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위계질서 (2)
[동방 대청소.]
건우가 받은 답장엔 오직 두 단어만 적혀 있었다.
“대청소?”
경우의 수에 없던 힘 빠지는 집합 명분을 마주한 태주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 의외지? 이거 술이 아니라 먼지만 마시게 생겼어.”
중간고사 뒤풀이를 기대했던 건우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입맛만 다셨다.
“대청소? 갑자기 웬 대청소?”
피크닉 멤버가 아닌 정웅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들이 동방 좀 치워 놓으래.”
정웅의 물음에 답하던 태주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야, 천하의 신태주도 1학년은 1학년이구나. 선배들이 청소 심부름도 시키고.”
장난기가 발동한 정웅이 활이 아닌 빗자루를 든 태주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수고해. 이따 청소해야 되니까 수업 중에 너무 힘 빼지 말고.”
용건을 모두 마친 정웅이 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인 뒤 원래 있던 자리로 느긋하게 돌아갔다.
“근데 선배들은 안 도와주나? 뭐, 지하라 창문 닦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면적이 면적인지라 최소 2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체육관 청소에 익숙한 건우가 투입 인원을 고려한 나름의 예상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글쎄. 그건 가 봐야 알 것 같은데?”
건우의 앞에선 말을 아꼈지만, 대청소와 같은 별거 아닌 집합 명분을 숨긴 채 문자를 보냈던 만큼 내심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
*
*
잠시 후.
동아리 면접 때와 마찬가지로 치유의 숲 입구에서 모여 다 같이 출발한 6명의 아이들이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가디언 하우스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안 왔나?”
탁!
제일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선 서윤이 깜깜한 벽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켰다.
“우리끼리 내려가서 치우고 있을까? 그럼 선배들이 더 좋아할 거 같은데.”
하강 스위치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간 건우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글쎄. 그래도 7시까진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멋대로 움직였다가 혼날 수도 있잖아.”
조심성이 많은 대엽이 건우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긴, 내려가 봤자 청소 도구가 있는 곳도 모르니까.”
민대엽 못지않게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창민이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으음?’
정체불명의 마력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태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덜컥!
순간, 가디언 하우스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문자를 보낸 장본인인 배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선배님.”
하강 스위치 앞에 서 있던 건우가 현우의 이른 등장에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안녕하십니까.”
테이블에서 황급히 엉덩이를 뗀 창민이 현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다른 아이들 역시 창민의 뒤를 이어 하나둘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어, 그래. 다들 일찍 왔네?”
가디언 하우스 안으로 들어선 현우가 후배들의 인사를 받으며 출입문을 닫았다.
“네. 근데 다른 선배님들은 안 오세요?”
현우가 문을 닫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건우가 더 이상의 일손이 없는지 우회적으로 물었다.
“어. 나 혼자 왔는데?”
“아, 네.”
선배들의 도움을 내심 기대했던 건우가 태주를 힐끗 쳐다보며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왜. 너희끼리 청소하는 게 억울해?”
“네?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표정 관리에 실패한 건우가 말까지 더듬어 가며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청소 같은 건 당연히 후배들이 도맡아 해야죠. 하하.”
당황한 건우가 먼지 내린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 그래?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건우의 가식적인 대답을 들은 현우가 다른 아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닐 겁니다. 그렇지?”
빗자루를 잡기도 전에 책을 잡히고 싶지 않았던 건우가 근처에 있던 대엽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현명한 대답을 강요했다.
“어? 어, 뭐, 그렇지.”
얼떨결에 지목을 당한 대엽이 건우와 현우의 눈치를 동시에 살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일단 내려가자. 아 참, 그리고 집에서 자고 싶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
오늘 안에 청소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경고에 흠칫한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봤다.
*
*
*
위이잉!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수직으로 천천히 하강하던 바닥이 또 다른 바닥 위에 포개지듯 내려앉았다.
쿵!
위층에 켜둔 불빛이 바닥이 내려가면서 생긴 구멍을 환하게 비추곤 있었지만, 지하의 면적이 워낙 넓어 전체를 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직 내리지 마.”
그 점을 아는 현우가 후배들을 대기시킨 뒤 전등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익숙하게 나아갔다.
물론 후배들에게 시켜도 되지만,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더 내려와 본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덜 답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탁!
“자, 이제 내려도 돼.”
아래층의 불을 켠 현우가 마치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 소파의 상석으로 다가가 세상 편한 자세로 엉덩이를 붙였다.
“아아, 편하다. 너희들도 잠깐 쉬었다 할래?”
최고급 소파의 남다른 쿠션감을 즐기고 있던 현우가 멀뚱멀뚱 서 있는 후배들을 향해 놀리듯이 물었다.
“아니요. 선배님 말씀대로 잠은 집에서 자야죠.”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 건우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현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 선배님, 근데 청소 도구는 어디에 있어요?”
더 이상 도우러 올 사람이 없을 바엔 차라리 빨리 시작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 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어. 저 끝에 있는 문 보이지? 저기가 창고로 쓰이는 방이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들 꺼내 가.”
이번 대청소의 감독관이자 검사자의 자격으로 온 현우가 청소 도구함의 위치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리고 먼지 털 때 조심해. 하나라도 깨뜨리면 다 물어내야 되니까.”
소파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늘어져 있던 현우가 처음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가디언 하우스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지하 공간엔 선배들이 기증한 예술품과 고가의 인테리어 소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가치가 아이들의 1년 치 등록금을 우습게 넘어서다 보니 책임자의 자격으로 동행한 현우의 입장에선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 그럴 땐 퍼스트 에이드를 쓰면 되지 않아요?”
건우가 창고 쪽으로 뒷걸임질 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되긴 하지. 근데 고작 물건값으로 쓰기엔 아깝지 않아? 경우에 따라 목숨값도 될 수 있는 인생 마지막 보험인데.”
건우의 가정에 진정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령 농담이라 한들 허투루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 퍼스트 에이드의 무게감이자 잠재적인 위력이었다.
“선배님, 이 안이 너무 조용해서 그런데, 노래 좀 틀고 하면 안 돼요?”
노동요가 필요했던 서윤이 최고급 스피커가 놓여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선배의 허락을 얻은 서윤이 휴대폰을 연결하기 위해 블루투스를 켰다.
잠시 후.
정웅의 예상대로 검에 익숙한 창민의 손엔 무선 청소기가, 활시위를 당기던 태주의 손엔 먼지를 털어내기 위한 총채가 들려 있었다.
“빨리빨리들 해라. 나도 집에 좀 가게.”
다리를 꼰 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현우가 얄미운 말투로 아이들의 빈축을 샀다.
“와아, 저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네?”
카펫이 깔리지 않은 대리석 바닥만을 골라 물걸레 청소기를 돌리고 있던 서윤이 소파가 있는 곳을 힐끗거리며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행동이지만, 창민이 밀고 다니는 무선 청소기의 소음과 본인이 틀어 놓은 노동요가 한데 어우러진 덕분에 작은 험담 정도는 쉽게 묻힐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진짜 감독만 하러 왔나 봐.”
바닥에 쪼그린 채 카펫에 묻은 얼룩을 약품으로 지우고 있던 유리가 서윤의 소심한 반항에 공감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바로 그때.
“저, 선배님!”
창민과 구역을 나눠 무선 청소기를 밀고 있던 건우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현우를 불렀다.
“어, 왜!”
덩달아 목소리가 높아진 현우가 귀찮다는 얼굴로 건우를 돌아봤다.
“여기도 해야 돼요?”
따로 도어 록까지 설치된 문 앞에 멈춰 선 건우가 청소기를 끄며 물었다.
“아, 거기.”
청소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소파에만 앉아 있던 현우가 건우의 질문에 처음으로 엉덩이를 뗐다.
“다들 잠깐 이쪽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현우가 묵묵히 청소를 하고 있던 아이들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네.”
잠시 하던 일을 멈춘 아이들이 현우를 따라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여긴 아직 한 번도 안 들어가 봤지?”
문을 등지고 선 현우가 자신의 주위로 반원을 그리며 모인 아이들에게 물었다.
“네. 선배님들이 안 계실 땐 소파에서만 놀라고 하셔서요.”
유리의 말대로 동방을 이용하는 건 자유였지만, 지금껏 청소 도구의 위치조차 몰랐듯 문으로 구분된 장소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그래. 너희들이 괜히 실수할까 봐 그런 거니까 이번 기회에 하나씩 알려줄게.”
띡! 띡! 띡! 띡! 띠리리!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푼 현우가 비밀의 방 안으로 아이들을 안내했다.
“들어와. 참고로 비번은 0001이야. 왜 0001인지는 들어와 보면 알 거고.”
“네.”
호기심이 많은 서윤이 제일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바로 그때.
“아, 잠깐만.”
현우가 차단기를 내리듯 문기둥을 팔로 짚으며 서윤을 막아섰다.
“어? 왜요?”
느닷없이 제지를 당한 서윤이 자신의 앞길을 막은 현우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미안하지만, 이 방엔 오래된 전통이 있거든.”
서윤에게 머물러 있던 현우의 시선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네? 전통이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자존심이 상한 서윤이 현우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다.
“태주야, 네가 먼저 들어가.”
“네? 저부터요?”
“어. 네가 28기 수석이잖아. 가장 유력한 회장 후보이기도 하고.”
“……?!”
순간, 서윤을 비롯한 동기들의 이목이 태주에게로 일제히 집중됐다.
“서윤아, 잠깐만 비켜줄래?”
“네? 아, 네.”
졸지에 자격 미달 신세가 된 서윤이 현우의 정중한 부탁에 민망한 걸음을 옮겼다.
“미리 스포를 하자면, 여긴 역대 회장님들의 사진을 모아둔 명예의 전당 같은 곳이야. 수석 합격자부터 안에 들이는 유별난 절차는 이 방의 용도가 정해졌을 때부터 내려온 오랜 전통이고.”
“아아, 그래서 비번도 0001이구나.”
비밀번호의 유래를 알게 된 유리가 현우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서운해도 조금만 이해해 줘. 난 그저 전통을 따른 것뿐이니까.”
현우가 문 옆으로 밀려난 서윤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참고로 여긴 졸업생들의 사진만 걸릴 수 있으니까 너희들이 아는 얼굴은 거의 없을 거야.”
“네. 그럼.”
방 안으로 들어선 태주가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은은한 조명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물론 태주가 느낀 그 편안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