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먹이 사슬 (2)
“국제헌터협회의 아시아 지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에요. 이름은 다니엘 권, 본명은 권윤승.”
“국제헌터협회요?”
태주는 남자의 생소한 이름보단 남다른 소속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럼 그분도 헌터인가요?”
“아니요. 다니엘 권은 비각성자예요. 현재는 국제헌터협회의 아시아 지부와 대한헌터협회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있죠.”
“으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네요. 근데 그런 분이 왜 저를.”
다니엘 권이 마중을 나오기엔 방문의 목적이 지극히 개인적이란 생각이 든 태주였다.
“적어도 국가나 협회를 대표했을 때만 뵐 수 있는 분 아닌가요?”
“공적으로는 그렇죠.”
태주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승화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사적으론 아시아 지부 소속의 직원이기 이전에 제 오랜 남사친이지만.”
“네? 남사친이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태주가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물었다.
“이종도 교수님께서도 아시는 분이세요?”
“아니요. 이 교수님과 저는 길드에서 만난 사이지만, 다니엘은 제 초등학교 동창이거든요.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시킨 적도 없고요.”
“아, 네. 그럼 사회에서 알게 된 이 교수님과는 또 다른 유대감이 있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땐 저도 각성자가 아니었고, 둘 다 생각 없이 뛰어놀던 시기니까요.”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오른 승화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다 태주 씨 덕분에 보는 거예요. 이번이 3년 만인가? 아무튼 전 뉴욕에 있고, 그 친구는 싱가포르에 있다 보니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거든요.”
“어? 그럼 이번 기회에 친구분이랑 따로 시간도 보내고 그러세요. 어차피 매니저라고 해서 꼭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3박 4일의 일정 중 테스트가 차지하는 날은 고작 토요일 하루였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 시간을 누린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판단한 태주였다.
“네. 대신 오늘은 그 친구가 태주 씨와 저의 가이드 역할을 해줄 거예요.”
태주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인 승화가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싱가포르 여행은 처음이시죠?”
“네? 아, 네. 사실 해외여행은커녕 비행기 자체도 처음이에요.”
인생 첫 여권을 회귀 직후에 만든 태주로선 모든 것이 새로울 따름이었다.
“에이, 못 타봤으면 어때요. 앞으로 지겹도록 타실 텐데.”
승화의 예견대로 세계 최초란 수식어를 달게 된 태주의 활동 반경이 국내로만 국한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국경을 초월한 인지도를 지닌 네임드 헌터들의 경우 꼭 여행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 방문할, 정확히 말하면, 초청을 받을 기회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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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승화가 준비한 홍보용 티셔츠로 갈아입은 태주가 밴에서 내린 뒤 터미널로 향했다.
“역시 스타일이 좋아서 그런지 뭘 입어도 태가 나네요.”
태주를 뒤따르던 승화가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양손으로 끌며 말했다.
“참고로 저흰 일등석이라 체크인에서부터 출국장에 이르기까지 별도의 라운지를 이용해요. 그러다 보니 기자들을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진 않고요.”
“쉽게 말해, 사진이 찍힐 타이밍이 제한적이라는 거네요.”
“네. 그래서 조금 여유롭게 도착한 거니까 어색하다고 해서 쫓기듯이 걷지 말고, 최대한 느긋하게, 난 지금 도전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증명을 하러 가는 거다. 뭐, 이런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도 한 번씩 들어주시면 더 좋고요.”
태주의 매니저답게 언론에 노출되는 이미지를 고려,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세심하게 코치하는 승화였다.
“어? 저기 앞에 이미 기다리고 있네요.”
입구 쪽에 서 있는 기자들의 무리를 발견한 승화가 태주의 등 뒤에서 귀띔을 해줬다.
“네. 저도 지금 막 봤어요.”
승화의 조언대로 보폭과 보속을 조절한 태주가 같은 곳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
- “어? 왔다.”
큰 키에 우월한 피지컬을 지닌 태주의 존재감 넘치는 등장을 목격한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어 동일한 피사체를 겨냥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입학식 때부터 시작된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태주를 향해 어김없이 쏟아졌다.
“기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왔네요?”
카메라를 의식한 태주가 복화술을 하듯 물었다.
“그러게요. 전 고작 3명한테만 알려 줬는데.”
카메라의 숫자를 눈으로 빠르게 세어 본 승화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뭐, 어찌 됐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요?”
물론 승화보다 더욱 언론에 민감한 최 총장이 다수의 기자들을 움직인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지만.
- “신태주 씨, 내일모레 있을 푸드 체인 테스트에 지원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태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 한 기자가 심경을 묻는 의례적인 질문으로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평소 때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첫인사처럼 건넨 기자의 질문에 무난하게 답한 태주가 자신을 둘러싼 취재진과 함께 터미널 안으로 들어섰다.
- “혹시 긴장이 되거나 그러진 않습니까? 신태주 씨의 탈락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 테스트의 성패가 앞으로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란 의견이 있던데.”
이번엔 다른 언론사의 기자가 의욕적인 눈빛을 보내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원래 긴장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
태주가 보인 엷은 미소엔 말로 다하지 못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테스트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결과에 대해 고민하는 건 그 이후의 문제고요.”
물론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히 응하면 응할수록 더 많은 궁금증들이 태주의 귀를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 “오늘 공항 패션의 컨셉은 무엇입니까?”
- “이번 테스트가 해외 길드와의 접촉을 본격화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 “싱가포르는 이번이 처음입니까?”
- “신태주 씨,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플래시 세례에 이은 질문 공세가 적정 수준을 넘어설 무렵, 충분한 노출이 되었다고 판단한 승화가 기자들에게 에워싸인 태주를 체크인 라운지로 안내했다.
“태주 씨, 이쪽으로.”
“네.”
기자들의 목소리에 묻힐 뻔했던 승화의 시의적절한 부름에 우선적으로 반응한 태주가 정중한 양해를 구한 뒤 여유롭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 잘하고 오세요.”
- “입국할 때 또 봅시다.”
짧은 응원의 말과 함께 흔쾌히 길을 터준 기자들이 태주의 뒷모습을 향해 다시 한번 셔터를 눌러 댔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
*
*
잠시 후.
탑승 시각에 맞춰 게이트에 나타난 태주와 승화가 인터넷에 뜬 기사들을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
“라스트 피스의 로고가 아주 제대로 나왔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승화가 기사 속 사진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태주 씨, 사진발 예술인데요? 완전 배우 같아요. 그런 말 많이 들었죠?”
“아니요. 그냥 비싼 카메라로 찍어서 그런가 봐요.”
“에이, 겸손하시긴. 솔직히 보정도 없이 이 정도 비주얼이면 부모님께 감사…….”
태주의 외모를 칭찬하던 승화가 아차 싶은 마음에 황급히 말끝을 흐렸다.
제아무리 좋은 의도로 건넨 관용적인 표현이라도 보육원 출신에 부모님의 얼굴조차 모르는 태주의 입장에선 씁쓸하게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제 눈치 볼 것 없이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누굴 닮았는지 몰라서 그렇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태주가 사과할 타이밍만 엿보고 있는 승화의 악의 없는 말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하아. 고마워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긴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책망한 승화가 태주의 넓은 아량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근데 부모님을 찾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일단 유전자 등록만 해도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높다던데.”
“글쎄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덤덤한 표정의 태주가 승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어떤 분들이실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렇게 잘 자란 태주 씨를 보면 엄청 자랑스러워하실 텐데. 이미 부모님 중 한 분이 유전자를 등록해서 태주 씨를 찾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요. 그럴 마음이 있었으면 벌써 찾아왔겠죠. 제가 발견된 보육원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시설의 이동 없이 한 곳에서만 지냈던 태주로선 충분한 기회를 허락한 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보육원을 퇴소할 때까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실종이 아닌 이상 부모들의 등록률이 워낙 저조해서 만남이 성사되는 경우도 거의 없대요. 저처럼 의도적으로 버려진 케이스는 더더욱 그렇고요.”
한때나마 승화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지만, 기술력보다 중요한 것이 서로의 의지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턴 막연한 기대감을 품지 않게 된 태주였다.
“그래서 별로 찾고 싶지 않아요.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도 이미 지났고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태주가 다시 휴대폰을 들어 기사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 여기 매니저님도 나왔는데요?”
태주가 자신의 사진 속에 배경처럼 등장한 승화의 모습을 보여 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러니까요. 하필이면 눈 감았을 때 찍혀서.”
자신의 베스트 컷을 찾는 과정에서 이미 태주가 내민 사진을 봤던 승화가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잘 나온 사진을 찾는 건 틀린 것 같으니까 차라리 댓글이나 봐야겠어요.”
대중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승화가 댓글이 많이 달린 기사를 찾아 화면을 밀어 올렸다.
[좋아요: 115]
[싫어요: 7]
“기사가 조금 전에 올라와서 그런지‘좋아요’의 개수가 좀 적네요. 뭐, 그래도‘싫어요’에 비해선 압도적인 숫자지만.”
[wjdw****]
(>)
= (!) 작성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화난 이모티콘)┗ 댓글 모음 가보셈. 기사마다 따라다니면서 시비를 걺. 그냥 신태주 안티임.
┗ 이런 사람 특. 고소장 접수되면 바로 대가리 박음.
┗ ㄹㅇㅋㅋ
“뭐라고 썼는데 그러지?”
악플러가 작성한 것으로 의심되는 댓글을 발견한 승화가 닉네임 옆에 표시된 화살표를 눌러 댓글 모음을 확인했다.
“와아, 태주 씨, 이거 봤어요? 이 사람 완전 악질 중의 악질인데요?”
태주를 향한 인격 모독은 물론 근거 없는 비방에 가짜 뉴스까지 양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승화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동안의 만행을 보여 주었다.
“으음. 확실히 선을 넘긴 했네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수준임을 알게 된 태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악플러로 고소할까요?”
“글쎄요. 일단은 싱가포르에 다녀온 다음…….”
태주가 승화의 적극적인 대응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던 바로 그때.
“저기요. 신태주 씨 맞죠?”
두 사람의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태주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