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문제 유출 (12)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함 교수의 일방적인 돌발 행동에 당황한 것은 비단 동기들만이 아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태주가 함 교수의 태연한 거짓말에 두 귀를 의심했다.
당사자인 자신이 입만 열어도 들통 날 뻔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담을 즐기지 않는 함 교수가 중간고사 같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 장난을 칠 리 없었다.
‘일단 두고 볼까?’
해명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기에 일단은 함 교수의 의도를 헤아려보며 이후의 전개를 지켜보기로 한 태주였다.
“네? 태주가 떨어졌다고요?”
탈락 당시, 태주에게 끝까지 살아남으라 응원했던 은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함 교수에게 되물었다.
“그래.”
또 한 번 진실을 왜곡한 함 교수가 태주를 가로막고 있던 팔을 내렸다.
태주가 즉각적인 반박을 미룬 채 자신의 거동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결과였다.
- “와아, 말도 안 돼. 개강 이후 처음이지?”
- “어. 근데 태주가 떨어질 정도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거 아닌가?”
- “교수님이 작정하고 판을 짰나 보네. 태주 한번 잡아보겠다고.”
태주의 탈락 소식이 낯선 동기들이 함 교수의 유언비어에 일제히 술렁였다.
“아니.”
서윤이 수군거리는 아이들 틈에 끼어들며 말했다.
“새로 판을 짠 건 아니야. 던전의 구성이 선배들의 얘기랑 정확히 일치했거든.”
족보에 버금가는 정보를 사전에 숙지한 상태로 시험에 임했던 터라 던전의 형태가 최근 몇 년간 바뀌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어? 뭐야, 그럼 넌 뭐가 나올지 다 알고 있었다는 거야?”
정보력에서 밀린 한 아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알고 있었지. 지금껏 단 한 사람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도.”
가형 던전의 실체를 밝힌 서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태주를 향했다.
- “근데 넌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일찍 떨어진 거야?”
초반에 후방 기습으로 떨어진 게 억울했던 녀석 하나가 질문을 가장한 비아냥거림으로 서윤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까 말했잖아! 보스랑 1 대 1로 붙었다가 죽은 거라고!”
역시나 억울한 것이 많았던 서윤이 짜증 섞인 투로 해명하며 얼굴을 붉혔다.
- “이제야 좀 인간적이네. 맨날 레코드 브레이커라고 해서 아예 지는 법을 잊은 줄 알았는데.”
- “그러게. 4학년이랑 수업을 같이 들어서 그런가? 솔직히 입학만 같이 했지 동기라는 생각은 잘 안 들었잖아.”
- “뭐, 그래도 가장 늦게 떨어졌으니 실패라고 할 순 없지만, 뭔가 흠잡을 데 없던 커리어에 오점이 생긴 것 같긴 하네.”
- “사람이 항상 잘나가는 건 아니니까.”
태주의 탈락 사실에 의아해하던 아이들 중 일부가 위로라고 하기엔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잘난 동기에 대한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드러낸 것이다.
‘저것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함 교수의 거짓말에 두 귀를 의심했던 태주가 이번엔 몇몇 아이들의 예상치 못한 평가에 두 귀를 의심했다.
지난 시간까지만 해도 매직 아처의 화려한 플레이와 압도적인 결과물에 환호했던 녀석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실패를 은근히 반기며 동급 취급하려 했기 때문이다.
‘위기를 겪어 봐야 누가 내 편인지 알 수 있다더니.’
누구나 두 가지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함 교수의 거짓말로 인해 깨닫게 된 태주가 입조심을 해야 했던 녀석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이제 알았지? 다른 녀석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란히 서 있던 함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태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함 교수의 절묘한 질문 타이밍에 태주가 흠칫했다.
“그럼 설마.”
“그래. 그냥 한 번쯤 보여주고 싶었어. 나만 네 죽음을 바라고 있던 게 아니란 걸.”
오해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함 교수가 태주를 탈락자로 둔갑시킨 이유를 설명했다.
“그나저나 미끼가 좋아서 그런지 아주 덥석덥석 물던데? 씹어 대는 모양새가 다들 예사롭지 않아.”
일부 학생들의 솔직한 반응을 확인한 함 교수가 마주하고 있던 탈락자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쭉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 “야,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냐?”
- “그러게. 우리가 미끼를 물었다는 거 같은데?”
- “미끼? 무슨 미끼?”
생략된 것이 많은 태주와 함 교수의 암호 같은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이 미끼의 의미를 추측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의 흥을 깨뜨린 것 같아 미안하지만, 사실 신태주는 오늘 레이드의 유일한 생존자다.”
- “……?!”
태주의 충격적인 탈락 소식에 술렁였던 아이들이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함 교수의 정정 발표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뭐야, 좀 전에 분명 떨어졌다고 하지 않으셨어?”
- “어?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특히 자신의 본심을 경솔하게 드러낸 일부 탈락자들이 뒤바뀐 결과에 당황하며 태주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교수님, 그럼 태주가 보스몹을 잡은 거예요?”
태주의 통과 여부를 제일 처음 물었던 은재가 이번에도 역시 적극적인 자세로 테스트의 결과를 확인하려 했다.
“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대미지 없이, 아주 깔끔하게.”
- “……?!”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함 교수로부터 결과는 물론 과정까지 완벽했다는 극찬이 이어지자 무기력하게 탈락했던 아이들 모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 거지? 분명 대미지가 안 들어가는 느낌이었는데.’
함 교수의 의도대로 한계라는 벽에 부딪혔던 창민으로선 같은 S급인 태주의 무난한 클리어 사실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 “에이, 그럼 그렇지. 태주가 누군데.”
태주의 탈락을 인간적이라 비유했던 녀석이 황급히 태세 전환을 하며 뒤늦은 수습에 들어갔다.
- “하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태주가 떨어졌을 리 없지.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사람이 항상 잘나가는 건 아니라 했던 녀석은 앞선 해명에 숟가락을 얹듯 맞장구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헛웃음조차 아까운 광경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태주가 변명하기 바쁜 아이들에게 눈빛으로 경고하려 했지만, 하나같이 눈을 마주치는 족족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뒤늦게 포장할 거 없어. 질투라는 건 원래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태주의 경계심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한 함 교수가 태주의 눈치를 보고 있던 몇몇 아이들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한 질투는 상대적이기도 해. 너희들이 태주를 질투하는 건 당연하지만, 관점에 따라선, 다시 말해, A급이 되길 원하는 B급의 눈엔 S급을 향한 A급의 질투가 기만처럼 느껴질 수 있거든.”
태주와의 현격한 실력 차로 인해 잠시 망각하고 있었을 뿐, 가형 던전의 지원자 대부분은 이미 한국대 헌터학과 내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각 클래스의 실력자들이었다.
“물론 시기의 대상이라는 것은 곧 선망의 대상이란 뜻이니 질투를 받는 입장에서도 딱히 기분 나쁠 건 없지만.”
함 교수의 말대로 태주를 향한 질투심은 미움이 아닌 부러움으로부터 유발된 것이었다.
“아, 그리고 떨어진 순서가 곧 성적은 아니니까 하는 거 없이 목숨만 연명하던 인원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보정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기여도에 좌우되는 거니까.”
점수 산정 방식에 대해 설명하던 함 교수가 뒷줄에 있던 희범을 슬쩍 쳐다봤다.
‘아니, 왜 불안하게 나를 보면서 얘기하시지?’
그저 눈이 마주친 게 전부였지만, 제 발이 저린 희범의 마음속엔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했다.
“자, 그럼 난 다음 테스트가 있어서 이만.”
- “수고하셨습니다.”
시험이 종료되었음을 우회적으로 알린 함 교수가 발걸음을 돌리자 긴장이 풀린 아이들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아아, 이거 궁수들 중에 나만 A를 못 받겠네.”
태주에게 다가간 희범이 뜻밖의 선전을 한 은재를 돌아보며 자신의 미미한 활약에 대한 미련을 드러냈다.
“뭐야, A를 기대했어?”
희범의 한쪽 어깨를 짚으며 끼어든 은재가 놀라는 척을 하며 허물없는 장난을 쳤다.
“야, 너까지 이러기야? 안 그래도 묻어가는 이미지로 찍힌 거 같은데.”
자신을 바라보던 함 교수의 곱지 않은 시선이 아직도 눈에 선한 희범이 어깨를 튕겨 은재의 손을 떼어냈다.
“역시 답을 찾아냈네. 족보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었을 텐데.”
어느새 나타난 서윤이 키가 큰 태주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뭐.”
“운? 교수님 말대로 운은 내가 좋았지. 넌 그냥 실력이 좋았던 거고.”
서윤은 태주의 겸손한 대답을 믿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아무튼 처음이자 마지막 통과자가 된 거 축하해.”
“고마워. 근데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좀 이르지 않나?”
“이르긴. 저 미친 던전을 누가 또 깬다고.”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 서윤이 모의 던전의 입구를 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년에 들어오는 29기 애들도 다 보스전에서 탈락할걸? 뭐, 자존심이 상한 교수님께서 아예 문제 자체를 바꾸실 수도 있고.”
통과자가 없어 유지된 던전인 만큼 중간이 없는 함 교수의 성격상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야, 이거 한턱 쏴야 되는 거 아니야?”
서윤의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모여든 피크닉 멤버들 중 건우가 먼저 뒤풀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 낮술은 좀 그러니까 이따 저녁에 다시 모여서 가볍게 한잔하자. 어차피 내일까지 휴일인데.”
보스몹을 어떻게 잡은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던 창민 또한 참석의 의지를 밝혔다.
“주말이라 학교 앞이 북적거릴 거 같으면, 저번처럼 동방에서 마셔도 괜찮을 거 같아.”
사람이 많은 곳을 썩 좋아하지 않는 대엽이 뒤풀이 장소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어? 동방이면 저번처럼 소맥 대신…….”
술을 사랑하는 건우가 가디언 하우스에서의 신고식 뒤풀이 당시 졸업한 선배들이 채워 놓고 간 고가의 술들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근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중간고사 기간인데, 시험 첫날부터 술을 마셔도 되나?”
고지식한 면이 있는 유리는 내일모레 있을 직업 탐구1의 클래스별 테스트를 대비하기 위해 컨디션을 조절할 생각이었다.
“야, 유리야, 창민이 말 못 들었어? 그냥 우리끼리 가볍게…….”
머릿속이 이미 고가의 양주로 가득 찬 건우가 유리의 마음을 돌리려던 바로 그때.
“아, 미안. 내가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뭐? 선약? 무슨 선약?”
축하의 대상이자 뒤풀이의 명분이라 할 수 있는 태주의 불참 선언에 건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