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먹이 사슬 (3)
발걸음을 멈춘 태주와 승화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누구시죠?”
매니저인 승화가 태주를 대신해 상대방의 정체를 물었다.
물론 상대방의 몸에서 발산되는 마력만으로도 단순한 여행객이 아님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안녕하세요. 전 인재대학교 4학년 이규호라고 합니다. 태주 씨가 저와 같은 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기사를 보고 알았고요.”
자신을 소개한 규호가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넉살 좋게 말했다.
‘인재대?’
소위 히트(HIT)라 불리는 세 곳의 명문대 헌터학과 중 한 곳인 인재대는 신화 길드의 단성혁 대표가 나온 모교였다.
“일단 가면서 얘기할까요? 좀 있으면 출발할 것 같은데.”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친화력을 보인 규호가 태주의 오른편에 서며 말했다.
“네. 그러시죠.”
반면 쉽게 경계심을 푸는 법이 없는 태주는 규호의 제안에 응하면서도 심리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근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학교 선배?”
“네? 선배요?”
40대 초반인 승화가 자신을 대학생으로 봐준 규호의 기분 좋은 오해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전 태주 씨의 매니저인 올리비아 현이에요. 대학을 졸업한 지는 20년 가까이 됐고요.”
“어? 진짜요? 완전 동안이시네요?”
생각보다 오차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규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동안은요. 그나저나 싱가포르엔 혼자 가세요? 저처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테스트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텐데.”
“그럼 체제비가 두 배로 들잖아요. 가뜩이나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가는 건데.”
신영제약의 지원을 받아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태주와 달리 대다수의 지원자들은 자비로 테스트에 응시하고 있었다.
“뭐, 그렇긴 하죠.”
태주를 사이에 둔 채 대화를 주고받던 승화가 예상 비용을 가늠해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규호 씨는 왜 알바를 하면서까지 푸드 체인 테스트에 참가하는 거예요? 아시다시피 4학년이면 곧 프로 자격을 획득하게 될 텐데.”
헌터학과 재학생들의 경우 졸업과 동시에 프로 테스트에 도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설령 이번 기회를 통해 프레데터 등급을 받는다고 해도 준프로의 자격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졸업 때까지 3년도 넘게 남은 태주에 비해 규호의 판단은 비효율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물론 4학년씩이나 된 규호가 그 점을 간과하고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것이지만.
“저요? 그야 당연히 태주 씨와 같은 이유에서죠.”
“……?!”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마음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던 태주가 규호와 눈을 마주쳤다.
“준프로의 자격을 획득한 다음 빅 사이닝에 예비 등록을 하려는 거죠? 해외 진출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려고.”
승화의 나이를 짐작했을 때와는 달리 졸업반다운 통찰력으로 정확한 응시 목적을 짚어내는 규호였다.
물론 조금 전에 올라온 기사들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주장하는 댓글들을 간혹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유야 같을 수 있지만, 그래도 4학년 1학기는 늦은 감이 없지 않네요. 작년 11월에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승화는 여전히 규호의 결단 시점에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년 11월엔 태주 씨가 없었거든요.”
아이러니하게도 승화의 의문을 풀어줄 열쇠는 규호가 아닌 태주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네? 그게 무슨.”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긴 승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주 씨를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고작 A급 어쌔신에 불과한 제가 동질감을 느낄 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퀸스맨과 캘리포니아 불리스 같은 세계적인 길드에서 주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거든요.”
남다른 친화력만큼이나 실로 솔직한 고백이었다.
“과찬이십니다. 말 그대로 주목만 했지 구체적인 제안이 왔던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입을 연 태주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췄다.
“아니요. 중요한 건 콧대 높은 그들이 먼저 호감을 표시했다는 겁니다. 어필하는 쪽이 바뀐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죠.”
규호의 말대로 세계적인 길드의 경우 매년 우수한 지원자들이 알아서 모여들기 때문에 특정 헌터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거나 홍보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결심했어요. 태주 씨에 대한 관심이 한국 헌터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으로 번지길 기대하면서 테스트에 응시하기로.”
특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계 헌터들에 대한 관심이 유독 부족했는데, 그러기에 더더욱 태주를 향한 그들의 호의적인 태도가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국내가 아닌 영미권 길드에서 활동하고 싶었거든요. 퀸스맨이나 캘리포니아 불리스 같은 세계적인 길드에서요. 물론 어릴 적 장래희망 같은 막연한 바람이지만.”
4학년에 이르러서야 테스트에 지원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와 더불어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까지 조심스럽게 밝힌 규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꼭 그렇게 되실 거예요.”
초반에 비해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진 태주가 규호의 진정성 있는 도전에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오오, 대박. 가족이나 친구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제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간 분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뭔가 더 뭉클하고 자신감이 샘솟는데요?”
설명할 수 없는 위로를 얻은 규호가 황송한 얼굴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생물학적인 나이로는 3살 형이었지만, 프로든 학부생이든 각성자의 세계에선 등급과 커리어의 무게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이 있어도 선배와 연장자에 대한 최소한의 리스펙트가 없다면, 업계와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기 어려웠지만.
“물론 테스트의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요.”
약 2시간이 소요되는 푸드 체인 테스트는 증강 현실로 구현된 가상의 동료들과 함께 레이드를 펼치면서 개별적인 평가를 받는 구조였는데, 규호의 현실적인 우려대로 최상위 레벨인 프레데터 등급을 받지 못하는 이상 지원의 의미가 무색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 참, 선배 중에 민주엽이라고 있죠?”
태주와의 만남이 즐거웠던 규호가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어? 주엽 선배를 아세요?”
뜻밖의 접점을 알게 된 태주가 주엽과의 인연에 대해 물었다.
“예전에 같은 학원에 다녔어요. 정진 학원이라고.”
“아아, 그러고 보니 두 분이 같은 클래스네요.”
“그냥 반만 같았어요. 서로 얼굴이랑 이름만 아는 정도?”
같은 학원, 같은 반 출신인 류정웅과 주소영이 그랬듯 이규호와 민주엽 역시 이렇다 할 친분은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인 경쟁자라는 생각이 있다 보니 초기 각성 등급이 높든 낮든 비슷한 수준 안에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엽인 요새도 잘나가죠? 뭐, 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유명했던 녀석이라.”
주엽의 근황을 묻는 규호의 입가에선 왠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사실 한국대에 같이 지원했었는데, 걔는 붙고 저는 떨어졌거든요. 하아. 하필이면 그때 장염에 시달려서.”
한국대를 지망하던 규호에겐 한숨의 길이만큼이나 오랜 아쉬움이 남는 기억이었다.
“재수를 고려해 본 적은 없어요? A급 어쌔신이면 충분히 합격했을 것 같은데.”
궁수 클래스의 최희범이 그렇듯 태주가 속한 28기에도 전체 인원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10명의 N수생이 있었기에 현역으로 인재대에 갈 수준이었다면, 1년의 기다림도 그리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재대까지 떨어졌으면 그랬겠죠. 그나마 히트(HIT) 중 한 곳이라 지금껏 다니고 있긴 하지만.”
헌터학과는 100% 정시, 100% 실기가 원칙이라 가나다군으로 분산된 30곳의 대학 중 최대 3곳까지 지원할 수 있었는데, 가군에 속한 한국대와 달리 인재대와 태성대는 같은 나군이라 둘 중에 한 곳만 노릴 수 있었다.
“그리고 A급이라 해도 합격은 장담할 수 없어요. 내년엔 또 어떤 괴물 같은 현역들이 나타나서 절 밟고 올라갈지 모르거든요. 혜성처럼 등장한 태주 씨가 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것처럼.”
매년 500명에 육박하는 수험생들이 한국대에 지원하다 보니 A급 각성자의 수가 모집 인원을 훌쩍 뛰어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합격을 확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과외를 수락하기에 앞서, 입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확답부터 받아둔 태주였지만.
“아이고, 제가 초면에 너무 말이 많았죠? 미안해요.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얘기까지 멋대로 떠들어서.”
태주와 동행하는 내내 입을 쉬지 않았던 규호가 뒷덜미를 매만지며 머쓱하게 웃었다.
“태주 씨는 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요? 으음. 글쎄요.”
규호와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는 법이 없는 태주가 갸웃거리던 고개를 멈추며 물었다.
“아, 주엽 선배랑 같은 반이었다고 하셨죠?”
“네. 제가 그 학원을 고1 때부터 다녔으니까 거의 3년 동안 마주쳤죠.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아, 그냥 주엽 선배처럼 완벽한 어쌔신에게도 약점 같은 게 있나 궁금해서요.”
던전 실습의 실전 평가를 앞둔 태주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는지 확인했다.
“약점이요? 으음. 약점이라기보단 안 좋은 습관이 하나 있긴 하죠.”
“……?!”
규호의 말에 선택적으로 집중하고 있던 태주의 두 귀가 처음으로 솔깃해졌다.
“뭐, 지금은 고쳤을 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그 당시엔 강사님의 지적도 심심치 않게 받곤 했었죠.”
“그게 뭔데요?”
“여유요.”
“여유요?”
“네.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적도 최대한 가지고 놀다 죽이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다른 녀석들에게 막타를 빼앗긴 적도 많았고요.”
‘여유라…….’
주엽의 수업 태도를 곰곰이 떠올려 보던 태주가 규호의 증언이 여전히 유효함을 일정 부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 실전이 아니라 그런진 몰라도 한 번씩 뜸을 들이는 경향이 있었어.’
태주와의 첫 수업에선 기선을 제압할 목적으로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긴장감이 풀어진 이후부턴 빠른 발과 은신 능력으로 보스몹을 농락한다든지 화려한 암살 기술에 치중한 나머지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마저 번거롭게 제거하는 등 지나치게 레이드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곤 했었다.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한번 고민해 봐야겠군.’
규호로부터 만족스러운 힌트를 얻게 된 태주가 승부의 변수가 될지도 모를 주엽의 안 좋은 습관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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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6시간의 비행 끝에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한 태주가 입국장으로 들어서던 바로 그때.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들 틈에서 작은 피켓을 든 한 여성이 태주를 향해 오른손을 흔들었다.
‘어? 분명 남자라고 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