릴 것 같긴 해. 그러다 보면 당연히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거고.”
- “그러게. 그냥 ‘와아, 대단하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듣고 보니 또 문제의 소지가 있긴 하네.”
-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재시험을 보는 건 아니겠지?”
- “실격에 재시험이 어디 있어. 그냥 혼자만 떨어지는 거지. 말 그대로 순위의 재조정.”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찾아 공론화시키려는 여섯 번째 응시자의 일방적인 주장에 대기실 안이 술렁였다.
“태주 씨, 이거 어떡하지? 갑자기 여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응시자들의 부정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규호가 근심 어린 얼굴로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다.
‘이때다 싶어 아주 난리도 아니네.’
태주는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녀석들이 여섯 번째 응시자의 물귀신 작전을 핑계로 단합 아닌 단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뭐, 니들이 열심히 짖어 봤자 달라진 것도 없지만.’
누군가의 분풀이 대상이 되고 싶진 않았던 태주가 헛웃음과 함께 반박을 준비하던 바로 그때.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대기실에 나타난 최 이사가 여섯 번째 응시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 “당신이 누군데 나서는 거야?”
태주가 그랬듯 실격 여론을 조성하고 있던 여섯 번째 응시자 역시 최 이사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누구냐고?”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은 최 이사가 갑자기 여섯 번째 응시자가 있는 곳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응시자들 중 한 명의 검을 순식간에 낚아챈 뒤 공중으로 단숨에 날아올랐다.
“하압!”
허공에서 내지른 우렁찬 기합 소리가 대기실 전체를 뒤흔들었고, 최 이사가 가로로 휘두른 검은 그 기합 소리마저 단숨에 양단해 버렸다.
슈우웅!
- “으아악!”
최 이사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여섯 번째 응시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른 검기가 피어오르는 검신이 자신의 정수리 위를 주먹 하나 차이로 스쳐갔기 때문이다.
쿵!
엉덩방아를 찧을 때 발생한 묵직한 진동이 주위에 있던 응시자들의 발바닥을 울렸다.
‘빠르다. 전력을 다했다면, 피하는 게 쉽지 않겠어.’
분명 현장에서 조달한 고급 등급 이하의 평범한 검이었지만, 최 이사의 각성 수준과 노련함이 장비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괜히 아마존으로 불린 게 아니었네.’
다니엘 권에게 들은 최 이사의 명성이 과장되거나 포장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태주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우!’
현장에 있던 응시자들이 놀란 얼굴로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 “누, 누구세요?”
팔뚝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섯 번째 응시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최 이사를 올려다보며 떠듬떠듬 물었다.
“저는 국제헌터협회 아시아 지부의 최연주 이사입니다. 5차 각성에 성공한 S급 전사죠.”
능숙한 영어 발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최 이사가 잠시 빌린 검을 주인에게 던져 주었다.
- “뭐? 국제헌터협회 이사라고? 그거 아무나 못 하는 거 아니야?”
- “5차 각성에 성공한 S급 전사라잖아. 좀 전에 기술 들어가는 거 못 봤어?”
- “어쩐지. 등장할 때부터 포스가 남다르다 했어. 검기도 자유자재로 만들고.”
자기소개에 앞서 실력부터 확인시켜 준 덕분에 현장에 있던 그 누구도 최 이사의 직함과 각성 수준에 대해 의심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 “근데 왜 당사자도 아닌 이사가 나서서 대신 해명을 하지?”
- “그러게. 1등이라 그런가?”
물론 최 이사가 태주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이유에 대해선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계속 앉아서 들을 거예요?”
최 이사가 다리가 풀린 채 털썩 주저앉아 있는 여섯 번째 응시자를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 “네? 아, 아니요.”
태도가 눈에 띄게 정중해진 여섯 번째 응시자가 최 이사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추월 자체는 실격 사유가 아닙니다. 물론 상대를 추월하는 과정에서 레이드의 진행을 방해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애초에 방해가 됐다면 방해를 받은 즉시 이의 제기가 이루어졌겠죠.”
단순한 의견 그 이상의 발언권과 결정권을 지닌 최 이사가 추월을 둘러싼 태주의 실격 가능성을 단호한 어조로 일축했다.
“또한 클리어 타임은 동점자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기준에 불과할 뿐, 만점에 가까운 고득점의 결정적인 원인도 아닙니다. 그렇게 속도에 집착하는 방식으로 채점이 이루어진 적도 없고요.”
- “…….”
막무가내로 의혹을 제기했던 여섯 번째 응시자가 최 이사의 논리적인 반박에 말문이 막혔다.
“S-7에게 추월을 당한 S-1부터 S-6까지의 응시자들 중 제 판단에 동의할 수 없는 이가 있다면, 지금 바로 재심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단.”
다툼의 여지를 주는가 싶었던 최 이사가 찔러보기식 요청에 대한 페널티를 언급하며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았다.
“정밀 분석 결과, S-7의 추월이 본인의 득점에 아무런 불이익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결과 발표를 지연시키고, 소모적인 검증 과정을 되풀이 한 것에 대한 책임을 각오해야 될 겁니다.”
재심을 요청할 수 있는 인원은 6명이었지만, 최 이사의 시선은 오로지 여섯 번째 응시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 그럼 S-7의 추월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시는 분께선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 “…….”
최 이사가 시범을 보이듯 오른손을 번쩍 들었지만, 6명의 대상자 중 그 누구도, 심지어 이 모든 시시비비의 발단인 여섯 번째 응시자마저 선뜻 손을 들지 못했다.
추가 판정으로 인한 책임의 무게도 부담스러웠지만, 사실 트집을 잡고 싶었을 뿐, 태주가 자신의 점수에 악영향을 끼친 적이 없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없습니까?”
최 이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재차 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S-7의 추월에 대해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논란을 완벽하게 잠재운 최 이사가 통제실과 연결된 CCTV를 올려다보며 발표를 이어가라 손짓했다.
“자, 참고로 지금 공개되는 명단에 이름이 없다면 프레데터 등급에 들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최 이사가 응시자들의 이목을 스크린과 스피커에 묶어둘 만한 자극적인 멘트로 노련하게 관심을 돌렸다.
[“네, 그럼 21등부터 40등까지의 명단을 공개하겠습니다.”]
최 이사의 신호를 포착한 진행 요원의 안내 방송이 다시금 대기실 안에 울려 퍼졌다.
“제발, 제발……, 예!”
곧이어 규호의 환호성도 울려 퍼졌다.
최종 등수 21등.
태주와 페이지는 달랐지만, 규호의 이름 역시 명단의 최상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태주 씨! 저도 합격했어요!”
신이 난 규호가 주먹을 쥔 두 손을 머리 위로 지르듯이 뻗었다.
“좋은 결과가 있을 줄 알았어요. 축하해요.”
“이게 다 태주 씨의 기를 받아서 그래요.”
규호가 태주와 악수를 나눴던 오른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하아. 돌아가는 비행기에선 좀 잘 수 있겠네.”
내내 마음을 졸였던 규호가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이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한국엔 언제 들어갈 거예요? 저는 오늘 밤 비행기인데.”
애초에 숙박비도 줄일 겸 준프로가 안 됐을 경우를 대비해 돌아가는 시점은 타이트하게 잡아 둔 규호였다.
“저는 내일 오전이요.”
반면 결과 자체를 의심한 적이 없는 태주는 3박 4일의 일정을 여유롭게 소화할 예정이었다.
“어? 그럼 작별 인사를 여기서 해야겠네요?”
출국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규호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물론 좌석의 특성상 같은 비행기라 해도 마주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아, 이럴 때 같이 합격 인증샷이라도 찍어 둬야 되는데.”
휴대폰을 제출한 상태인 규호가 아쉬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한국에 들어가면 꼭 봐요. 인재대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요. 아, 제가 한국대 쪽으로 갔을 때 연락해도 되죠?”
이번 테스트를 통해 안주가 될 만한 공통된 이야깃거리 하나를 얻게 된 규호가 언제가 될지 모를 태주와의 재회를 기약했다.
“네. 얼마든지요.”
*
*
*
잠시 후.
“끼약!”
경기장 밖에서 초조한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던 승화가 태주의 압도적인 1위 소식에 비명을 질렀다.
“태주 씨, 실례지만,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네?”
“진짜 너무너무 잘했어요.”
태주를 와락 껴안은 승화가 매니지먼트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보다 더 감격스러운 얼굴로 기쁨을 표출했다.
“역시 재벌, 연예인, 그리고 태주 씨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더니. 정말 변수고 뭐고, 신경 쓸 게 하나도 없었네요.”
직업병처럼 생긴 습관적인 기우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난 승화가 태주의 등을 토닥이며 앞으로의 계획을 늘어놨다.
“이제 이 사실만 언론에 퍼지면, 예비 등록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컨택들이 쏟아질 거예요. 국제헌터협회의 검증을 받았으니 태주 씨의 실력에 대한 의심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고요. 하아. 이제 정말 한숨 돌렸네요.”
“네, 저도 숨 좀.”
“네? 아, 죄송해요. 너무 오래 안고 있었죠.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태주에게서 황급히 떨어진 승화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칭찬은 매니저님이 받으셔야죠. 이렇게 테스트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열심히 서포트해 주셨는데.”
“어휴,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말씀이라도 참 감사해요.”
자신의 공을 부인하며 손사래는 치고 있었지만, 태주의 인정을 받은 승화의 광대는 이미 뻐근할 정도로 승천해 있었다.
바로 그때.
지이잉!
“어? 종도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태주와 합격의 기쁨을 나누고 있던 승화가 휴대폰에 뜬 이 교수의 번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