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문제 유출 (9)
‘시간이 약점이라고?’
태주의 머릿속에 전송된 데이터엔 남은 힘을 쥐어짜 변이를 마친 보스몹의 체력이 5분 후 고갈돼 저절로 쓰러질 것이라 일러주고 있었다.
‘그럼 공격에 힘을 뺄 게 아니라 적당히 싸우는 척하면서 시간만 끌면 되겠네.’
진단과 동시에 해법을 마련한 태주가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자연스러운 연기를 시작했다.
쉬이익!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보스몹을 향해 선제공격을 가하며 협공 분위기를 조성한 태주가 궁수 클래스의 장점을 살려 안전거리부터 확보했다.
‘역시 소용이 없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첫 발로 목을 노려봤지만, 1페이즈 때와는 달리 화살이 관통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보스몹의 위협적인 외형에 잠시 주춤했던 건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겁 없이 돌진했다.
“스피어 콤비네이션(Spear Combination)!”
그리고 이어진 복싱 선출 무투가의 창으로 찌르는 듯한 5연타 펀치.
슉! 슈! 슈! 슈! 슉!
화려한 스텝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내지른 주먹이 증강 현실로 구현된 보스몹의 몸을 빠르게 들락거렸다.
물론 실제 상황이었다면, 몬스터의 단단한 외피로 인해 건우의 주먹에도 적지 않은 충격이 가해졌겠지만.
‘이대로 A+까지 간다!’
태주가 자신을 엄호해 주고 있다는 든든함에 자신감이 생긴 건우가 보스몹의 공략 포인트를 모른 채 무의미한 공격을 이어가던 바로 그때.
쿠웨에에엑!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괴성을 토해낸 보스몹이 갈고리처럼 길고 날카롭게 변한 왼손을 건우의 몸에 엑스(X) 자로 휘둘렀다.
[몬스터로부터 심각한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누적된 피해가 한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
공격 포인트를 쌓고 있다는 생각에 체중이 실린 타격을 신나게 날리고 있던 건우가 단 한 번의 반격으로 뜬 야속한 문구에 할 말을 잃었다.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어? 뭐야, 설마 죽은 거야?”
보스전에 가세하려던 희범이 주먹질을 멈춘 건우의 경직된 뒷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 변신하기 전에도 이미 한 방 컷이었는데.”
섣부른 접근을 경계하고 있던 대엽이 서윤이 나간 비상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어떡하지?”
체력이 깎이는 속도가 힐의 속도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 유리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창민에게 물었다.
“글쎄. 이제 남은 원딜은 세 명밖에 없어서.”
근딜만으로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창민이 생존자들의 구성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그 세 명 중 한 명이 태주라 약간의 기대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보스전의 핵심 클래스인 은재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력상의 열세를 걱정하고 있는 창민의 부정적인 전망을 조심스럽게 부정해 보았다.
쿠웨에에엑!
피크닉의 신입 부원 두 명을 연속으로 제거한 보스몹이 미처 흩어지지 못한 학생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어! 온다!”
변이 전보다 확연히 빨라진 보스몹의 움직임에 당황한 창민이 동기들에게 위협을 알리며 황급히 몸을 피했다.
물론 점멸 스킬이 없는 아이들에겐 속도와 리치에서 앞선 보스몹의 맹공을 5분 가까이 버틸 재간이 없었지만.
*
*
*
같은 시각, 통제실 안.
“역시나 속절없이 죽어나가네요. 아직 2분도 채 안 지났는데.”
생존자들의 고군분투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 과장이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매년 이쯤에서 마무리 됐는데.”
간파 스킬의 도움 없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사악한 설정을 해둔 함 교수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태주는 아직 쌩쌩하네요. 유일하게 대미지를 입은 적도 없고.”
이 과장이 100퍼센트로 표시된 태주의 체력 게이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혹시 모를 반전을 기대해 보았다.
“한계에 다다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쌩쌩하겠지.”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함 교수가 태주를 향한 이 과장의 한결같은 응원에 헛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 표정을 확대해 봐.”
“네? 표정을요?”
이 과장이 태주의 동선을 쫓고 있던 CCTV의 줌 기능을 작동시켰다.
“네, 했습니다.”
“어때. 뭐 느끼는 거 없어?”
함 교수가 퀴즈를 내듯 화면 가득 태주의 얼굴을 마주한 이 과장의 솔직한 감상을 물었다.
“글쎄요. 표정만 봐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그래? 좋아. 그럼 이제 다른 녀석들 중에 아무나 잡아서 확대시켜 봐.”
“아무나요?”
고개를 갸웃거린 이 과장이 태주와 같은 S급 각성자인 창민의 얼굴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줌을 당기던 바로 그때.
“……?!”
멀리서 전체적인 양상만 지켜봤을 땐 몰랐던 응시자의 적나라한 몰골을 마주한 이 과장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함 교수를 쳐다봤다.
“이거 생각보다 차이가 심각한데요?”
얼굴은 물론 앞머리까지 땀에 젖은 창민과 달리 태주의 피부는 지금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뽀송뽀송한 상태였다.
“다른 응시자들도 마찬가지인지 한번 확인해 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네. 그럼.”
함 교수의 허락을 구한 이 과장이 대엽과 은재의 모습도 한 번씩 확대해 보았다.
질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이는 지친 눈빛과 가슴의 들썩임이 육안으로 보일 만큼 거칠어진 호흡, 거기에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워진 두 다리와 극심한 체력 소모로 인해 무너진 신체적 밸런스까지.
표정만으로는 어떠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태주와 달리 다른 아이들의 모습에선 하나같이 위기감만 드러나고 있었다.
“역시 예외는 없었네요.”
비교를 마친 이 과장이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태주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근데 이 정도면 2페이즈도 무난하게 버티겠는데요?”
어느덧 절반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확인한 이 과장이 궁수의 긴 사거리를 이용, 보스몹의 공격 범위 밖에서 유리한 싸움만 펼치고 있는 태주의 영리한 플레이에 유례없는 클리어를 확신했다.
“당연히 버텨야지.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는데.”
태주가 여전히 사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함 교수가 한계에 봉착한 태주의 일그러진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아아!”
좀처럼 흥분하는 법이 없는 창민이 탈락의 아쉬움에 고개를 젖히며 소리쳤다.
개인적으로는 태주와 함께 최후의 2인으로 남고 싶었지만, 전사라는 클래스적 한계로 인해 민첩성을 앞세워 치고 빠지기만 하고 있는 A급 어쌔신 대엽과 보스몹의 근처에도 안 가고 있는 A급 궁수 은재보다 먼저 떨어졌다는 사실이 S급 각성자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 죽는 거야!”
물론 탈락이 미루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
양손에 쥔 단검을 적의 아킬레스건과 오금에 연거푸 찔러 넣던 대엽이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보스몹의 사기적인 피지컬에 참아 왔던 불만을 쏟아냈다.
쿠웨에에엑!
마지막 1분의 시간을 남긴 보스몹이 아슬아슬한 게릴라전을 마친 뒤 달아나는 대엽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런 씨!”
갈수록 스피드가 떨어지고 있던 대엽이 굴욕적인 토끼몰이를 시작한 보스몹의 광기 어린 움직임에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슈우우왕!
성가신 모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듯 보스몹이 휘두른 모닝 스타의 날카로운 쇠공이 대엽의 허리 밑을 그대로 통과했다.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이제 남은 인원은 단 둘.
“…….”
대엽의 탈락을 목격한 태주와 은재가 약속이라도 한 듯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돌아봤다.
▶ 스킬 『도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물론 눈빛을 교환하는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은재는 모르고 있었지만.
▶ 3초간 바라본 대상(들)이 도발 상태에 빠집니다.
은재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던 태주가 보스몹과의 1 대 1 대결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그로를 집중시켰다.
‘수고했어.’
물론 태주의 조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최후의 2인으로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얻게 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은재의 입장에선 불과 몇 십초 앞당겨진 죽음을 가지고 서운하다 여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 스킬 『도발』이 발동되었습니다.
쿠웨에에엑!
서윤을 시작으로 무려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보스몹이 스킬의 발동과 동시에 이명이 생길 듯이 포효하며 은재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
쉬이익!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사된 은재의 마지막 화살을 가볍게 무시한 보스몹이 무시무시한 모닝 스타를 휘둘러 자신의 8번째 제물을 취했다.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와아, 빡세다.”
후회 없는 레이드를 펼쳤다는 생각에 오히려 속이 후련해진 은재가 활을 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보스몹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태주를 향해 소리쳤다.
“태주야, 파이팅! 끝까지 살아남아!”
“…….”
뜻밖의 응원을 받게 된 태주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전 준비가 됐습니다.’
퇴장하는 은재의 가벼운 발걸음에 도발 스킬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던 태주가 가까운 CCTV를 올려다보며 함 교수를 향한 무언의 신호를 보내던 바로 그때.
[짝! 짝! 짝!]
마지못해 치는 것이 느껴지는 느린 박자의 박수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으음?’
때아닌 박수 소리에 두 귀를 의심한 태주가 소통을 시도하려는 듯한 함 교수의 예사롭지 않은 제스처에 다시 한번 CCTV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진 예상대로 흘러갔어. 그렇지?”]
족보의 내용이 2페이즈까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함 교수가 정보의 절대적인 우위를 앞세워 여유 아닌 여유를 부렸다.
[“근데 지금부턴 좀 까다로워질 거야.”]
물론 간파 스킬을 보유한 태주의 입장에선 족보와 같은 공개적인 출처 없이도 함 교수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러니까 준비한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봐. 뭐,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결국 최선을 다하게 되겠지만.”]
함 교수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태주를 노려보고 있던 보스몹이 괴성을 지르며 힘없이 고꾸라졌다.
쿠웨에에엑! 철퍼덕!
‘진짜 5분 정도 되니까 알아서 쓰러지네.’
A+를 이미 확정 지은 태주가 성적과는 무관한 함 교수와의 자존심 대결을 위해, 그리고 지난 3년간 배출되지 못한 가형 던전의 유일무이한 통과자가 되기 위해 본능적으로 활을 세웠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버티기 싸움인가?’
3페이즈의 형세를 예측해 보던 태주가 반경 20미터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간파 스킬의 발동을 위해 보스몹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던 바로 그때.
“……?!”
바닥에 엎어져 있던 보스몹의 등가죽이 무언가 튀어나올 것처럼 들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