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먹이 사슬 (1)
“네, 선배님.”
성호를 따라 멈춰 선 태주가 부름에 응했다.
“나머진 나 혼자서 할 테니까 넌 그만 가 봐.”
서바이벌 룸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미션들로 태주를 난처하게 하려 했던 성호가 모든 계획을 중단한 채 테스트에서 빠질 것을 지시했다.
“네? 가라고요?”
바라던 바이긴 했지만, 급하게 부른 것치곤 너무 갑작스러운 귀가 조치라 마냥 기쁘다기보단 무언가 선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 의아함부터 앞서는 태주였다.
“제가 혹시 뭘 잘못했나요?”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었던 태주가 선배의 지시를 따르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니야. 막상 와보니까 혼자 해도 될 거 같아서 그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성호가 태주의 팔뚝을 가볍게 터치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바쁜데 괜히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네. 동방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인데.”
“아니요. 오는 건 상관없는데, 정말 혼자 해도 괜찮으세요?”
밤늦게 붙잡아두는 것이 미안해서 건넨 빈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성호의 의사를 재차 확인하는 태주였다.
“어. 나중에 딴소리 안 할 테니까 편하게 가도 돼. 나도 일찍 끝내고 갈 거니까.”
“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후배인 자신에게 부스의 용도를 일일이 설명하고 체험시키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어 그런 것이라 여긴 태주가 결국 성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리고 현우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다시 청소하러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
“네. 감사합니다.”
청소 검사를 맡은 현우로부터 이미 같은 말을 들은 상태였지만, 자신을 배려하려는 성호의 면전에서 굳이 안 그래도 그러기로 했다는 식의 대답으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어, 현우야, 난데.”
태주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호가 약속대로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통화의 용건은 태주의 청소 면제 하나만이 아니었지만.
[“네, 선배님. 태주는 만나셨어요?”]
휴대폰 너머에선 여전히 청소기의 소음과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 온 지 한 10분 좀 넘었어.”
[“네? 그렇게나 빨리 갔어요?”]
태주에게 점멸 스킬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현우가 성호의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어. 그리고 지금 막 집으로 보냈어.”
[“네? 집이요? 그건 또 무슨…….”]
두 사람의 종잡을 수 없는 만남에 두 귀를 의심한 현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설마 태주가 선배님께 실수라도 했습니까?”]
동아리 내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성호가 동기들과 2학년 후배들을 따로 집합시켜 입단속을 시킬 만큼 태주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아는 현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수? 실수는 내가 했지.”
현우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눈치챈 성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선배님이요?”]
“어.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좀 잘 못 본 거 같아.”
[“저, 선배님, 잠시만요. 제가 일단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통화를 하는 내내 한쪽 귀를 검지로 막고 있던 현우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명예의 전당으로 향했다.
[“네,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태주와 단둘이 남았을 때처럼 굳게 문을 닫은 현우가 통화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한 뒤 대화를 이어갔다.
“어, 그래. 딴 게 아니라, 신태주 걔, 그렇게까지 견제 안 해도 될 거 같아.”
[“네?”]
만난 지 10분 만에 벌어진 성호의 이해할 수 없는 태세 전환에 현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네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진 나도 아는데, 막상 둘이 있어 보니까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아는 그런 천둥벌거숭이는 아닌 것 같아서.”
[“고작 10분 만에요? 왜요?”]
성호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이 태주에게 거리를 뒀던 현우가 변심의 이유를 물었다.
“원래 눈은 거짓말을 못 하거든. 그리고 10분이 아니라 10초도 안 걸려서 느낀 거야.”
성호가 태주와 눈을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눈이요? 아니, 뭐, 선배님이 관상가 양반도 아니고 참.”]
내심 특별한 계기를 기대했던 현우가 순간적인 감정에 의한 빈약한 판단 근거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제 태주 앞에서 입조심을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사실 신고식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자제하라고 하셔서 칭찬은커녕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는 것도 조심스러웠거든요.”]
“어. 네 마음대로 해. 동기들한테도 전하되 태주가 알게 하진 말고.”
못난 선배임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성호가 다른 의미의 입단속을 위한 당부의 말을 전했다.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
*
*
5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
한중연 학과장의 수업을 일찌감치 마친 태주가 트레이닝 돔 앞에 대기 중이던 프리미엄 밴에 올랐다.
물론 목요일에 출발할 수 있게 된 건 어디까지나 금요일 수업을 맡은 이종도 교수가 출석이 인정되는 예외적인 결석 사유를 흔쾌히 적용해 주었기 때문이지만.
“왔어요?”
운전석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매니저 현승화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태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저희도 지금 막 도착했어요.”
승화가 옆자리에 앉은 태주의 허전한 두 손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하아. 그나저나 캐리어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게 너무나도 부럽네요. 전 보시다시피 짐이 한 보따리인데.”
한숨부터 내쉰 승화가 뒷좌석에 실린 자신의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요. 가뜩이나 손이 생명인 분한테 저런 짐짝 따윌 들게 할 순 없죠. 저 정도 무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괜히 힘 뺄 생각하지 마세요. 아시죠? 저도 각성자인 거.”
잠시 잊고 있던 커리어지만, 사실 헤드헌터가 되기 전의 승화는 이종도 교수와 함께 던전을 누비던 A급 법사였다.
“네. 대신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어? 그럼 지금 하나 부탁드려도 돼요?”
뒷좌석을 향해 팔을 뻗은 승화가 캐리어와 나란히 놓여 있던 쇼핑백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늘 이 차가 어떻게 마련된 건진 알고 계시죠?”
“네. 감사하게도 신영제약에서 지원한 차량이라 들었습니다.”
새터 때 얻은 최고급 회복 포션인 파이안을 인연으로 신생 기업인 신영제약과 1년의 광고 계약을 맺게 된 태주는 6억이라는 파격적인 개런티와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맞아요. 공항까지 가는 차량은 물론 퍼스트 클래스 왕복 티켓에 5성급 스위트룸까지 3박 4일 동안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신영제약 측에서 부담하기로 했어요. 왜? 바로 태주 씨 단 한 사람을 위해서요. 덕분에 저도 태주 씨의 케어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됐고요.”
계약서 안엔 광고 효과가 기대되는 대회에 나갈 시 그와 관련된 모든 비용을 성적과 무관하게 지원하며, 입상을 할 경우 회사 차원에서 마련한 소정의 격려금과 각종 추가 혜택을 별도로 제공한다는 세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님, 일단 출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공회전을 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트레이닝 돔 앞을 벗어나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랐다.
“아, 태주 씨 사이즈가 엑스라지 맞죠?”
승화가 쇼핑백 안에 들어 있던 흰색 티셔츠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싱가포르의 5월은 너무 더워서 이렇게 반소매를 입어야 되거든요. 자요.”
“어? 웬 티셔……, 어?”
상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의 양쪽 어깨 부분을 두 손으로 잡아 활짝 펼친 태주가 곳곳에 프린트된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이게 뭐예요?”
“상대가 성의를 보였으면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해야죠.”
승화는 자신의 회사인 라스트 피스를 비롯해 태주의 이번 출국 과정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 한국대학교와 대한헌터협회, 그리고 메인 스폰서인 신영제약의 로고와 엠블럼 등을 양쪽 소매 및 티셔츠의 앞뒤로 배치시킨 비공식 유니폼을 손수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설마 3박 4일 내내 이것만 입고 다녀야 되는 거예요?”
티셔츠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태주가 스타일보다는 홍보에 무게를 둔 노골적인 디자인에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요. 갈 때 두 번, 올 때 두 번, 마지막으로 테스트 당일에 한 번. 이렇게 딱 다섯 번만 입으면 돼요. 물론 기자들 앞에서만요.”
효율성을 추구하는 승화는 취재진이 몰리는 양국의 공항과 경기장에서만 티셔츠를 노출할 계획이었다.
“네? 기자들이 온다고요?”
“어머, 그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갔다 오려고 그랬어요?”
“아니요.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고작 준프로 테스트에 기자들까지 부르는 건 좀 유난스러운 것 같아서요.”
“고작이라니요. 태주 씨의 해외 진출 의지를 이보다 더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제가 이미 국내는 물론 현지 언론에도 살짝 귀띔을 해놨으니까 이제 곧 전 세계에 있는 우리의 잠재적인 고객님들이 태주 씨의 기사를 실시간으로 접하게 될 거예요.”
친한 기자들을 통해 미리 손을 써둔 승화가 민망함을 이겨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아, 그리고 같은 옷을 여러 벌 준비했으니까 혹시라도 옷이 더러워지거나 땀이 배면 바로바로 말씀해 주세요.”
당사자인 태주보다 더 들뜬 승화가 쇼핑백 안에 든 여분의 티셔츠를 꺼내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아니요. 그냥 제가 다 가지고 있다가 그때그때 갈아입을게요.”
승화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가져간 태주가 총 다섯 벌의 티셔츠를 접근성이 가장 뛰어나면서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안전한 공간에 보관했다.
▶ 획득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와아, 덕분에 짐이 하나 줄었네요.”
승화가 태주에게 돌려받은 빈 쇼핑백을 거꾸로 쏟아 보이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 마음의 짐만 덜면 딱인데.”
“왜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직업병처럼 생긴 습관적인 기우예요.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 일이 틀어지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들이요. 태주 씨는 그런 적 없으세요?”
“저요? 글쎄요.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해결책을 찾아보는 성격이라.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우리가 가진 걱정거리의 96퍼센트는 무의미한 것들이라고.”
“그렇겠죠? 이거 매니저인 제가 오히려 태주 씨의 케어를 받는 느낌이네요. 정작 푸드 체인이든 뭐든 걱정할 게 없겠다고 한 건 저인데……. 아무튼, 마지막 날에도 이렇게 웃으면서 돌아오기로 해요. 저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테스트의 결과를 둘러싼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친 승화가 개업식 때 본 태주의 정교한 활솜씨를 떠올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 참, 그리고 싱가포르에 도착하면 남자 한 분이 마중 나와 있을 거예요.”
“네? 남자 한 분이요?”
공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비단 취재진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된 태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의 정체를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