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224화 (224/242)

224. 먹이 사슬 (6)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말 알죠?”

최 이사가 다소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네.”

“어감이 어때요?”

“뭔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헤아리기보단 솔직한 답변부터 전한 태주였다.

“맞아요. 직접적인 차별을 당해본 적이 없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학연, 지연, 혈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글쎄요. 워낙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부분이라.”

무언가 깨달음을 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태주가 무난한 대답으로 최 이상의 반응을 살폈다.

“당연. 으음. 제가 유럽에서 활동할 때 참 많은 차별을 받았어요. 그리고 저는 그걸 실력으로 이겨내고 싶었죠.”

태주의 대답을 잠시 곱씹어 보던 최 이사가 자신의 화려한 커리어에 가려진 웃지 못할 순간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몸소 증명해 내신 거네요. 5차 각성에 아마존이라는 닉네임까지 얻으셨으니.”

태주가 디니엘 권에게 들은 최 이사의 업적을 바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물론 최 이사가 듣고 싶은 말은 결과론적인 위로가 아니었지만.

“그래 보여요?”

최 이사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아닌가요?”

“사람들의 눈엔 그럴지도 모르죠. 제가 꿈꾸는 복수는 아직 시작조차 못했지만.”

‘복수?’

최 이사의 입에서 나온 극단적인 단어 하나가 태주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사실 제 복수는 국제헌터협회의 회장이 되는 거예요.”

태주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최 이사가 본인의 성격만큼이나 시원시원한 방식으로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밝혔다.

“아, 회장이요. 그럼 이사까진 오르셨으니 머지않아 협회장직에 도전하실 수 있겠네요.”

“아니요. 싱가포르가 아닌 스위스에서요.”

“……?!”

그나마 현실적인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있던 태주가 최 이사의 원대한 포부에 흠칫 놀랐다.

“설마 아시아 지부가 아니라 본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한국인 최초를 넘어 아시아인 최초의 협회장이 되는 게 제가 꿈꾸는 최고의 복수에요.”

그들만의 리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냈다 한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기득권 세력에겐 한낱 칼 좀 쓰는 이방인에 불과한 최 이사였다.

“물론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선 태주 씨처럼 뛰어난 인재들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제 도움이요?”

“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학연, 지연, 혈연엔 똑같이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응수해야죠.”

외로운 싸움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최 이사는 동료들을 포섭하기 위한 발판으로 본부의 간섭이 적은 아시아 지부를 택한 것이었다.

물론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응수한다는 것이 기존의 기득권을 빼앗아 똑같이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국제헌터협회의 요직은 늘 그렇듯 미국과 영국이 장악하고 있어요.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그 두 나라를 양강 구도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네. 현 협회장도 영국인이라 알고 있습니다. 전임 협회장은 미국인이었고요.”

“맞아요. 그러다 보니 입후보 자체를 포기하는 국가들이 속출하고 있죠. 어차피 나가 봤자 선출될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두 나라의 눈총만 받기 십상이니까.”

올바른 견제보단 그릇된 상생을 택한 국가들이 대부분이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선뜻 총대를 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현실이 그러니 복수가 쉽진 않겠네요.”

“네. 그래서 태주 씨의 도움이 절실한 거고요.”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최 이사가 기득권 세력에게 맞설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인 전략을 태주에게 제시했다.

“전 한국 헌터들의 실력이 그들에게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저평가 되고 있다는 입장이지.”

“하지만 국제 대회에서의 입상 성적만 놓고 보면 딱히 저평가라 하기에도 애매해서.”

회귀 전후를 통틀어 국제 대회의 참여 경력이 전무한 태주였지만, 굳이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배들의 순위는 내세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네. 그게 바로 그들이 만든 장기 집권의 명분이에요. 다른 국가들과의 현격한 실력 차이. 물론 그 실력 자체가 조작되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

최 이사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태주의 두 눈이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설마 대회 운영상의 비리가 존재한다는 겁니까?”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에요. 아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두 사람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 이사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조작이 일어난다는 거죠?”

“도핑 테스트의 결과를 속이는 거예요. 평소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3배 이상의 능력치를 증폭시키는 거죠.”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실전에선 포션을 사용해 능력치를 증폭시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지만, 개개인의 공정한 실력을 겨루는 국제 대회에선 그 사용이 명백히 금지되어 있었다.

“물론 국적이 같아도 협회에서 밀어 주는 응시자들은 따로 있지만.”

일부의 잘못을 가지고 전체를 매도할 순 없었기에 본인이 확인한 사실을 토대로 정확히 선을 그어 주는 최 이사였다.

“근데 그 정도 마력이면 다른 지원자들이 눈치채지 않을까요?”

마력에 민감한 태주의 입장에선 티가 날 수밖에 없는 속임수였다.

“포션으로 능력치를 높이는 건 금지지만, 스킬을 이용한 자체적인 버프는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거든요. 이의를 제기해 봤자 실격 여부를 판단하는 주최 측과 심판진이 인정을 안 하면 그만이고요.”

“놀랍네요. 인류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협회가 조직적인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게.”

폭주라는 버프형 액티브 스킬을 지닌 태주에겐 반가운 규정이었지만, 도핑으로 인한 버프를 스킬에 의한 것으로 무마한다는 점에 있어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국제헌터협회가 가진 권한과 이권이 실로 어마어마하거든요. 쉽게 말해, 기득권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그러기 위해선 화려한 경력으로 포장된 식구들을 요직에 앉히는 것이 핵심 포인트고요.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식구란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엮인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의미해요.”

“그럼 제 도움이 절실하시다는 말씀도 운명 공동체의 형성과 관련된 겁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 최 이사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된 태주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역시 대화가 잘 통하네요.”

최 이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번졌다.

“국가도 큰 범주에서 보면 지연과 혈연에 해당돼요. 그런 의미에서 태주 씨와 전 학연까지 이어진 아주 긴밀한 사이고요.”

“한마디로 운명 공동체의 자격이 있다는 뜻이군요.”

“화려한 경력으로 포장될 자격도 있고, 요직에 앉을 자격도 있다는 뜻이죠.”

“설마 제게 부정한 조력을 제안하시는 건 아니죠?”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자신의 이미지가 궁금했던 최 이사가 태주에게 반문했다.

“글쎄요. 다니엘 권 씨에게 들은 바로는 그럴 만한 분이 아니시라.”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가면을 쓰고 사는 이들은 많았지만, 교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최 이사였기에 백승걸과 다를 바 없는 탐욕적인 부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더 큰 배신감이 들 것 같았다.

“맞아요. 전 그런 더러운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태주 씨의 순수한 도전에 먹칠을 할 마음도 없고요.”

태주의 바람대로 최 이사의 제안엔 부정적인 조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있을 푸드 체인 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해 주세요.”

“네? 전체 1위를요?”

프레데터 등급의 커트라인만 가볍게 넘어서려 했던 태주가 부정적인 조력을 받아도 쉽지 않을 최 이사의 부담스러운 제안에 두 귀를 의심했다.

“네. 태주 씨의 압도적인 행보보다 더 큰 조력은 없거든요. 더구나 북미나 유럽 지부가 아닌 아시아 지부에서 열리는 푸드 체인 테스트에선 그들이 조작을 할 이유도 없고요.”

최 이사의 말대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자들이 없는 상황에선 도핑이란 변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 그들의 비리를 낱낱이 밝히고, 부정한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설 거예요. 제 말발이 서려면 태주 씨가 그들의 조작된 능력을 순수한 실력으로 넘어서는 수밖에 없고요.”

정화의 의지를 불태우는 최 이사의 눈빛에선 아마존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매서움과 비장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전 태주 씨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커요. 그러니 푸드 체인 테스트를 시작으로 국제 대회에서의 입상까지 꼭 자력으로 이뤄내 주세요. 그럼 제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력으로 태주 씨의 행보를 끝까지 응원할 테니까.”

“네. 저도 그런 이유라면 기꺼이 힘을 보태겠습니다.”

최 이사의 진정성을 느낀 태주가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국제 대회의 참가가 기정사실화된 태주로선 그들의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자신의 커리어를 위협하는 직접적인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거.”

최 이사가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그럼 어떻게 해서든 그 필요를 충족시켜 줄 테니까.”

“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주가 최 이사에게 받은 명함을 안전한 곳에 넣어 두었다.

▶ 획득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자, 이제 그만 일어나 볼까요? 제 뜻은 충분히 전달된 거 같은데.”

짧지만 유익한 대화를 마친 최 이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참고로 기득권 세력에게 있어 태주 씨는 먹이 사슬의 순서를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생태계 교란종이자 잠재적인 최상위 포식자예요. 태주 씨의 성장세가 빠르고 가파를수록 그들의 견제 강도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물론 저와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아도 그들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을 거예요. 그러기에 더더욱 힘을 합쳐야 되는 거고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인 최 이사가 태주의 팔뚝을 가볍게 토닥였다.

“물론 피크닉 내에서도 무모하다는 의견이 다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뜻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동기와 선후배들이 있으니 절대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전 태주 씨가 그런 부정적인 여론마저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믿거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태주 씨와 같은 천군만마를 얻었는데. 그럼 좋은 결과 기대할게요.”

응원의 말을 남긴 최 이사가 자리를 벗어나 입구 쪽으로 향하던 바로 그때.

“저,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태주가 최 이사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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