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문제 유출 (8)
“왜 아무 말이 없어?”
단호한 표정의 대엽이 생각이 많아진 서윤의 대답을 재촉했다.
“알았어. 할게. 내가 뭐 무서워할 줄 알고?”
자존심 강한 서윤이 대엽의 제안을 홧김에 받아들였다.
- “이야, 괜찮겠어?”
보스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생존자 중 한 명이 서윤의 결정에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괜찮지. 아, 그냥 지금부터 내가 앞장설게. 됐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던 서윤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대엽을 짜증 섞인 눈빛으로 흘겨보며 물었다.
“어. 됐어.”
어찌된 영문인지 매사에 소극적이었던 대엽이 자신을 쏘아보는 서윤의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둘이 친했나? 아니, 왜 가만히 있다 갑자기 편은 들고 난리야.’
대엽이 태주에게 친형에 대한 참교육을 부탁할 만큼 특수한 관계임을 모르는 서윤의 입장에선 대엽의 태도 하나하나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주엽 선배만 아니면 진짜 가만 안 두는 건데.’
물론 대엽과 주엽의 사이가 남보다 못할 때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피크닉의 25대 회장인 주엽의 눈치가 보여 성질을 죽이는 일도 없었겠지만.
“왜 그랬어.”
대엽에게 다가간 태주가 어느새 멀어진 서윤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태주의 물음에 멋쩍은 미소를 지은 대엽이 서윤의 뒤를 쫓아 걸음을 재촉했다.
*
*
*
잠시 후.
중후반에 이루어진 두어 차례의 교전을 별다른 희생 없이 끝마친 9명의 생존자들이 거대한 문 앞에서 지친 몸을 멈춰 세웠다.
“후우. 여기가 끝인 거 같은데?”
불규칙해진 호흡을 고르던 건우가 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게. 거인이 드나들기엔 딱이네.”
역시나 문을 올려다보던 창민이 보스몹의 크기를 떠올리며 건우의 예감에 동조했다.
“…….”
보스전을 앞둔 대엽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서윤을 향했다.
“안 그래도 가려고 그랬거든?”
대엽과 눈이 마주친 서윤이 한쪽 어금니를 깨물며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못 하겠다고 해.”
대엽이 선심을 쓰듯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 주었지만, 서윤의 성격상 동기들이 보는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뭐? 야, 너 지금 장난하냐?”
꼬일 대로 꼬인 계획에 예민해져 있던 서윤이 대엽의 말에 발끈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
“어휴, 저걸 진짜……. 야, 비켜. 내가 일 번이니까.”
대엽이 말없이 어깨만 으쓱이자 약이 바짝 오른 서윤이 문 앞에 서 있던 창민과 건우를 양옆으로 밀치며 보스의 방으로 들어섰다.
*
*
*
쿠오오오!
원형으로 이루어진 투기장 정중앙에 자리 잡은 보스몹이 자신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 겁 없는 침입자를 향해 죽일 듯이 포효했다.
‘이런 씨. 그새 더 커진 거 같네.’
홀로 마주한 적의 위압감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실감한 서윤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동기들의 시선에 뒤통수가 뜨거워 함부로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지만.
‘아까 태주가 어디를 때렸더라.’
아이러니하게도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자신이 깎아내렸던 태주의 공격 루트부터 떠올리며 보스전을 대비하는 서윤이었다.
“혼자서 괜찮을까?”
서윤의 외로운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유리가 금방이라도 달려가 힐을 해줄 것 같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주에게 물었다.
“글쎄. 설령 안 괜찮다고 해도 지금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겉으론 리스펙트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태주 역시 보스몹과의 1 대 1을 제안한 대엽과 마찬가지로 질투심이 불러온 서윤의 경솔한 결정이 한 번쯤 후회로 남길 바라고 있었다.
탁!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성과 탄력으로 응사자들을 놀라게 했던 최종 보스가 다시 한번 제자리멀리뛰기를 연상케 하는 도약으로 서윤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슈우우왕!
가뜩이나 긴 리치에 손잡이까지 길다 보니 모닝 스타를 휘두르는 타이밍 또한 서윤의 예상보다 눈에 띄게 빨랐다.
“실드!”
황급히 내뱉은 방어 주문이 모닝 스타에 달린 가시보다 먼저 서윤의 앞에 생성됐다.
[몬스터로부터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뭐야! 이런 기본적인 실드론 부족하다는 거야?!’
앞선 졸개들과의 전투 때와는 달리 보스몹이 휘두른 물리 공격엔 실드의 성능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물론 실제 상황이었다면, 실드가 깨지면서 시전자의 몸까지 모닝 스타의 가시에 찢겼겠지만.
‘이거 방어만으로는 답이 없겠는데?’
실드의 무력화로 마음이 조급해진 서윤이 즉각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파이어 볼!”
서윤의 손바닥 앞에 나타난 축구공 크기의 불덩이가 보스몹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화르르!
‘맞았다!’
파이어 볼이 증강 현실로 구현된 보스몹의 가슴 부근을 통과하긴 했지만, 워낙 몸집이 크다 보니 축구공이 아닌 야구공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쿠오오오!
목과 겨드랑이가 약점인 것까진 몰랐던 서윤의 무난한 공격이 끝나기 무섭게 보스몹이 내리친 모닝 스타가 서윤의 머리 위로 피할 틈도 없이 떨어졌다.
슈우우웅!
[몬스터로부터 심각한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
[누적된 피해가 한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두 번째 일격과 동시에 서윤의 시야를 가린 달갑지 않은 문구들.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하아. 쪽팔리게 이 씨…….”
6명의 피크닉 멤버들 중 첫 번째 탈락자가 된 서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패배.
동기들을 돌아보는 것조차 민망해진 서윤은 탈락 이후에도 한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야, 저거 누가 가서 데려와야 되는 거 아니야?”
팔짱을 낀 채 구경하고 있던 희범이 보스몹의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서윤의 무기력한 뒷모습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갈게.”
“아니,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도와주는 걸걸?”
대엽이 서윤을 향해 달려가려는 유리의 앞길을 팔로 가로막았다.
“하긴, 서윤이 성격상 어설픈 위로보단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게 더 낫긴 하겠네. 괜한 불똥도 피할 수 있고.”
서윤의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아는 건우가 대엽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저기 온다.”
기다리자는 여론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유리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대엽의 팔을 내리며 말했다.
“어, 나도 봤어.”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서윤의 착잡한 표정을 본 대엽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중을 나갔다.
“수고했……?!”
물론 불똥을 걱정했던 건우의 우려대로 대엽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던 서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마치 증강 현실로 구현된 NPC를 대하듯 냉정하게 스쳐 갔지만.
“교수님 말이 사실이었네.”
태주의 앞에 멈춰 선 서윤이 대기실 앞에서 나눈 함 교수의 대화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운이 아닌 실력이란 걸 꼭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데.”
CCTV가 있는 곳을 슬쩍 올려다 본 서윤이 스스로 날려버린 기회를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자책했다.
“증명할 게 뭐 있어. 너만 떳떳하면 됐지.”
“말이라도 고맙네. 근데 오늘은 내가 봐도 떳떳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온 주제에 질투나 하고.”
건우의 말대로 어설픈 위로는 자존심 강한 서윤에게 역효과였지만, 위로를 건네는 상대가 태주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맷집이 약하다고 했던 말 취소할게. 뭐, 본의 아니게 죽음으로 사죄하는 꼴이 됐지만.”
태주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전한 서윤이 고글을 들어 보이며 머쓱하게 웃은 뒤 비상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자,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인가?”
서윤의 쓸쓸한 퇴장을 바라보던 건우가 어깨를 돌리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아까처럼 포위하는 형태로 넓게 넓게 퍼지면 되겠지?”
검 끝을 세운 창민이 동기들에게 전투 대형을 상기시키며 적당한 위치를 물색했다.
“아까처럼 포위하는 것보단 아까처럼 태주 혼자 잡는 게 더 빠를걸?”
태주에 대한 의존도가 눈에 띄게 높은 희범이 농담을 가장한 진담으로 떠보듯이 말했다.
물론 중간고사 자체가 개별 평가인 만큼 가장 높은 난이도인 가형 던전의 보스전까지 도달했다 해도 킬수나 기여도에 따라 좋지 못한 점수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 스킬 『간파』가 발동되었습니다.
‘아직은 2페이즈가 아니라 변동 사항이 없네.’
동기들이 전투 준비로 분주한 사이, 보스몹이 자신의 반경 20미터 안으로 들어오도록 접근한 태주가 3초간의 응시를 통해 또 한 번 적의 약점을 파악했다.
‘그럼 일단 선배들이 죽은 이유부터 알아볼까?’
쉬이익!
보스몹의 목을 향해 체이싱 애로우 한 발을 날린 태주가 앞점멸을 이용해 적의 오른편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보스몹을 솔플로 잡아 포인트를 독식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2페이즈에서의 공격 패턴이나 3페이즈의 가능성 등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시선을 분산시켜 줄 동료들의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쿠오오오!
화살이 목을 관통하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보스몹이 모닝 스타를 쥔 오른팔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강력한 스윙 공격을 준비했다.
‘그렇지.’
물론 겨드랑이를 오픈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한 태주의 입장에선 예측 가능한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쉬이익!
모닝 스타가 허공을 가르기 전에 두 번째 화살을 발사한 태주가 보스몹의 공격 범위 밖으로 재빨리 벗어났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쿠오오오!
프로그래밍 된 체력이 순식간에 바닥난 보스몹이 군더더기 없는 스나이핑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 잡았다!”
보스의 각성 여부를 모르는 희범이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클리어를 자축했다.
물론 족보의 수령인인 태주와 가형 던전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나머지 한 명의 생존자는 조금 전보다 더욱 긴장된 얼굴로 보스몹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어? 근데 왜 아직 종료 문구가 안 뜨지? 몬스터도 그대로고.”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희범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보스몹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뭔가 찝찝한데?”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은재가 마른침을 삼키며 화살 한 발을 꺼내 들던 바로 그때.
쿠웨에에엑!
좀 더 날카로워진 괴성과 함께 바짝 고개를 쳐든 보스몹의 거대한 몸뚱이가 외적인 변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텅! 텅!
몸을 군데군데 보호하고 있던 판금 갑옷들이 요동치는 근육으로 인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뭐, 뭐야, 저거!”
전투 의지를 가시게 만드는 위협적인 생김새에 압도당한 희범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본 게임은 지금부터구나.’
단 한 명의 생존자도 허락하지 않았던 최종 보스의 악명 높은 실체를 확인한 태주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간파 스킬을 발동시켰다.
‘으음?!’
물론 보스몹의 외형에 놀란 동기들과 달리 태주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간파 스킬이 알아낸 녀석의 독특한 약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