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문제 유출 (7)
‘생존 미션 때도 그렇고 어떻게 몬스터의 급소만 정확히 노렸지?’
한계에 부딪힐 만큼 최선을 다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준비한 시련을 손쉽게 헤쳐 나가는 태주의 플레이가 얄미웠던 함 교수가 족보에도 없는 정보마저 꿰뚫고 있는 듯한 놀라운 센스에 강한 의문을 품었다.
“교수님,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세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이 과장이 함 교수의 어두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누가 미리 알려줬나?’
문제를 유출한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함 교수의 시선이 프로그래머인 이 과장에게로 옮겨졌다.
‘어? 잠깐. 혹시 이원식 과장이 범인 아니야?’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지만, 태주에게 유독 호의적인 것도 그렇고, 모든 직장인이 기피하는 주말 근무까지 자처해 가며 태주의 플레이를 직관한다는 것 자체가 함 교수의 의심을 사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세요?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함 교수의 눈빛이 유달리 곱지 않다는 것을 느낀 이 과장이 자신의 언행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없어 그런 거.”
물론 의심은 자유라도 생사람을 잡을 순 없었기 때문에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속단을 자제하며 우회적인 대화를 시도할 작정이었지만.
“아, 네.”
잠시나마 함 교수의 눈치를 봤던 이 과장이 예상에서 벗어난 싱거운 대답에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말이야 이 과장.”
“네, 교수님.”
끝난 줄 알았던 함 교수의 의미심장한 부름에 흠칫한 이 과장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 과장이 태주를 처음 본 게 월요일이라고 했지?”
“네. 올 들어 가장 인상적인 월요일이라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날 이후로 태주를 본 적은 없고?”
문제의 유형이 지난 3년간 동일했던 만큼 마음만 먹으면 월요일과 토요일 사이에 충분히 언질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네. 이렇게 직간접적으로 만난 건 오늘이 두 번째입니다.”
“사적으로 연락한 적은?”
“아니요. 그냥 인사만 나눈 사이라 따로 번호를 주고받은 적은 없습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순간, 추궁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이 과장이 질문의 의도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과장이 원래 학생들 칭찬을 안 하잖아. 별로 관심도 없었고.”
“네? 아, 네. 그랬었죠.”
“근데 요 며칠 사이에 부쩍 태주에 대한 칭찬만 입에 달고 사는 거 같아서.”
“아아, 그거요. 뭐, 안 하던 짓이긴 한데, 저도 모르게 입이 근질거려서 그만.”
평소와 달리 태주로부터 받은 신선한 충격을 동료들에게 열심히 공유하고 다녔던 이 과장이 함 교수의 구체적인 지적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솔직히 태주가 남다른 건 교수님께서도 인정하시잖아요. 아, 매주 보셔서 좀 무감각해지셨나?”
“무감각?”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온 함 교수가 태주에 대한 팬심을 단단히 드러낸 이 과장의 뚜렷한 주관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성장이 정체되질 않는데 무감각해질 틈이 있나. 매주 봐도 늘 새로울 따름이지.”
“그렇죠? 몬스터를 유인해 적진에서 터뜨린 것도 일품이었지만, 멀리 있는 동료를 미끄러지게 해서 구한 것도 진짜 대박이었습니다. 중간 보스를 단 두 방에 쫓아낸 거야 뭐 말할 것도 없고요.”
‘뭐지? 이 과장이 유출한 게 아닌가?’
증거가 될 만한 꼬투리를 찾고 있던 함 교수가 연막을 위한 연기라고는 볼 수 없는 이 과장의 순수한 반응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래. 하나같이 놀랍긴 하지. 근데 말이야. 상식적으로 5미터나 되는 거인의 신체 중 목과 겨드랑이만 노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으음. 글쎄요. 목이야 원체 급소라는 인식이 있지만, 겨드랑이를 1순위로 노렸던 학생은 잘 떠오르지 않네요.”
이 과장이 모든 수업과 훈련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흔한 케이스가 아니란 건 단언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확률이 희박하다는 거겠지?”
“네. 하지만 태주에게 있어 확률적인 데이터는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왜지? 확률과 데이터를 중시하는 쪽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이과 출신인 자네인 거 같은데.”
함 교수가 프로그래머의 업무 처리 방식과는 거리가 먼 이 과장의 이해할 수 없는 견해에 처음으로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그 또한 그랬었죠. 물론 그런 제 가치관마저 의심하게 만든 게 바로 태주였지만.”
“좀 더 쉽게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함 교수가 듣고 싶은 건 이 과장의 주관적인 입장이 아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였다.
“이미 영상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안개 속에 숨은 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잡아내고, 폐까지 얼어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극한의 추위에도 동상은커녕 어깨조차 움츠리지 않을 수 있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요?”
“많진 않겠지.”
“네. 아주 극소수일 겁니다. 문제는 그 극소수의 인원들 중에서도 유독 태주에게만 희박한 확률이 반복되고 있다는 거지만.”
“우연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건가?”
“우연도 반복되면 실력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우연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그 반복된 우연의 원인을 찾고 있는 거고.”
“그렇다면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계신 거네요.”
“뭐?”
“우연의 원인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그럼 반복된 우연 중 하나인 겨드랑이나 안개에 집착할 게 아니라 우연의 시작점부터 살펴보셨어야죠.”
“우연의 시작점이라…….”
이 과장의 귀띔을 곱씹어 보던 함 교수가 수수께끼를 풀 듯 의욕적으로 답했다.
“그럼 입시 당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네. E급에서 하루아침에 S급이 된 것도, 평범한 궁수에서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가 된 것도 다 그때 일어난 일이니까.”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함 교수의 추측을 긍정한 이 과장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물론 그 모습 또한 함 교수의 눈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근데 이상하네.”
“뭐가 말입니까?”
“정작 힌트를 준 사람은 별로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아서.”
“네. 별로 궁금하진 않습니다.”
“왜지?”
“교수님 말씀대로 제가 이과 출신이라 그런지 딱 떨어지는 답이 없는 문제엔 흥미가 안 생겨서요.”
“답이 없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럼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게이트가 열린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거든요.”
“……?!”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착각하고 있던 함 교수가 이 과장의 차분한 논리에 말려들었음을 직감했다.
“게이트가 생성되는 원인도, 각성자가 생겨나는 원인도, 초기 각성의 등급이 랜덤인 원인도 모두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잖아요. 심지어 교수님조차 본인이 선택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게 현실이고요.”
“그래서. 어차피 모를 거 알려고도 하지 말자. 이 말이야?”
“태주의 능력을 탐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알아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제가 교수님이라면, 저런 훌륭한 제자를 가르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울 것 같은데.”
“내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마치 사리사욕의 도구처럼 묘사하고 있군.”
“아,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불쾌해. 아주 많이. 하지만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 아니겠나?”
놀랍게도 이 과장의 주제넘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함 교수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이 과장 말대로 입시 당일에 일어난 유례없는 2차 각성의 진실은 밝혀낼 수 없겠지. 하지만.”
이 과장의 의견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가 싶었던 함 교수가 ‘하지만’에 힘을 주며 태주의 잠재력에 대한 계속적인 탐구 의지를 드러냈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눈치야. 한 번도 공개한 적은 없지만, 법사가 주문을 외듯 위기의 순간마다 사용하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스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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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중후반으로 접어든 가형 던전 안.
“태주야,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태주의 도움으로 탈락 위기에서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유리가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게. 나도 한 번 더 부탁해 친구.”
이미 한차례 목숨을 구제받은 바 있는 희범이 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글쎄. 좀 전에 보니까 화살이 안 닿을 것 같던데?”
태주가 누구보다 멀리 도망쳤다 돌아온 희범의 염치없는 부탁에 일침을 가했다.
“어? 내가 그랬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직무 유기 사실에 얼굴이 화끈해진 희범이 태주의 등을 토닥이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튼 대단해. 그 거대한 몬스터를 고작 화살 두 발로 쫓아내고.”
궁지에 몰린 희범이 태주를 칭찬하는 방식으로 화제를 전환하며 보스몹이 달아난 방향을 돌아봤다.
“내 말이. 표현은 안 해도 태주가 순간순간 보여준 이타적인 플레이가 본인들의 성적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건 다들 부정할 수 없을걸?”
이번엔 은재가 나서서 생존자 개개인의 학점에 대한 태주의 지분에 대해 콕 집어 강조했다.
물론 이타적으로 비친 태주의 쉽지 않은 결단들 중 타인을 위해 오롯이 위험만을 감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하긴, 나도 처음엔 나형을 택할 걸 그랬나 싶었는데, 그나마 태주 덕분에 이 뭣 같은 던전에서도 A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것 같긴 해.”
전체 수강 인원 중 단 20% 내외만 받을 수 있는 A학점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고 여긴 건우가 은재의 의견에 동의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나저나 왜 싸우다 말고 도망쳤을까? 그 정도 파워에 스피드까지 겸비했으면, 여기 있는 생존자들 중 최소 3분의 1은 데리고 갔을 텐데.”
적의 상황 판단을 납득할 수 없었던 창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도주의 이유를 헤아려 보았다.
물론 갑자기 줄행랑을 친 몬스터가 잠시 후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이유 있는 고민이었지만.
“생각보다 맷집이 약했나 보지.”
보스몹의 등장 패턴을 알고 있는 서윤이 창민의 진지한 추측에 성의 없이 대꾸하며 태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래? 그럼 다음번엔 너 혼자 상대해 보는 게 어때?”
웬만해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대엽이 태주의 활약을 깎아내리는 듯한 뉘앙스에 발끈하며 도발적인 제안을 건넸다.
“뭐?”
“네가 지금 그랬잖아. 맷집이 약한 것 같다고. 그럼 당연히 태주의 도움 없이도 혼자 상대할 수 있어야지. 안 그래?”
“……?!”
보스몹이 갈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서윤이 안중에도 없던 대엽의 생각지도 못한 참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