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먹이 사슬 (5)
“어, 알았어. 일단 그렇게 알고 있을게.”
통화를 마친 승화가 윤승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최연주 이사님이 좀 이따 태주 씨를 보러 오신대요.”
“네? 이사님께서요?”
내심 기대했던 부분이지만, 오늘 아침까지도 별다른 접촉이 없었기에 슬슬 단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왜요?”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자기도 모르겠대요.”
승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태주 씨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제가 이사님이어도 그랬을 것 같은데.”
같은 국적,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
언뜻 떠오르는 접점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데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따로 약속을 하고 오시는 게 아니라 언제 뵐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사님과의 만남보다 시험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태주의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우선순위를 정해주는 승화였다.
“그나저나 지원자들이 꽤 많네요.”
경기장 주변엔 각국에서 모여든 헌터학과 재학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풀거나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아보니 삼수까진 아니어도 재수를 하는 인원은 꽤 있대요. 뭐, 일 년에 시험이 두 번이라 재수를 해도 크게 손해 볼 건 없지만. 아, 물론 태주 씨는 예외인 거 아시죠? 태주 씨는 무조건 재수 없이 한 번에 붙으셔야 돼요.”
여느 도전자들과는 달리 다음 기회란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이미지 타격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주 씨, 사람들이 엄청 쳐다보는데요?”
경기장에 가까워질수록 태주의 등장을 눈치챈 이들의 시선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물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 눈빛에 담긴 감정은 각기 달랐지만.
“그러게요. 사람 민망하게.”
태주를 신기하게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경쟁자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비율상으로는 2 대 8.
사실 경쟁심이라기보단 경계심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았다.
개별적인 응시와 평가가 이루어지는 만큼 직접적인 경쟁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것은 절대 평가 방식이었다.
프레데터를 포함한 5개의 등급이 각각의 커트라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어야 준프로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도 평균에 불과할 뿐, 지원자들의 수준이 높으면 얼마든지 그 비율이 증가할 수 있었다.
물론 총점을 기준으로 순위를 정렬했을 땐 늘 10퍼센트 이내가 안정권이었지만.
‘눈빛들이 그리 호의적이진 않네.’
8에 해당하는 지원자들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눈치였다.
기자와 팬들이 몰린 태주의 입국 기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아팠기 때문이다.
물론 태주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일단 저기서 확인 절차를 거쳐야 돼요.”
승화가 경기장 입구에 설치된 커다란 부스를 가리켰다.
“간단한 신분 확인과 간이 도핑 검사를 거친 뒤 순서만 배정받으면 되는데, 어차피 순서는 랜덤이라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이미 얼굴이 알려진 터라 대리 시험을 방지하기 위한 동일인 여부 확인은 큰 의미가 없었다.
반면, 간이 도핑 검사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는데, 응시자의 객관적인 수준을 평가하는 자리인 만큼 포션의 도움을 받아 능력치를 높이는 행위는 부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폭주 스킬처럼 외부적인 도움 없이 발현할 수 있는 버프는 예외적으로 허용이 되고 있었지만.
“아, 그리고 희귀 등급 이상의 아티팩트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아시죠?”
버프가 많이 부착된 장비 역시 도핑과 같은 이유에서 그 사용이 제한되고 있었다.
일반이나 고급 등급은 응시자의 점수에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지만,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희귀 등급부터는 형평성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 그래서 다른 활을 사용할 겁니다.”
태주가 주로 사용하는 두 개의 활은 모두 희귀 등급 이상이었다.
고뇌하는 하급 정령의 활은 고급에서 희귀 등급으로 강화가 된 상태였고, 썬더 드래곤의 뿔로 만든 전격의 활은 무려 전설 등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손에 익은 게 아니면 어색할 수도 있는데.”
태주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둔 부분이긴 하지만, 직업병처럼 생긴 습관적인 기우는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입시 땐 더 안 좋은 활이었는데요 뭐.”
태주의 선택은 마스터 앤 피스에서 협찬을 받은 일반 등급의 활이었다.
두 개를 선물용으로 사용하다 보니 현재는 세 개만 남아 있었는데, 태주는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활을 승화가 준비한 티셔츠처럼 전략적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이왕 쓰는 거 홍보나 한번 해드리지 뭐.’
일반 등급의 활을 사용할 경우 활솜씨가 더욱 부각되는 것은 물론, 피크닉의 2대 회장인 마스터 앤 피스의 노형래 대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신분 확인을 마친 참가자들은 모두 경기장 안으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기장 외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모든 확인 절차를 마친 태주가 왼쪽 손목에 찬 팔찌 형태의 번호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경기장 안엔 오직 응시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규정으로 인해 매니저인 승화는 끝까지 동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만 하세요. 파이팅!”
승화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
*
*
머라이언 아레나의 대기실.
“태주 씨, 떨리지 않아요?”
경기장 안에서 재회하게 된 인재대 4학년 이규호가 태주의 심장 부근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물었다.
“어때요. 만져 보니 떨리는 거 같아요?”
“으음. 아니요. 떨리기는커녕 잠잘 때처럼 평온한데요?”
손바닥을 뗀 규호가 태주의 반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전 안정제를 두 개나 먹고 왔거든요. 아, 물론 협회의 허락을 받은 약물이라 도핑과는 무관하고요.”
안정제를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규호의 얼굴에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근데 태주 씨는 몇 번이에요? 전 E-11인데.”
푸드 체인 테스트는 무려 25개의 모의 던전을 동시에 가동하고 있었는데, 각각의 던전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F를 제외한 25개의 알파벳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11번째 입장이면 좀 기다려야겠네요.”
1인당 2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테스트의 특성상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 간격으로 던전에 투입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네. 평균 7분씩만 잡아도 최소 1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아요. 가뜩이나 휴대폰도 제출해서 할 것도 없는데.”
정보 공유 등의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등급 확인을 마친 장비를 제외한 모든 소지품은 주최 측에서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전 S-7이요.”
태주가 자신의 접수 확인 팔찌를 내밀며 말했다.
“어? 7번째면 저보다 30분은 먼저 들어가네요? 완전 부럽다.”
“그래 봤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건 똑같은데요 뭐.”
응시 순서의 선후는 존재했지만, 최종 점수가 나올 때까진 누구도 경기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론 대기 시간에 차이가 없어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하아. 그래도 일찍 매를 맞으면 마음 편히 있는 시간이 더 길잖아요.”
규호가 대기실에 있는 커다란 전자시계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던 바로 그때.
[“대기실에 있는 응시자들은 지금부터 해당 게이트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시작이네요. 아, 기 좀 받아 가게 손 한 번만 잡아 주세요.”
안내 음성을 들은 규호가 태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 손이요?”
규호의 청을 흔쾌히 들어 준 태주가 가볍게 손을 움켜쥐었다.
“와아, 이거 악력이 장난 아닌데요? 태어나서 팔씨름 져 본 적 없죠?”
검을 맞대 보면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듯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도 태주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타고난 통뼈인가? 근육이 우락부락한 것도 아닌데 엄청 세네.”
태주의 팔을 보며 혼잣말을 하던 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고마워요. 덕분에 긴장감이 좀 풀렸어요.”
규호가 악수를 나눈 손을 자신의 심장 부근에 갖다 대며 말했다.
실제론 두 개나 챙겨 먹은 안정제의 약효가 뒤늦게 나타난 것이었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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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5분 후.
- “신태주 씨 되시죠?”
바닥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S 게이트로 향하던 태주의 앞길을 한 진행 요원이 막아섰다.
“네. 그런데요.”
발음을 듣는 순간 한국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 “실례지만, 잠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시죠?”
순간, 최연주 이사가 자신을 보러 온다 했던 윤승의 전화가 떠올랐다.
- “그건 가 보시면 압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끝끝내 이유를 함구한 진행 요원이 태주를 다른 길로 안내했다.
*
*
*
똑똑!
작은 회의실 앞에 도착한 진행 요원이 두어 번의 노크로 인기척을 한 뒤 문을 열어 주었다.
- “들어가시죠.”
“네.”
위축될 이유가 없는 태주가 회의실 안으로 당당히 들어섰다.
‘어? 저분이 바로.’
태주가 긴 회의용 탁자의 상석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사진에서 본 거랑 똑같네.’
최 이사에 대해 미리 검색을 해 본 태주가 아시아 지부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소개 페이지를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태주와 눈이 마주친 최 이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태주가 모른 척 인사를 주고받았다.
“제가 누군지 모르죠?”
윤승이 기자들 앞에서 태주의 통역사 역할을 자처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태주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까진 알 길이 없었다.
“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잘 모를 거예요. 일단 여기 와서 앉아요.”
최 이사가 대각선에 위치한 자리 하나를 손수 지정해 주었다.
“네.”
최 이사에게 다가갈수록 5차 각성에 성공한 S급 전사다운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어? 저랑 똑같은 팔찌를 꼈네요?”
피크닉의 징표를 발견한 최 이사가 테이블 밑에 있던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들어 보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아, 그럼 혹시 최연주 이사님이세요?”
적절한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태주가 최 이사의 힌트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 저에 대해 아세요?”
“네. 다니엘 권이란 분한테 우연히 들었습니다. 실력은 물론 인망까지 높으셔서 본인처럼 아시아 지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에겐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을 해 주시고 계신다고.”
윤승과의 약속을 지킨 태주가 최 이사에 대한 호의적인 평판으로 대화의 분위기를 원만하게 풀어갔다.
“그 친구가 진짜 그랬어요?”
“네. 정확히 말씀드리면, 저의 대선배님이시라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후배님.”
자기소개라는 수고를 덜게 된 최 이사가 태주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