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문제 유출 (6)
‘혼란스러울 때만 슬쩍 나타난다더니.’
쉬이익! 화르르!
족보 속에 기술된 공벌레의 특징을 떠올린 태주가 차징을 마친 두 번째 화살을 발사하던 바로 그때.
“……?!”
폭발음에 신경을 빼앗긴 태주의 머리 위로 짐 볼처럼 생긴 검은 물체가 자유 낙하를 하고 있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쿵!
공처럼 튀어 오를 것 같은 생김새와 달리 천장에 난 구멍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검은 물체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안착했다.
‘너구나. 그 공벌레가.’
폭발음의 원인이자 함 교수의 두 번째 함정인 자폭 몬스터를 마주한 태주의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쉬쉬쉬쉬쉬쉬!
울음소리인지 발소리인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던 공벌레가 롤링 어택을 하듯 태주를 향해 빠른 속도를 굴러오기 시작했다.
쉬이익!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반복된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몸에 부딪혔을 때뿐만 아니라 죽여도 폭발한다는 사실을 체화하고 있던 태주가 화살을 발사함과 동시에 광역 딜의 예상 범위로부터 최대한 멀리 벗어났다.
펑!
‘저 정도였구나.’
공벌레의 피해 범위를 육안으로 확인한 태주가 광역 딜을 역이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적의 화살 세례를 회피했다.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저걸 적진에서 터뜨릴 수만 있다면.’
노림수 하나를 준비한 태주가 파이어 애로우의 화염 효과로 뚫어 놓은 길을 따라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으음?’
다시 한번 연속적인 점멸로 순식간에 적진을 돌파한 태주가 고글을 벗은 채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3명의 탈락자를 목격했다.
‘첫 번째 자폭 때문인가?’
공교롭게도 3명 모두 황건우의 의견에 따라 한 몸처럼 움직이던 응시자들이었다.
‘하긴,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서로의 퇴로를 막는 격이니 갑자기 나타난 공벌레의 돌진에 피할 길이 없었겠지.’
공벌레를 볼링공에, 응시자를 볼링 핀에 비유해 봤을 때, 롤링 어택에 의한 자폭 공격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남아 있는 핀들의 간격이 먼 스플릿 상황을 유도해 깔끔한 스페어 처리가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희범이 형이 용케 살아 있는 거고.’
기본기가 탄탄한 은재와 달리 영 미덥지 않던 희범이지만, 태주의 지시에 따라 개별적으로 움직인 덕분에 걸리적거리는 동료 없이 무탈하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얘들아! 자폭하는 몬스터가 있으니까 조심해!”
오늘따라 유독 리더십이 폭발한 황건우가 공벌레의 특성을 파악한 뒤 모두에게 경고했다.
“그래! 누구든 공처럼 생긴 놈을 보면 무조건 소리쳐!”
이번엔 전투에 여념이 없는 허창민이 동기들을 돌아볼 틈도 없이 허공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남은 인원은 태주를 포함해 10명.
세부적으로는 피크닉의 멤버 6명과 태주가 살려둔 2명의 궁수인 은재와 희범, 그리고 족보에 버금가는 정보를 알고 있는 2명의 입이 무거운 응시자들이었다.
‘으음. 중간 보스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희생자는 없어야겠지?’
물론 가형을 택한 17명의 응시자 중 무려 40%나 탈락한 상태라 시선을 분산시켜줄 누군가가 필요한 태주의 입장에선 더 늦기 전에 교전을 마무리 지을 필요성이 있었지만.
쉬쉬쉬쉬쉬쉬!
‘나왔다.’
혼란을 틈타 지면과 가까운 구멍에서 슬그머니 기어 나온 공벌레가 더듬이를 내저으며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슬슬 정리해볼까?’
자신이 직접 미끼가 되기로 한 태주가 화살의 종류를 교체한 뒤 모두에게 위협을 알렸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물론 도발을 이용해 어그로를 강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또 한 명의 탈락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희생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스킬의 사용을 자제한 것이었다.
“내가 처리할 테니까 다들 피해!”
“……?!”
자폭 몬스터의 등장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주에게 집중됐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 있는 대상을 노리겠지?’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다른 녀석을 탐하지 못하게 선수를 친 태주가 공벌레를 유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단숨에 접근했다.
쉬쉬쉬쉬쉬쉬!
태주의 의도대로 공격의 의지를 드러낸 공벌레가 몸을 동그랗게 만 뒤 회전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 와라.’
처음부터 점멸로 피하면 목표물이 수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일 과제를 통해 꾸준히 향상시켜둔 민첩성을 활용, 오랜만에 달리기 실력을 뽐내 본 태주였다.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대미지를 입은 동료들에게 열심히 힐을 넣어주고 있던 유리가 다소 무모해 보이는 태주의 시도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저러다 따라잡히면 정말 끝장인데.”
암살에 능한 어쌔신답게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조용히 킬 수를 올리고 있던 민대엽 역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태주와 공벌레의 위태로운 추격전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뭐, 다 생각이 있겠지.”
물론 빗발치는 화살을 실드로 막고 있던 금서윤만큼은 자신의 동맹 제안을 냉정하게 거절했던 태주의 날렵한 움직임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며 뒤끝 아닌 뒤끝을 부리고 있었지만.
‘지금이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적들이 가장 밀집해 있는 지점까지 자폭 몬스터를 끌고 들어간 태주가 육안으로 확인해 둔 피해 범위 밖으로 신속하게 벗어난 뒤 공벌레가 있는 곳을 돌아보며 주저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쉬이익!
태주가 날린 회심의 일격이 공벌레를 관통하는 순간.
펑!
반가운 폭발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적들이 맹렬한 불길 속으로 괴성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꾸롸아아아!
“예!”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 태주의 영리한 활약을 목격한 건우가 몬스터의 안면을 가격하고 있던 오른쪽 주먹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잠시나마 태주의 탈락을 걱정했던 대엽은 자신의 경솔한 판단을 자책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휴우.”
전력의 핵심인 태주에게 내심 의지하고 있던 유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치료를 이어 갔다.
“……?!”
물론 서운함이 남아 있는 서윤은 태주의 플레이를 힐끗거리면서도 여전히 놀란 기색을 숨긴 채 자신의 역할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
*
*
잠시 후.
공략할 길이 막막했던 전열을 무너뜨린 태주의 번뜩이는 기지에 힘을 얻은 응시자들이 한결 기세등등해진 발걸음으로 가형 던전을 정복해 나갔다.
“야, 이거 이러다 보스까지 잡는 거 아니야?”
현재까진 운 좋게 묻어가고 있던 희범이 태주의 옆모습을 곁눈질하며 설레발을 치던 바로 그때.
쿵! 쿵!
마치 희범의 입방정에 불쾌해진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듯 심상치 않은 크기의 발자국 소리가 응시자들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 뭐야 저거!”
만약을 위해 화살 한 발을 미리 쥐고 있던 희범이 5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몬스터를 화살촉으로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게 바로 최종 보스의 기본형이구나.’
판금 갑옷의 일부만 착용한 거인형 몬스터의 오른손엔 모닝 스타가 들려 있었는데, 막대 사탕을 확대시킨 것처럼 생긴 이 살벌한 둔기의 끝엔 뾰족한 철제 가시가 방사형으로 박힌 쇠공이 달려 있었다.
“이번에도 근접전은 어렵겠는데?”
교전마다 선봉장으로 나섰던 건우마저 고전이 예상되는 상대임을 직감한 나머지 가드만 올린 채 적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 “궁수가 셋이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냥 아까처럼 멀리서…….”
가형 던전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한 응시자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태주를 돌아보던 바로 그때.
탁!
거인의 몸놀림이라고는 볼 수 없는 민첩성과 탄력 있는 발 구르기.
제자리멀리뛰기를 연상케 하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몬스터가 건방진 응시자를 향해 모닝 스타를 휘둘렀다.
슈우우왕!
예견된 방심.
어설픈 지식으로 인한 자신감이 무지로 인한 긴장감보다 더 해로운 법이라 했던 함 교수의 충고를 증명이라도 하듯 가시 박힌 쇠공이 보스에 대한 정보 수집이 미흡했던 응시자의 상반신을 가로로 통과했다.
[몬스터로부터 심각한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순간,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응시자의 고글에 탈락을 암시하는 불길한 문구들이 떠올랐다.
[누적된 피해가 한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물론 증강 현실이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면, 피해를 인지할 틈도 없이 더 끔찍한 상황을 맞이했겠지만.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 “……?!”
고득점을 자신했던 정보 보유자 중 한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허무한 탈락에 할 말을 잃었다.
‘보기보다 빠르네.’
레이드 중반에 등장하는 보스몹이 강하다는 건 족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추상적으로만 다가왔던 강함의 의미가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태주였다.
▶ 스킬 『간파』가 발동되었습니다.
물론 그 즉시, 갑옷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 중 겨드랑이와 목이 급소라는 걸 3초간의 응시만으로 어렵지 않게 알아냈지만.
“야 이 씨! 왜 이렇게 세!”
중간 보스의 가공할 만한 위력에 당황한 희범이 공격의 의지가 꺾인 얼굴로 피할 곳부터 찾았다.
“리치만 길어도 난감한데, 무기까지 겁나 기네. 얘들아! 일단 포위하는 형태로 넓게 넓게 퍼지자!”
뭉치면 산다는 것을 강조했던 건우가 모닝 스타의 넓은 공격 반경에 위기감을 느끼며 기존의 입장을 번복했다.
쿠오오오!
응시자들의 분주한 움직임에 예민해진 보스몹이 다음 목표물로 낙점된 유리를 향해 턱이 빠질 듯이 포효했다.
‘하나뿐인 힐러를 잃을 순 없지.’
▶ 아이스 애로우[I]를 선택하셨습니다.
쉬이익!
보스몹의 의도를 눈치챈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던 유리의 퇴로에 화살을 발사해 표면을 얼려 버렸다.
“어?!”
일시적으로 빙판길이 된 바닥에 미끄러진 유리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사이, 모닝 스타의 무시무시한 스윙이 유리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슈우우왕!
‘지금이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작은 빈틈조차 놓치는 법이 없는 태주가 보스몹의 헛스윙 동작이 다음 공격으로 이어지기 직전, 정교한 타격이 가능한 체이싱 애로우를 이용해 보다 큰 대미지를 입힐 수 있는 부위인 겨드랑이와 목을 차례대로 공략했다.
쉬이익! 쉬이익!
쿠오오오!
대미지가 누적되면 알아서 도망친다 했던 선배들의 후기대로 태주의 화살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육중한 몸뚱이를 휘청이던 보스몹이 자신이 왔던 길로 재빨리 몸을 피했다.
*
*
*
같은 시각, 통제실 안.
“이야, 역시 노는 날 나온 보람이 있네.”
태주의 플레이를 감상하기 위해 주말 근무를 자처한 이 과장이 가형 던전의 진행을 제어하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 그렇습니까 교수님?”
“…….”
물론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