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위계질서 (1)
과외 학생과의 첫 만남이 있은 지 며칠 후.
레이드의 기초 수업을 들으러 온 태주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피크닉 28기 전원, 오늘 오후 7시까지 가디언 하우스로.]
사무적이다 못해 딱딱한 문체의 공지 사항엔 집합의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지?’
순간, 대기실에 있던 동기들 중 같은 문자를 받은 5명의 멤버들이 태주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태주야, 이 문자 봤어?”
A급 무투가 황건우가 제일 먼저 다가와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현우 선배가 보낸 건데, 혹시 왜 모이는지 알아?”
발신자의 정체는 건우의 도제식 트레이닝을 맡은 S급 무투가 배현우였다.
“글쎄. 나도 따로 들은 건 없어서.”
역시나 아는 바가 없던 태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타이밍에 부른 거면, 둘 중 하나 아닐까?”
팔짱을 낀 채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온 A급 법사 금서윤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둘 중 하나? 그게 뭔데?”
태주에게서 답을 찾지 못한 건우의 시선이 곧장 서윤에게로 옮겨졌다.
“하나는 중간고사 뒤풀이, 다른 하나는 축제 준비. 어때. 꽤나 신빙성 있지 않아?”
“으음.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
어쌔신답게 슬그머니 대화에 합류한 대엽이 서윤의 합리적인 추측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형 던전에서의 마찰로 인해 대엽과의 사이가 껄끄러워진 서윤의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 않은 맞장구였지만.
“뭐? 뒤풀이? 그럼 오랜만에 동방에서 한잔하는 거야?”
애주가인 건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복싱부 시절, 집합은 곧 기합이라는 공식에 익숙했던 터라 문자를 받음과 동시에 안 좋은 기억들만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특히 영문을 모르는 집합일 경우 자신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곤 했었는데, 그러기에 더더욱 서윤의 추측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와아, 그러고 보니 벌써 축제의 계절인 5월이구나.”
입학시험을 보던 때가 엊그제 같다고 느낀 유리가 코앞으로 다가온 대동제 일정에 새삼 놀라움을 표했다.
“근데 한국대 축대는 원래 재미없는 걸로 유명하지 않아?”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 창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학 축제의 경우 주로 초대 가수의 라인업에 따라 그 흥행 여부가 결정됐는데, 한국대의 경우 초대 가수의 섭외 자체가 없는 해도 많을뿐더러 학생들 역시 휴강이 권고 되는 3일간의 축제 기간 동안 자기 개발에 시간을 투자하려는 경향이 높아 전반적인 참여율마저 저조했기 때문이다.
“유명하지. 연예인도 없고, 학생들도 없고. 게다가 주점을 못 하니 밤에는 아예 전멸하다시피할걸?”
친형인 주엽에게 전해 들은 바가 있었던 대엽이 창민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축제의 즐길 거리를 구성하는 건 대부분 학과 단위 또는 동아리 별로 만든 부스였는데, 현행법상 학생들이 교내에서 술을 판매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보니 주점이 허용됐던 과거에 비해 북적거리는 느낌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안에서 안주만 팔고, 술은 손님들이 각자 캠퍼스 밖에서 사 온다잖아. 아예 학교 앞에 있는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린 다음 일일 주점을 열기도 하고.”
주점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던 건우가 자신이 알아본 법의 허점을 멤버들과 공유했다.
“근데 피크닉처럼 폐쇄적인 동아리가 축제 준비 같은 걸 할까?”
서윤의 말대로 베일에 싸이다 못해 동방조차 동떨어진 곳에 있는 피크닉과 축제 사이엔 왠지 모를 괴리감이 있었다.
“그러게. 헌터학과 내에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준비하는 거면 몰라도 피크닉의 성격상 행사 부스나 공연 같은 걸 주도적으로 신청하진 않을 것 같아.”
유리 역시 선발 과정부터 남다른, 더구나 회원 개개인의 프라이드가 높은 동아리의 특성상 여느 동아리들처럼 온전히 축제를 즐기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다.
‘응. 맞아.’
2회차 신입생인 태주가 여행 동아리 무박 2일의 회원이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속으로만 긍정했다.
유리의 짐작대로 헌터학과는 매년 다른 학과들과 마찬가지로 의무적인 참여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학과 동아리의 경우 참여가 강제되지 않다 보니 회원들의 다수결이나 동아리의 성격에 따라 부스의 배정 여부가 결정되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재학 시절, 피크닉의 부스가 설치된 것을 본 적이 없는 태주로선 잠시 후에 있을 집합의 의도가 더욱 의아할 따름이었지만.
“대엽아, 넌 뭐 아는 거 없어? 넌 저번에 동아리 면접 볼 때도 선배들이랑 같이 있었잖아. 형님이 회장이기도 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그리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건우가 동아리 회장인 친형으로부터 따로 들은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아는 거? 글쎄. 이번엔 따로 전달받은 게 없긴 한데, 내 기억으론 형이 축제 준비 때문에 며칠 안 들어온 적은 있었어. 한 2, 3년 전이었나? 뭐, 그게 학과 차원인지 동아리 차원인지는 안 물어봤지만.”
3년 먼저 입학한 친형이 있어도 서로의 스케줄에 대해 워낙 관심이 없다 보니 어렴풋한 기억은 있어도 반쪽짜리 정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안 하면 우리야 편하지 않나? 해 봤자 선배들 옆에서 뒤치다꺼리나 할 텐데.”
사람이 많은 곳은, 특히 축제처럼 낯선 사람이 몰리는 곳은 더더욱 기피하는 대엽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하긴, 네 말대로 우리가 시키는 입장은 아니라 아마 셋업부터 뒷정리까지 싹 다 해야 될 거야. 뭐, 그런 일련의 과정 자체가 추억이고 재미이긴 하지만.”
대엽의 현실적인 불만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축제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유리였다.
“그럼 우리끼리 이렇게 모여 봤자 딱히 공유할 정보는 없는 거네?”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고 있는 서윤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시간 낭비를 했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그냥 현우 선배한테 물어볼까?”
발신자와의 접점이 그나마 있는 건우가 휴대폰을 꺼내 들며 동기들의 의견을 구했다.
“글쎄. 해서 나쁠 건 없지만, 애초에 알려줄 의향이 있었으면 그렇게 건조한 메시지를 보냈을까?”
문장 성분마저 생략된 명령조의 딱딱한 문자를 떠올린 창민이 건우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이왕 물어볼 거면 빨리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 좀 있으면 강의 시간인데.”
유리가 대기실에 설치된 커다란 시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괜히 수업 시간에 연락했다 혼나지 말고.”
총대를 메고 물어볼 사람이 필요했던 서윤이 곁에 있던 유리의 말을 거들며 건우를 부추겼다.
“오케이. 언제 답장이 올진 모르지만, 일단 현우 선배한테 메시지는 남겨둘게.”
멤버들의 의견을 수렴한 건우가 시계를 힐끗 쳐다본 뒤 바쁘게 엄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태주야.”
어느새 다가온 정웅이 둥그렇게 모인 동아리 멤버들 사이에 있던 태주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얘들아, 잠깐만. 어, 왜. 뭐, 할 얘기 있어?”
동아리 멤버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태주가 무리에서 벗어나 정웅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있지. 내가 언제 이유 없이 불러낸 적 있어?”
태주의 물음에 헛웃음을 진 정웅이 아이들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야?”
본의 아니게 정웅을 뒤따르게 된 태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자초지종을 모르는 애들이 들으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까.”
다른 동기들로부터 적당히 멀어졌다고 판단한 정웅이 앞서가던 걸음을 멈췄다.
“으음. 일단 바쁜 거 같으니까 본론만 얘기할게.”
어차피 함 교수의 수업이라 제시간에 시작될 가능성은 많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태주를 제외한 피크닉의 멤버들이 모두 자신이 있는 곳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어 마냥 붙들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래.”
조 중장의 참모들 중 한 명인 류홍석 대령이 아들의 입을 빌려 감사의 뜻을 전했다.
“너희 아버지께서?”
“어. 어제 그분께서 우리 아버지를 따로 부르셨는데, 대화의 90퍼센트가 너에 대한 칭찬이셨대.”
면접일로부터 무려 나흘이나 지난 시점이었지만, 조 중장은 여전히 지난주 토요일에 있었던 태주의 인상적인 퍼포먼스에 흡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나머지 10퍼센트는?”
“나머지 10퍼센트는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 준 나에 대한 고마움이셨고.”
과외를 주선한 정웅이 자신의 명치 부근을 손바닥으로 토닥이듯이 두드리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10퍼센트씩이나? 글쎄. 내가 보기엔 한 1퍼센트면 충분한 거 같은데.”
가벼운 장난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경계심이 누그러진 태주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1퍼센트? 야,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막말로 내가 그분과의 약속을 깨고 의뢰인의 정체까지 알려 줬잖아. 주말에 전화까지 연결해 주고.”
농담인 걸 알면서도 내심 서운한 마음이든 정웅이 공치사를 하듯 자신의 공을 늘어놨다.
“알아, 알아. 10퍼센트 이상 기여한 거 다 아니까 그만 목소리 좀 낮춰. 애들이 쳐다본다.”
“음. 그래. 아무튼 내 공이 10퍼센트라는 말에 우리 아버지가 엄청 기쁘셨나 봐.”
주위를 힐끗 돌아본 정웅이 안경의 브리지 부분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심지어 장성급으로 진급하면 다 네 덕분이라고 하셨어.”
“에이, 뭐, 그 정도까지야.”
태주가 정웅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라니. 아무리 육사 출신이라도 한 기수에서 별을 달 수 있는 확률이 10퍼센트도 안 되는데. 아마 이번 기회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으셨을걸? 사실 사령관의 임기가 2년이라 내년 이맘때쯤엔 그분도 게이트작전사령부를 떠나실 거거든.”
‘어? 그럼 약장의 효력이 1년밖에 안 남은 거네?’
정웅으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된 태주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으음. 이거 성가신 녀석들이 있으면 빨리빨리 처리해야겠는데?’
물론 태주의 입장에선 약장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최선이긴 했지만.
“아아, 그렇구나. 뭐,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혹시 약장을 전달한 내용도 밝혔는지 궁금했던 태주가 조 중장으로부터 받은 선물의 존재를 숨긴 채 우회적으로 물었다.
“다른 말씀? 다른 말씀 뭐?”
“어? 아니야. 난 그냥 뭐가 더 있나 해서.”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만큼은 지나치게 솔직한 정웅의 어리둥절한 반응을 통해 약장에 대한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을 확신하던 바로 그때.
“태주야, 현우 선배한테 답장이 왔어.”
웅성거리던 멤버들의 틈에서 부리나케 뛰어온 건우가 태주의 얼굴에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