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과팅 (9)
- “더 맛있게? 어떻게요?”
진상 참가자가 태주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사장님, 혹시 주방에 캡사이신 같은 거 없어요? 아까 주신 해물 떡볶이에도 살짝 들어간 거 같던데.”
“어? 어떻게 알았지?”
사회를 보고 있던 강 사장이 태주의 물음에 흠칫 놀랐다.
“안 그래도 고추장이랑 고춧가루는 많이 넣을수록 국물이 텁텁해져서 캡사이신의 도움을 좀 빌리고 있었거든. 근데 갑자기 캡사이신은 왜?”
“아, 다름이 아니라 디핑 소스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뭐?! 디핑 소스?! 캡사이신을?!”
두 귀를 의심한 강 사장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에게 되물었다.
- “아니, 저, 저기, 시작부터 허세를 부리면 곤란한데.”
살짝 취기가 올라 있던 진상 참가자가 태주의 깜짝 제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세요? 으음. 이 정도로 허세라고 하면 좀 실망스러운데요? 매운 거 잘 드신다면서요.”
저항 스킬을 보유한 태주가 자신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은 진상 참가자를 가소롭게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정 부담스러우면 이쯤에서 맥주만 받으셔도 되고.”
- “뭐, 뭐? 부담? 제가요?”
철용을 발끈하게 했던 진상 참가자가 이번엔 태주의 도발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저기, 사장님! 여기 캡사이신하고! 나중에 끝나고 입가심하게 청양고추도 좀 갖다주세요! 빨리요!”
태주의 작전에 말려든 진상 참가자가 도리어 큰소리를 치며 무모한 기 싸움을 벌였다.
“괜찮겠어요? 허세는 그쪽이 부리고 있는 거 같은데.”
진상 참가자의 목청에 한쪽 눈을 찌푸렸던 태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 “허세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아! 아! 아, 에, 이, 오, 우!”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진상 참가자가 비장한 얼굴로 요란하게 입을 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 “저기, 사장님. 혹시 지금 기권해도 되나요?”
남은 4명의 참가자 중 한 명이 조용히 오른손을 들며 포기 의사를 밝혔다.
“네? 기권이요?”
- “네. 과자까진 어떻게든 해보려고 그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캡사이신은 좀…….”
태주와 진상 참가자를 힐끗 쳐다본 추가 포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 네. 그럼 어쩔 수 없이 세 분이…….”
- “어, 사장님, 그럼 저도 기권할래요.”
곧이어 내적 갈등을 하고 있던 또 다른 참가자가 무모한 도전을 포기한 채 테이블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네? 손님까지 기권하신다고요?”
철용의 시식에 반토막이 났던 참가자의 수가 태주의 강도 높은 제안에 또 한 번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어어, 그럼 어쩔 수 없이 1 대 1로 게임을 진행해야겠네요.”
기권만 6명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강 사장이 난감한 얼굴로 뒷덜미를 매만졌다.
“자, 그럼 저희 알바생이 캡사이신과 청양고추를 가져오는 동안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각오 한 말씀씩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의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강 사장이 블루투스 마이크를 진상 참가자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한국대 철학과 3학년, 홍규상이고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진상 참가자인 규상은 여전히 태주와의 승부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짧지만 강렬한 각오 감사합니다. 자, 그럼 이제 다음 분의 각오도 한번 들어볼까요?”
규상의 인터뷰를 마친 강 사장이 이번엔 태주에게 마이크를 옮겼다.
“네. 한국대 헌터학과 1학년, 신태주입니다. 행동이 아닌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규상과 달리 자신감의 원천이 뚜렷한 태주가 상대방의 각오를 응용하는 여유를 보이며 한 수 위임을 강조했다.
“이야, 이거 시작 전부터 아주 신경전이 팽팽한데요?”
참가자의 수는 부족해도 기대감의 측면에선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한 강 사장이 이벤트의 흥행을 예감하며 밑지는 상품 구성에 대한 위안을 삼았다.
그로부터 약 2분 후.
테이블 위엔 일회용 앞접시 2개와 과자 8봉, 그리고 캡사이신 소스와 청양고추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참고로 먼저 물을 마시는 쪽이 지는 겁니다.”
오른손에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있던 강 사장이 반대편 손으로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들어 보였다.
“알았으니까 빨리빨리 합시다! 아까부터 매운 게 너무 당겨서 침이 다 고일 지경이니까.”
기세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던 규상이 마지막까지 허세를 부리며 태주를 견제했다.
“네. 저도 준비됐습니다.”
물론 상대방의 그 어떤 자극적인 발언도 태주의 마음을 동요시킬 순 없었지만.
“야, 네가 볼 땐 어떻게 될 거 같아?”
태주의 선택이 무리수라고 여긴 세준이 확신 없는 표정으로 나리에게 물었다.
“글쎄. 근데 어떻게 되든 믿고 응원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나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부정적인 예감이 빗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주세요!”
패배의 상징인 생수병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은 강 사장이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가즈아!”
강 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렁찬 기합을 내지른 규상이 봉지 안에 든 검은색 과자 한 개를 꺼내어 일회용 앞접시 위에 내려놓은 뒤 먼저 든 캡사이신 소스를 거침없이 뿌려 댔다.
- “와아! 미쳤다!”
- “뭐야, 캡사이신을 무슨 케첩 뿌리듯이 하네?”
- “야, 케첩도 저렇게는 안 뿌려.”
- “그나저나 빨리하자고 한 이유가 있었네.”
순간, 테이블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 있던 손님들이 규상의 과감함에 감탄하며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 “야, 근데 신태주 쟤는 왜 이렇게 느긋하지?”
- “그러게. 과자 봉지 하나도 너무 정성스럽게 뜯고 있는데? 표정도 전혀 비장하지 않고.”
- “어? 혹시 상대를 엿 먹이려고 바람만 잡은 거 아니야? 저렇게 천천히 준비만 하고 있다가 상대가 먹고 괴로워하면 본인은 기권하는 뭐 그런 거.”
- “에이, 설마 본인이 하자고 그랬는데, 그런 양아치 짓을 할까?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물론 규상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태주의 실력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 또한 덩달아 높아지고 있었지만.
“어이, 거 빨리빨리 합시다.”
세팅을 마친 규상이 이제 막 앞접시 위에 과자를 꺼내놓은 태주의 곁에 캡사이신을 내려놓으며 도전을 재촉했다.
“그럼 제 것도 뿌려주세요. 공정하게.”
변명의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자신의 앞에 놓인 캡사이신을 도로 규상에게 건넸다.
“아 참, 그렇지. 공정성.”
각성자와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던 규상이 태주의 계획대로 캡사이신 소스를 대신 뿌려주었다.
“지금이라도 쫄리면 포기해요. 그쪽이라고 해서 뭐 별반 다를 건 없을 것 같은데.”
태주의 요청에 따라 동일한 조건을 만든 규상이 얼얼해진 입 안을 겨우 진정시키고 돌아온 철용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행동으로 보여 드린다더니 아까부터 계속 말만 앞서시네요.”
“네? 뭐요?”
“드시죠. 어차피 먹어보면 알 텐데.”
규상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한 태주가 캡사이신 소스에 흠뻑 젖은 문제의 과자를 한 입에 넣은 뒤 오독오독 씹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 패시브 스킬 『저항』이 발동되었습니다.
선을 넘은 매운맛을 일종의 위험으로 감지한 시스템의 반가운 메시지가 태주의 눈앞에 떠올랐다.
▶ 상태 이상(격통, 경련, 구역질, 기침, 발열, 마비, 혼란, 호흡 곤란, 지속 피해, 갈증) 공격의 대미지가 100% 감소되었습니다.
‘역시.’
패시브 스킬이 발동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얼얼하게 달아오르던 입 안이 거짓말처럼 평온해졌다.
물론 다시금 여유를 되찾은 태주와 달리 규상의 표정에선 이미 여러 가지 위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 “그러게. 분명 똑같은 걸 먹었는데 왜 한 사람만 얼굴이 터질 것 같지?”
- “심지어 신태주 쟤는 너무 맛있게 먹고 있어.”
- “뭐야, 그럼 좀 더 맛있게 먹어 보자던 말이 진심이었어?”
잠시나마 태주의 진정성을 의심했던 손님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후우. 하아. 하아.”
입술이 살짝 부어오른 규상이 정신력으로 버틸 생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치아와 혀를 검붉게 물들인 캡사이신의 위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가 저 기분을 좀 알지. 뭐, 그렇다고 해서 동정심이 간다는 건 아니지만.”
규상의 발악을 지켜보던 철용이 맥주로 입 안을 헹구며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후우. 진짜 먹은 거 맞아? 후우. 근데 왜 이렇게 멀쩡해. 하아.”
갈 곳 잃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던 규상이 태주의 멀쩡한 모습에 두 눈을 의심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맛있게 먹어 보자고.”
태주가 다른 참가자들의 몫으로 남겨둔 과자 하나를 추가로 입에 넣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나름 선방한 거니까 적당히 하고 물이나 드세요. 그러다 속 버려요.”
테이블 위에 비치된 생수병을 규상의 앞에 친절히 놓아준 태주가 더 크게 오도독오도독 소리를 내며 포기를 종용했다.
- “와아, 지금 하나 더 먹은 거야?”
- “야, 근데 너무 잘 먹으니까 왠지 맛있어 보이는데?”
-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도전할 걸 그랬나?”
- “도전은 무슨. 야, 네가 둘 중에 어느 쪽이었을 것 같냐?”
승부와는 무관한 태주의 계속된 도전에 강 사장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
“태주야, 진짜 괜찮아?”
믿고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던 나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태주의 몸 상태를 물었다.
“어. 보다시피.”
나리를 향해 돌아선 태주가 두 팔을 살짝 벌리며 덤덤하게 말하던 바로 그때.
“컥!”
헛구역질에 가까운 기침과 함께 끈적한 타액을 길게 늘어뜨린 규상이 결국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를 혼미해진 얼굴에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예! 이겼다!”
태주가 자신의 복수를 해주길 바라고 있던 철용이 규상의 포기에 환호성을 질렀다.
“자! 이번 이벤트의 승자는 신태주 학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모로 거슬리던 규상의 패배를 내심 바라고 있던 강 사장이 태주의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승리를 선언했다.
“태주야, 화장실 가서 입이라도 헹구고 와.”
눈치 빠른 나리가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생수 한 병을 태주에게 내밀며 말했다.
“고마워.”
생수를 받아든 태주가 세심한 호의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한 뒤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대결을 둘러싼 과도한 관심을 피해 자리를 피하려는 것일 뿐 굳이 입을 헹굴 필요까진 없는 태주였지만.
“태주야, 같이 갈까?”
“뭘, 화장실까지 따라와.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
태주가 뒤따라오려던 세준을 손바닥으로 막아서며 헛웃음을 지었다.
“…….”
물론 태주의 뒤를 따라붙으려는 이는 비단 세준만이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