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과팅 (5)
“널 좋아해.”
주도자를 자처한 의도가 분명했던 나리가 태주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했다.
“뭐?!”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한 태주가 황급히 귀를 멀리하며 나리를 쳐다봤다.
“뭐야, 아직 말도 안 했는데.”
태주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나리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시치미를 뗐다.
“이야, 이제 태주도 연기를 다 하네.”
조금 전 나리의 연기에 속아 벌주를 마셨던 철용의 예측이 또 한 번 빗나갔다.
“그러게. 너무 빨리 오버한 거 아니야?”
나리와 함께 철용을 속였던 정웅 역시 자신이 했던 리액션을 떠올리며 태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자, 그럼 진짜 한다.”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감쪽같이 속인 나리가 다시 태주의 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리가 장난기 가득한 사과를 태주의 귀에 숨결처럼 불어넣었다.
“그냥 자기애가 강한 사람 한 명 지목해.”
게임의 진행 자체엔 딱히 관심이 없던 나리가 벌주를 마신 아이들이 듣게 될 미션의 대용을 대충 정해 주었다.
‘엄청 적극적이네.’
태주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 이성은 많았지만, 나리처럼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이들은 없었다.
“자, 이제 시작해.”
귓속말을 마친 나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은 미소와 함께 태주의 선택을 기다렸다.
“으음.”
나리의 진심을 공론화하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둘만의 비밀로 묻어둔 채 게임에 집중했다.
“너.”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던 태주가 긴 팔을 뻗어 철용을 가리켰다.
“나?”
미션의 내용을 스포한 대가로 게임에서 배제된 철용이 생각지도 못한 태주의 지목에 화들짝 놀랐다.
“왜?”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 철용이 의아한 얼굴로 선택의 이유를 물었다.
물론 벌주를 마시기 전까진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지만.
- “뭐야, 쟤 이번 판엔 빠지는 거 아니었어?”
- “질문이 눈치 없는 사람 고르는 건가 보지.”
- “어? 난 알쓰 지목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시안 플러시 신드롬.”
- “야, 너 이번에도 또 스포하면 알지?”
직전 게임의 여파로 인해 아이들의 조롱
섞인 농담과 우려가 철용을 향해 쏟아졌다.
“야, 야, 반성하고 있으니까 1절만 해.”
검지로 한쪽 귀를 후비적거리던 철용이 주저 없이 술잔을 비운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태주야, 나 마셨다.”
빈 잔을 정수리에 거꾸로 털어 보인 철용이 태주에게 제 발로 찾아갔다.
“아니, 대체 뭔데 나를 찍은 거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은 철용이 태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던 바로 그때.
“야, 내가 무슨 자기애가 강해.”
자신이 선택된 이유를 인정할 수 없었던 철용이 억울한 표정으로 미션의 정체를 떠벌렸다.
“야 이 씨! 저 새끼 저거 상습범이네.”
벌주를 마시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세준이 철용의 반복된 스포에 짜증을 내며 먹태를 집어던졌다.
“어휴, 진짜 왜 저래. 나리야, 우리 그냥 다른 게임 하자.”
파트너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귓속말 게임을 제안했던 안나가 철용의 민폐에 혀를 내두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 어, 그래. 이번엔 뭐 할까?”
물론 고백의 기회만 엿보고 있던 나리는 안나의 제안 덕분에 사심을 채울 수 있었지만.
잠시 후.
“게임을 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마신 거 같네.”
잔을 채우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든 재룡이 테이블 위에 쌓여 가는 빈병들을 어림잡아 세어 보며 말했다.
“그러게. 지금부터 페이스를 조절해야 3차까지 가는데.”
몸에 열이 오른 철용이 결국 바람막이 점퍼를 벗으며 딱 붙는 민소매 차림을 드러냈다.
“아아, 이 자식 이거 또 시작이네. 야, 갑자기 옷은 왜 벗어. 애들 놀라게.”
철용의 옆자리에 있던 세준이 예고 없는 노출에 기겁하며 여학생들의 눈치를 살폈다.
“관리 좀 했네?”
어느 순간 마음이 떠났던 안나가 철용의 탄탄한 몸매에 흠칫하며 새침하게 물었다.
“관리? 관리는 어렸을 때부터 했지. 내가 말 안 했나? 태권도 선출이라고. 전국 체전 금메달리스트.”
오랜만에 느낀 안나의 관심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던 철용이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아아, 밖이었으면 바로 외발턴에 540도, 컨디션 좋으면 720도까지 보여주는 건데 아쉽네. 아, 그리고 나중에 노래방 가면 내가 노래하면서 발차기 하는 것도 보여줄게.”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철용이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허세 아닌 허세를 부렸다.
물론 돌아오는가 싶었던 안나의 마음은 철용의 끝없는 자기 자랑으로 인해 다시금 멀어지고 있었지만.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그냥 다른 사람한테나 보여줘.”
자기애가 강한 사람으로 철용을 지목한 태주의 보는 눈이 정확했다는 것을 깨달은 안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근데 각성자가 되면 다들 몸 관리부터 하지 않나? 우리가 실시 시험 준비하는 거처럼 헌터학과에 지원하는 애들도 거의 다 입시 학원에 다니는 거 같던데.”
이니셜이 찍힌 휴대폰 케이스를 소지품으로 냈던 최시현이 파트너인 재룡에게 물었다.
“어. 보통, 협회에서 초기 각성 판정을 받은 다음에 학원을 가는데, 거기 가면 적합한 클래스도 추천해 주고 나중에 원서 쓰는 것도 도와주거든.”
“어? 그럼 거기도 미대 입시 학원처럼 유명한 곳이 따로 있겠네?”
“있기는 있는데. 1년에 입학하는 각성자의 수가 재수생 포함해서 약 2천 명 정도라 시장 자체가 그렇게 크진 않아. 대치동이나 목동 같은 학원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재룡의 말대로 수십만 명이 응시하는 전통적인 수능 입시 학원과 달리 헌터 입시 학원의 수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럼 선택의 폭이 좁으니까 학교에 같은 학원 출신들도 있겠네?”
“어. 나는 없는데, 다른 애들은 아마 있을 거야.”
“어? 너는 왜 없어?”
“대부분의 학원이 클래스나 등급별로 반을 나누는데, 난 B급에 전사 클래스였거든. 우리 학교 애들은 거의 다 A급이고.”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재룡은 A급 법사인 방우혁의 탈락으로 인해 기적적으로 입학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모두 잠재적인 경쟁자들이라 분위기가 그렇게 화기애애하지도 않았던 거 같아. 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으론.”
“아니야. 그건 네 말이 맞아. 심지어 난 소영이하고 같은 학원, 같은 반 출신인데 하나도 안 친하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웅이 헌터 입시 학원의 분위기에 대한 재룡의 조심스러운 평가에 맞장구를 쳤다.
“소영이? 1학년 과대 주소영?”
뜻밖의 접점에 놀란 철용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어. 최원무랑 CC인 그 주소영. 걔도 A급 법사잖아.”
“와아, 근데 둘이 대화하는 걸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뭐, 직업 탐구도 같이 듣고 해서 서로 아는 척은 하는데, 그냥 딱 거기까지? 근데 그렇다고 해서 또 불편한 건 아니라.”
자발적 아싸이자 혼밥의 장인인 정웅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야, 그럼 너도 B급이니까 아는 애가 없었겠네?”
재룡과 등급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나리가 세준에게 단정적으로 물었다.
“당연히 없지. 내가 우리 학원에 있던 B급 궁수들 중에 제일 대학을 잘 갔는데. 학원 선생님들도 다 기적이라고 그랬어. 아버지 빽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아버지 빽? 아아, 맞다. 너희 아버지가 5대 길드 중 한 곳의 대표님이시지?”
풍림의 위상에 대해 알고 있던 나리가 세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5대 길드? 그럼 네가 그 큰 길드를 다 물려받는 거야?”
세준의 파트너이자 머리끈을 소지품으로 냈던 권혜윤이 대형 길드의 후계자라는 화려한 배경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아마도? 사실 내가 외동아들이거든.”
“와, 멋있다.”
“어? 멋, 멋있어?”
모태 솔로의 마음을 뒤흔든 혜윤의 한마디에 말투까지 어눌해진 세준이었다.
“어. 멋있어. 아버지께서도 되게 자랑스러워하시겠다.”
“아버지? 어, 뭐, 그렇지.”
술을 마실 때도 빨개지지 않았던 세준의 얼굴이 혜윤의 호감 표시에 귀까지 달아올랐다.
“근데 아버지는 나보다 태주한테 더 관심이 많으셔. 학교생활도 태주에 대한 것부터 물어보실 정도로.”
길드의 대표라면 누구나 공을 들일 만한 인재이긴 했지만, 영입을 위한 물밑 작업이란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서운해?”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눈치챈 혜윤이 세준의 빈 잔을 채워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아니, 뭐, 서운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신경 쓰지 마. 하하.”
자신으로 인해 무거워진 공기를 웃음으로 환기하려던 세준이 술잔을 들던 바로 그때.
“신경이 쓰이는데?”
혜윤이 의미심장한 멘트와 함께 세준의 술잔 위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듯 잔을 올리다 만 상태로 굳어버린 세준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자, 짠.”
자신의 잔을 세준의 잔에 가볍게 부딪친 혜윤이 눈을 마주친 상태로 술잔을 비웠다.
“야, 권혜윤, 너 이렇게 적극적인 애였어?”
세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감정 표현에 적극적인 것은 나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이, 임세준, 숨 쉬어, 숨.”
세준에게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철용이 세준의 코밑에 검지를 갖다 대며 장난을 쳤다.
“근데 헌터 입시 학원에서도 한국대에 가면 막 건물 외벽에 플래카드도 걸어 주고 그래?”
모두가 세준과 혜윤의 그린 라이트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안경을 소지품으로 냈던 신은진이 파트너인 정웅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당연히 해주지. 그게 가장 큰 홍보 수단인데.”
초기 각성이 랜덤이긴 해도 A급 각성자라는 것이 곧 한국대를 보장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입시 학원의 커리큘럼과 노하우가 합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여름 방학 땐 학원에 가서 특강 같은 것도 해. 입시를 앞둔 고3 후배들을 위한 선배들의 합격 노하우, 뭐, 이런 컨셉으로.”
“어? 그럼 너도 이번 여름 방학 때 특강하러 가겠네?”
“으음. 늦어도 기말 전엔 학원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뭐, 어차피 잘난 척하러 가는 거라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기만하는 것엔 자신 있었던 정웅이 안경의 브리지 부분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아아, 그렇구나. 그럼 혹시 다른 사교육은 안 받아? 원래 예체능 쪽은 따로 레슨 같은 것도 받고 그러잖아.”
“레슨? 당연히 있……. 아 참, 태주야.”
은진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정웅이 갑자기 태주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