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문제 유출 (3)
“이 말을 해주고 싶어서 일찍 온 거야. 만나서 다행이라 했던 것도 그 때문이고.”
이른 방문의 이유를 밝힌 함 교수가 언제 정색을 했냐는 듯 순수하지 못한 미소를 되찾으며 태주의 어깨에 올린 손을 거뒀다.
‘참 여러 가지 의미의 참스승이네.’
함 교수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방심하지 말고, 늘 최선을 다하라’였지만, 표현방식의 문제로 인해 바람직한 내용을 담은 조언마저 살벌한 경고로 변해 있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태주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발걸음 해준 함 교수의 수고로움에 감사를 표하던 바로 그때.
“이제 그만 나오지?”
함 교수가 꺾어진 복도 쪽을 돌아보며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물론 탁월한 감지 능력을 지닌 태주 역시 사각지대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하하. 태주 너도 안녕.”
함 교수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A급 법사 금서윤이 멋쩍은 미소와 함께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마치 시험이 끝난 사람처럼.”
“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앞으론 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함 교수의 지적에 당황한 서윤이 멋쩍은 미소마저 거두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금서윤. 네가 이번 기수에 들어온 21명의 법사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지?”
“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서윤이 평소, 출석 체크는 고사하고, 학생들을 부를 때조차 야, 너, 거기 정도만 사용하는 함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두 귀를 의심했다.
“어어,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법사들 중에선 그나마 입학 성적이 제일 좋았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었던 서윤이 함 교수의 물음에 수긍하며 자신의 실력을 어필했다.
“그래. 그러니 클래스별 티오가 한 명뿐인 피크닉에도 당당히 들어갔겠지.”
“운이 좋았습니다.”
함 교수의 계속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서윤이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겸손함의 미덕을 보였다.
“그래. 양심이 있다면 운이 좋았다고 해야지.”
“네?”
잠시나마 스승과 제자 간의 훈훈한 환담을 기대했던 서윤이 자신의 빈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함 교수의 상식을 벗어난 반응에 또 한 번 두 귀를 의심했다.
“초기 각성부터 운 좋게 A급이 떴고, 법사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마나를 다루는 데 적합한 능력들을 운 좋게 얻은 덕분이니 입시 성적이 좋았던 것도 당연히 운이 좋았던 거라 볼 수 있겠지.”
“네. 맞습니다. 하지만 각성 등급만 믿고 지원한 학교가 아니란 건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함 교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노력형 천재에 욕심까지 많은 서윤의 입장에선 헌터 입시 학원에서의 고단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었다.
“그래. 딱히 알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알아두도록 하지.”
물론 소문난 독설가이자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는 함 교수가 서윤의 당돌한 반박을 곱게 들어줄 리 만무했지만.
“그건 그렇고, 왜 거기 숨어서 대화를 엿들은 거지? 아, 혹시 매직 아처 대신 어쌔신으로 전직할 생각인가?”
서윤이 헌터의 역사 수업 당시 매직 아처로의 전직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는 사실을 학과장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함 교수가 어쌔신의 은신 능력에 빗대어 서윤의 무례한 행동을 비판했다.
물론 의지만 드러냈을 뿐 결과적으론 피크닉에 들어가기 위해 법사에만 집중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지만.
“아, 아니요. 사실 엿듣고 싶어서 엿들은 게 아니라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서 잠시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교수님과 태주의 대화가 너무 진지한 거 같아서요.”
서윤의 말에 거짓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은 또 아니었다.
“아아, 그러니까 우리를 배려하다 그런 것이니 넌 잘못이 없다?”
“네?! 아, 아니요! 전 그냥…….”
“그만. 누가 보면 내가 억울하게 한 줄 알겠군. 그럼 좀 이따 보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손사래를 치던 서윤의 해명을 가차 없이 끊은 함 교수가 태주에게만 끝인사를 남긴 뒤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요! 저, 교수님, 잠시만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떠난 함 교수의 냉정한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어 본 서윤이 무심하게 닫힌 대기실 문 앞에서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뭐야, 진짜.”
물론 실력적인 폄하를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해명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밀려든 서윤은 대기실의 문이 닫히기 무섭게 함 교수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지만.
“야, 태주야, 저 교수님 진짜 볼 때마다 이상하지 않냐? 완전 비호감이야. 어휴.”
곁에 있던 태주에게 공감을 구하던 서윤이 죄 없는 대기실 문을 향해 니 킥을 날리듯 무릎을 들었다 내렸다.
“12시가 다 돼서 그런가? 왜 저번 시간에 그랬잖아. 자긴 12시만 되면 예민해진다고.”
가형이 정오에 시험을 보는 까닭을 직접 물은 적 있던 서윤이 까다로운 심사를 예고하는 함 교수의 독특한 대답을 떠올리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근데 그것도 좀 어이없지 않아? 아니,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12시만 되면 예민해져?”
‘으음. 그 12시가 아닐 텐데…….’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서윤의 말실수를 모른 척 넘어갔다.
“게다가 강의명이 레이드의 기초1이면, 어쩔 수 없이 2도 들어야 된다는 거 아니야. 아아, 진짜 짜증 나!”
함 교수와 한 학기를 더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한참을 투덜거리던 서윤이 문득 혼자서만 열을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야, 근데 넌 왜 아무 말도 안 해?”
태주의 의도적인 침묵에 서운함을 느낀 서윤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설마 교수님한테 반지를 받아서 그래? 그래도 너한테만큼은 호의적이니까?”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함 교수님의 살생부 맨 꼭대기에 있는데.”
개강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함 교수의 덫에 걸리지 않은 유일한 생존자인 태주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서윤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말했다.
“하긴, 너 한번 잡아보겠다고 난이도까지 조작하는 분인데 선물 하나 받았다고 역성을 들 리 없지.”
태주가 자기편이라 믿고 싶었던 서윤이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린 태주의 큰 손을 옆으로 치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서 몸이나 풀자. 그래야 일찍 온 보람이라도 있지.”
함 교수에 대한 뒷담화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서윤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마무리 지으며 대기실 문으로 다가갔다.
“먼저 들어가. 난 애들이 좀 모이면 들어갈 테니까.”
태주를 뒤따르지 않은 서윤이 제자리에서 몸을 풀며 자신이 등장한 복도 쪽을 돌아봤다.
“왜. 지금 들어가면 또 우리 셋만 있을까 봐?”
서윤의 의도를 눈치챈 태주가 신데렐라 때와는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 이번에도 뭐라 하면 진짜 시험에 집중을 못 할 것 같거든.”
가형 던전을 통해 운이 아닌 실력으로 이루어낸 합격이었음을 입증하고 싶었던 서윤이 태주의 짐작에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그래. 그럼 편한 대로 해.”
개인의 판단을 존중하는 편인 태주가 서윤을 복도에 남겨둔 채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
*
*
잠시 후.
“자, 지금 시각은 정각 12시야.”
가형을 택한 17명의 응시자를 자신의 앞에 3열 횡대로 세운 함 교수가 대기실에 설치된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 시간을 혼동한 얼간이는 없는데, 표정들은 하나같이 썩어있네. 특히 너.”
학생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던 함 교수가 유독 표정이 어두운 서윤을 본보기로 지목했다.
“남들 놀 때 시험 보러 온 게 아직도 억울해? 아님, 아까 내가 한소리 했다고 소심하게 시위하는 거야?”
“네? 아, 아니요. 둘 다 아닙니다.”
입으로는 부정했지만, 사실 함 교수가 추측한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서윤의 현재 심정을 정확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아니야? 그럼 왜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시험을 망친 얼굴을 하고 있지?”
물론 불과 몇 분 전,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한차례 주의를 받은 서윤의 입장에선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받은 두 번째 주의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진짜.’
자신에 대한 앙금이 남은 듯한 함 교수의 종잡을 수 없는 기준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감정 조절에 실패해 시험장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전필 과목인 레이드의 기초1을 재수강해야 하는, 다시 말해, 함 교수의 얼굴을 더 오래 봐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가까스로 화를 억누른 서윤이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앞으론 표정 관리에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12시가 되어 그런 것이라 이해하기로 한 서윤이 함 교수를 향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선배들한테 진작 물어볼 걸 그랬나?’
물론 함 교수가 입을 열기 전까진 혹은 함 교수를 겪어본 피크닉 선배들의 증언이 있기 전까진 12시만 되면 예민해지는 이유에 대해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지난 시간에 말했듯 가형 던전의 최고점은 A+고, 최저점은 F다. 너희들의 입학 성적이 아무리 상위권이라 해도 나형이나 다형을 택한 중하위권 녀석들보다 안 좋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마음에도 없는 사과라도 받고 나서야 서윤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뗀 함 교수가 본격적으로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자, 그럼 다들 각오는 됐겠지?”
- “……네.”
자신의 선택에 잠시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패기 없는 목소리로 한 박자 늦게 입을 모았다.
*
*
*
잠시 후.
고글을 착용한 17명의 응시자들이 조교의 안내에 따라 가형 던전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증강현실이 구현됩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고글에 뜬 안내 문구를 확인한 태주의 손엔 오 대표가 아닌 이 교수의 활이 들려 있었다.
‘중간이 베스트고 차선이 선두라고 했었지.’
난이도가 높을수록 응시자의 적극성이 떨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을 역이용한 함 교수의 첫 번째 함정이 후방 습격임을 떠올린 태주가 족보에 나온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무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피해가 누적되면 테스트가 중단됩니다.]
물론 선배들의 도움을 받은 몇몇 아이들 역시 태주와 마찬가지로 클래스에 적합한 포지션이 아닌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위치로 슬쩍 자리를 옮겼지만.
‘어? 진짜 구멍들이 있네?’
동굴처럼 생긴 지루한 통로를 별다른 교전 없이 나아가던 태주의 시야에 불규칙하게 뚫린 크고 작은 구멍들이 들어왔다.
바로 그때.
- “어! 나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선두를 고수하고 있던 응시자 한 명이 전방에 등장한 몬스터를 가리키며 목청껏 소리쳤다.
“……?!”
물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전방을, 또 누군가는 후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