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먹이 사슬 (4)
- “꺄아!”
피켓을 든 여성이 태주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대뜸 환호성을 질렀다.
[♡환영합니다. 신태주♡]
‘으음?’
피켓에 적힌 문구를 확인한 태주가 여성의 열렬한 반응에 의아해하던 바로 그때.
“태주 씨 팬인가 봐요.”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양손으로 끌고 가던 승화가 태주의 등 뒤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역시 다니엘 권이 아니었구나.’
잠시 사람을 착각했던 태주가 승화의 남사친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기자들 틈에 섞여 있던 태주의 팬들이 차단봉 너머로 휴대폰을 뻗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150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보유한 슈퍼 루키답게 태주의 한국 기사를 본 일부 현지 팬들이 정보 공유를 통해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연신 고마움을 표하던 태주가 팬 서비스의 차원에서 사인을 해 주거나 함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물론 싱가포르 팬들과의 원활한 소통이 가능했던 건 어디까지나 영어에 능통한 승화가 태주의 곁에서 통역사의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이지만.
“근데 다니엘 권이란 분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
▶ 획득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팬들이 건넨 꽃다발과 선물을 안전하게 챙기고 있던 태주가 다니엘 권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인물인 승화에게 도착 여부를 물었다.
피켓을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들은 간간이 보였지만, 그들 중 자신에게 다가오거나 눈길을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게요. 이렇게 약속 시간을 어길 애가 아닌데.”
도착과 동시에 변수가 발생하자 직업병처럼 생긴 습관적인 기우가 다시금 승화의 멘탈을 엄습했다.
“일단 제가 윤승이한테 전화를 해볼게요.”
공항 밖은 이미 어둠이 찾아온 상태였기에 무작정 이동하는 것보단 팬들과 기자들을 상대하며 자리를 지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승화였다.
“태주 씨! 토요일에 봐요!”
이제야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규호가 태주를 향한 열띤 관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네!”
타국이라 더 또렷하게 들린 것 같은 반가운 한국말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태주가 규호의 인사에 미소로 화답했다.
- “신태주 씨, 혹시 싱가포르에서 활동할 계획은 없습니까?”
- “신태주 씨, 프레데터 등급을 획득하기 위한 커트라인이 상위 10퍼센트 이내인데, 본인은 몇 퍼센트 안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신태주 씨, 실례가 안 된다면, 활을 쏘는 포즈를 한번 취해 줄 수 있습니까?”
- “신태주 씨, 싱가포르에 있는 팬들을 위해 한 말씀만 해 주세요.”
승화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현지 언론에서 나온 기자들이 홀로 남겨진 태주를 향해 영어로 된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 명씩 좀 물어보지.’
850점 이상의 토익 점수를 제출해 교양 필수 과목인 글로벌 영어의 이수 면제를 받긴 했지만, 회귀 전후를 통틀어 시험용 영어에만 몰두했던 터라 자신의 의사 표현을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수준까진 도달하지 못한 태주였다.
“으음.”
질문의 요지는 어느 정도 이해한 태주가 머릿속으로 단어를 선택하고, 어순을 배열하던 바로 그때.
“그냥 한국말로 하세요. 통역은 제가 할 테니까.”
태주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한 남자가 뒷짐을 진 채 기자들을 마주 보며 말했다.
“어? 혹시.”
“네. 태주 씨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
자신이 다니엘 권임을 우회적으로 밝힌 남성이 인사를 하듯 살짝 허리를 굽혔다.
지이잉!
“아이고, 올리비아가 절 찾고 있나 보네요.”
진동으로 해둔 휴대폰을 꺼낸 다니엘 권이 발신자의 정체를 확인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보세요? 어, 나 지금 태주 씨 옆에 있으니까 빨리 와.”
승화의 남사친임을 인증하듯 기본적인 인사말조차 생략한 채 자신의 위치를 알리자마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다니엘 권이었다.
“국제헌터협회 아시아 지부에서 나왔습니다. 시간 관계상 질문은 딱 세 분만 받겠습니다. 참고로 곤란한 질문에 대해선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지닌 다니엘 권이 태주의 대변인처럼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로부터 약 3분 후.
“네. 질의응답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기사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이동하시죠.”
자칫 어수선해질 수 있는 현장을 노련하게 정리한 다니엘 권이 태주를 출구 쪽으로 안내하던 바로 그때.
“야, 권윤승.”
끼어들 타이밍을 놓친 나머지 뒤쪽으로 빠져 있던 승화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너 아까 어디 있었냐?”
“나? 아는 기자가 있길래 잠깐 얘기 좀 하고 있었지. 공항에 도착한 건 30분 전이고.”
“30분? 야, 결정적인 순간에 안 보이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기껏해야 3분도 안 찾았으면서 무슨.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안 보인 건 너 아니야? 아니, 무슨 매니저가 통역도 안 하고 전화를 하러 가. 태주 씨 혼자 곤란하게. 하여간 기본이 안 돼 있어요. 기본이.”
3년 만의 대면이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어색한 기류를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이 태주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격이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기본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야, 시끄럽고, 이거나 하나 끌어.”
승화가 두 개의 캐리어 중 더 무거운 녀석을 윤승의 허전한 손에 강제로 넘겼다.
“태주 씨, 공항에 마중 나온다고 했던 게 바로 이 친구예요.”
“다니엘 권입니다. 본명은 권윤승이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승화의 소개에 맞춰 정식으로 인사를 건넨 윤승이 태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 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인터뷰도 아주 무사히 마쳤습니다.”
가볍게 손을 맞잡은 태주가 윤승의 시의적절한 도움에 고마움을 표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저로선 그리 어려운 일을 한 것도 아닌……, 어?”
악수를 나누던 윤승의 시선이 태주의 오른쪽 손목에 있는 팔찌를 옮겨졌다.
“그 팔찌. 맞죠? 피크닉.”
피크닉의 징표 중 하나인 삼색 가죽 팔찌를 알아본 윤승이 오른손을 거두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어? 이 팔찌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저희 지부에 계신 이사님 한 분도 똑같은 팔찌를 차고 계신데.”
“아, 그래요?”
국제헌터협회 소속의 대선배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한 태주가 왠지 모를 반가움에 묻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최연주 이사님이세요. 별도의 영어식 이름 없이 그냥 연주 최로 통하고 있고요.”
‘최연주? 졸업 사진에선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명예의 전당에 걸린 역대 회장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던 태주가 미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력상으로는 한국대 헌터학과 2기세요.”
‘2기? 2기면 2대 회장인 노형래 선배님과 동기시네.’
윤승의 친절한 설명을 토대로 최연주 이사가 회장 출신이 아니라는 것과 5대 길드의 수장인 박윤기, 이동규 그리고 오승훈과 함께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는 점 등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시아 지부로 오시기 전까진 주로 유럽 쪽에서 활동하셨다 들었고요.”
“활동이라면.”
“아, 협회 활동이 아닌 프로 생활이요. 이사님께서 현직에 계실 땐 5차 각성에 성공한 S급 전사셨거든요. 실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아주 시원시원하셔서 아마존이란 별명까지 얻으셨고요.”
“멋지네요. 아시아계 헌터들에게 그리 호의적이 않은 유럽 무대에서 실력으로 당당히 인정받으셨다는 게.”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지만, 최연주 이사가 활약했던 과거의 유럽은 그 진입 장벽이 더더욱 높았었다.
“네. 비각성자인 저로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전 정신이자 범접할 수 없는 커리어죠. 이사가 되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그런 남다른 발자취 때문이고요. 특히 저처럼 아시아 지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에겐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도 해 주시고 계십니다.”
최연주 이사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윤승의 표정과 어조에선 같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교민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진정성 있게 묻어나고 있었다.
“물론 태주 씨께서도 머지않아 이사님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시겠지만.”
“제가요?”
“네. 조금 전에 몸소 실감하셨잖아요. 태주 씨가 가진 국제적인 인지도와 화제성을.”
국가 간의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때론 국경을 초월하는 영향력을 지닌 세계적인 헌터들이 정부를 대신해 갈등을 조율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사실 프로도 아닌 학부생의 입국에 취재진이 몰리는 건 저도 처음 봤거든요. 팬덤까지 있는 건 뭐 말할 것도 없고요.”
윤승이 태주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싱가포르 팬들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아마 이사님께서도 태주 씨를 예의 주시하고 계실 겁니다. 기사가 올라온 시점은 오늘이지만, 테스트를 신청하신 날에 이미 태주 씨의 지원 사실을 아셨을 수도 있거든요. 아, 어쩌면 태주 씨께 따로 연락이 갈 수도 있겠네요. 아시다시피 국적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으시니까.”
팔찌를 의식한 윤승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싱가포르는 제가 꽉 잡고 있으니까 생각해 두신 장소나 음식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대가를 바라고 하는 가이드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이사님을 뵐 일이 있으면 저에 대해서도 좀 긍정적으로 말씀해 주시고요.”
좋은 평을 부탁하는 말투가 다소 능청스럽긴 했지만, 동아리 면접의 뒤풀이 당시,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 생길 때가 많으니 웬만하면 외출할 때도 꼭 지니고 다니라 했던 4학년 면접관, 조성빈의 조언대로 피크닉의 팔찌는 소유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드는 무형의 실드이자 하나의 신분증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네. 기회가 된다면 꼭 그러겠습니다.”
“어휴, 감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린 윤승이 의욕적인 목소리로 태주의 앞길을 인도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아주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웰컴 투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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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입국 3일차, 토요일.
푸드 체인 테스트가 예정된 머라이언 아레나에 도착한 태주가 경기장 주위에 모여든 수많은 지원자들을 향해 당당히 나아갔다.
“태주 씨,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프로페셔널한 성격의 매니저답게 자유 시간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주를 하면서까지 태주에게 온전히 집중한 승화가 기본적인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여독도 없고 아주 좋습니다. 딱히 긴장되는 것도 없고요.”
“휴우. 다행이네요. 내심 결과물에 대한 부담을 가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지이잉!
“어? 윤승이한테 전화가 오네요? 태주 씨의 합격을 응원하려고 그러나? 여보세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댄 승화가 가벼운 마음으로 통화를 이어가던 바로 그때.
“뭐?! 진짜야?!”
목소리가 커진 승화가 나란히 걷고 있던 태주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