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과팅 (8)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리의 때아닌 호들갑에 놀란 정웅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사장님이 방이 다 찼다고 양주 이벤트 하신대.”
“에이, 난 또 뭐라고. 태주야, 네 차례다.”
상품을 향한 나리의 집념에 헛웃음이 나온 정웅이 대표로 나서기로 한 태주의 등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토닥였다.
“게임의 종류는 정해졌어?”
“어. 안 그래도 지금 막 듣고 오는 길이야.”
“그래? 무슨 게임인데?”
“매운 거 먹기.”
나리가 자신의 입에 손부채질을 하며 대결 종목을 공개했다.
“매운 거 먹기?”
“어. 일명 원칩 챌린지(One Chip Challenge).”
“원칩 챌린지? 그 매운 과자 먹고 5분 동안 물 없이 버티는 거?”
인수다와 윷튜브상에서 유행 중인 위험한 도전이란 것을 아는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라도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막말로 우리가 뭐 양주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괜히 도전했다가 속만 버리면 곧 있을 중간고사에도 지장이 있을 거 아니야.”
참가를 부추긴 것으로도 모자라 태주를 찾아 나서기까지 한 나리지만, 막상 대결 종목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나니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어차피 승부를 떠나서 재미로 하는 건데 그냥 한번 나가 보지 뭐.”
물론 술롱도르 선발전에서도 그랬듯 태주에겐 저항이라는 막강한 패시브 스킬이 보험처럼 존재하고 있었지만.
“진짜? 매운맛의 척도인 스코빌 지수만 봐도 청양고추의 200배가 넘는데도?”
“뭐? 200배? 그러다 위에 구멍 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난 아까 먹은 해물 떡볶이도 좀 매운 것 같던데.”
옆에서 듣고 있던 정웅이 맛이라고 표현하기엔 정도가 지나친 매운 과자의 위험성에 혀를 내둘렀다.
“정 못 견딜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기권할 테니까 일단 내려가자. 이러다 나리 너까지 찾으러 오겠다.”
융통성 있게 행동하겠다는 말로 나리를 안심시킨 태주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
*
*
‘뭐야, 언제 이렇게 모였지?’
카운터 앞엔 이미 각 방에서 모여든 구경꾼들이 시합 테이블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태주야, 너 어디 있었어?”
태주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목격한 세준이 정웅만 불러낸 이유를 묻기 위해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냥 요 앞에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있었어.”
“그래? 근데 왜 아까 류정웅만 나오라고 했어?”
“둘이 같이 가면 또 싸울 거 아니야. 싸우지 말라고 일부러 떼어 놓은 건데.”
“어? 그럼 차라리 나만 불러냈어도 됐잖아.”
“나리가 이미 널 말리고 있었잖아. 그래서 류정웅만 불러냈지.”
과외를 수락한 것 자체가 비밀은 아니었지만,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적당히 화제를 돌린 태주였다.
“그건 그렇고, 화는 좀 풀렸어?”
“어? 어, 뭐.”
세준이 정웅이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자, 자, 이제 곧 판매가 15만 원 상당의 양주 한 병이 걸린 사장님을 이겨라 이벤트가 시작되니까 참가자만 테이블 주위로 모이고 나머지 구경꾼들은 다 뒤로 물러서 주세요.”
블루투스 마이크를 든 강 사장이 카운터 의자 위에 올라가 손님들을 내려다보며 어수선한 현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리 가게가 교도소 컨셉인 건 다들 아시죠? 주먹다짐을 하거나 기물을 파손하면 진짜 수용거실에 들어가니까 주사 부리지 마시고, 적당히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 “알았으니까 빨리빨리 합시다!”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참가자 한 명이 마이크를 쥔 강 사장보다 더 큰 목소리로 시작을 재촉했다.
“자, 그럼 성질이 급하신 분이 있는 관계로 게임의 진행 방식은 아주 간략하고 신속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을성 없는 손님의 얼굴을 슬쩍 확인한 강 사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멘트를 이어갔다.
“지금 테이블 위엔 원칩 챌린지로 유명한 죽음의 과자가 총 8개 놓여 있는데요. 참고로 8강 토너먼트가 불가능한 게임의 특성상 단 한 번의 대결로 승자를 결정하겠습니다.”
원래는 8강에서 결승까지 3번 연속으로 승리한 참가자가 강 사장과 최종 대결을 벌이는 방식이었지만, 한 개만 먹어도 응급실 신세를 질 수 있다는 과자의 위험성을 고려해 단판 승부로 규칙을 변경한 것이었다.
“어? 근데 왜 사장님은 계속 거기 계세요? 내려와서 게임 안 하세요? 단판이라면서 과자도 8개밖에 없고.”
나리가 의자 위에서 내려올 마음이 없어 보이는 강 사장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 나는 오늘 진행만 할 거야.”
본인이 생각해도 민망했던 강 사장이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네? 이벤트 자체가 사장님을 이겨라인데 사장님이 빠진다고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한 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안한데 내가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난 라면도 순한 맛만 먹어.”
강 사장의 황당한 해명에 손님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 “이야, 우리들은 뭐 속이 뒤집어져도 된다 이거야 뭐야?”
- “사장님 마인드가 참 이기적이네. 막말로 이거 먹은 애들은 어차피 이겨도 양주 대신 물만 마실 텐데.”
- “야, 이거 다들 보이콧해야 되는 거 아니야? 명색이 한국대인데, 이 정도 사리분별도 못하면 안 되잖아.”
- “아아, 나만 당한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술이 확 깨네.”
급격히 험악해진 분위기에 놀란 강 사장이 흥분한 손님들의 주먹다짐과 기물 파손을 우려해 새로운 대안을 내놓았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빠지는 대신 참가자 전원에겐 맥주 다섯 병씩을, 그리고 우승자에겐 한 병이 아닌 무려 두 병의 양주를 상품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두 병? 두 병이면 30만 원 아니야? 우리 방은 지금까지 시킨 게 다 합해서 10만 원도 채 안 되는데?”
- “근데 이런 포차에서 30만 원 이상 나오는 건 좀 힘들지 않나?”
- “그러게. 우리가 하도 뭐라고 해서 판단력이 살짝 흐려진 거 같은데?”
- “와아, 매상까지 포기한 걸 보니 진짜 먹기 싫었나 보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감행한 강 사장의 파격적인 상품 구성에 손님들의 원성이 잦아들었다.
“자, 그럼 어느 정도 협의가 이루진 거 같으니 이제 각 방의 대표자분들은 제 신호에 맞춰 도전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다들 준비되셨나요?”
- “저기, 잠깐만요. 타임!”
진행을 재촉했던 문제의 참가자가 갑자기 두 손으로 티(T) 자를 만들며 게임의 중단을 요청했다.
“으음. 빨리 진행하라고 하신 분께서 왜…….”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 강 사장이 뒤끝 있는 말투로 흐름을 끊은 이유를 확인했다.
- “아니, 가만히 보니까 이분은 그 유명한 S급 각성자인데, 우리 같은 비각성자들이랑 똑같은 조건에서 경기를 해도 되는 거예요?”
캠퍼스 내에선 이미 유명 인사가 된 태주의 얼굴을 알아본 깐깐한 참가자가 형평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저기요. 각성자라고 매운맛을 못 느끼는 건 아니거든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철용이 난데없는 공정성 논란에 발끈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뭐야, 그쪽도 각성자예요? 그럼 말로만 하지 말고 나와서 증명을 해봐요. 어차피 말하는 거나 먹는 거나 입으로 하는 건 똑같으니까.”
뭐 하나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없는 진상 참가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 봉지 하나를 들어 철용에게 내밀었다.
“와아, 인생 속고만 살았나.”
일면식도 없는 남학생의 밑도 끝도 없는 도발에 헛웃음이 나온 철용이 앞으로 걸어 나와 과자를 낚아챘다.
“오케이! 내가 먹어보고 각성자도 똑같은 사람이란 걸 보여드릴게.”
본의 아니게 도전자가 된 철용이 봉지 안에 든 검은색 과자 한 개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자, 그럼 먹습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철용의 손끝으로 집중됐다.
바삭!
철용이 과감하게 입에 넣은 검은색 토르티야 칩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어? 아직까진 괜찮나 본데? 진짜 저 사람 말대로 각성자라 매운맛에 강한 건가?”
안나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파트너인 철용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니. 저건 그냥 폭풍 전야 같은 거야.”
서비스로 나온 해물 떡볶이조차 맵다고 했던 정웅이 안나의 착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10초만 더 기다리면 반응이……, 어?”
원칩 챌린지의 후기를 본 적이 있는 정웅이 곧 있을 비극적인 결말을 예견하던 바로 그때.
“컥!”
허리가 굽어질 만큼 격렬한 기침을 토해낸 철용의 얼굴이 아시안 플러시 신드롬을 언급했을 때보다 더욱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야, 이거 뭐야! 컥!”
사레들린 사람처럼 연신 기침을 해대던 철용이 불안 증세를 보이듯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한 채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우와, 이딴 걸 돈 주고 산다고?”
초 단위로 바뀌는 철용의 적나라한 반응들.
“하아. 하아.”
입을 벌린 채 숨을 몰아쉬던 철용의 혀끝에선 끈적한 침이, 코에선 말간 콧물이, 마지막으로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고 있는 두 눈에선 후회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야 이 씨! 도저히 안 되겠다! 물! 물!”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던 철용이 결국 도전을 포기한 채 가장 가까운 방으로 허락도 없이 뛰어 들어갔다.
- “뭐, 각성자도 매운맛은 느끼나 보네. 사장님, 여기 과자 하나만 더 주세요.”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며 과자를 권했던 진상 참가자가 연기라고는 볼 수 없는 철용의 처절한 모습에 얄미운 반응을 보이며 강 사장을 불렀다.
“자, 혹시 포기하실 분 안 계신가요?”
카운터에 남은 과자를 멀리서 휙 던져준 강 사장이 다른 참가자들에게 기권 의사를 물었다.
- “저어……. 혹시 이대로 포기하면 맥주 다섯 병도 못 받나요?”
한 참가자가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리며 소심하게 물었다.
“아니요. 오늘은 그냥 서비스로 드릴 테니까 괜히 버틸 생각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포기하세요.”
- “아, 그럼 전 여기서 포기할게요.”
철용의 시범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참가자 한 명이 기권 의사를 밝히며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 “어, 사장님, 그럼 저도…….”
- “저도 그냥 맥주나 받고 말게요.”
- “아아, 나도 도저히 못 하겠다.”
자존심과 객기로 인해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참가자들이 첫 번째 기권자가 나옴과 동시에 포기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자, 이제 네 분만 남았는데, 더 이상 포기하실 분 안 계십니까?”
- “이제 없으니까 빨리빨리 합시다!”
역시나 소통이 어려운 진상 참가자가 다시 한번 시작을 재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 “각성자라고 해도 뭐 맵찔이인 건 똑같네.”
태주의 옆자리로 이동한 진상 참가자가 혼자만의 신경전을 펼치며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매운 걸 진짜 잘 먹거든요.”
물론 그 시건방진 모습이 태주의 눈엔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지만.
“아, 그래요? 그럼 좀 더 맛있게 먹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