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문제 유출 (2)
“안녕하세요.”
뜻밖의 조우를 하게 된 태주가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무엇이 다행이란 것인지 머릿속으로 짐작해 보았다.
물론 기다림의 이유를 떠나 프로지각러인 함 교수가 예정 시간보다 30분 일찍 시험장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그래. 족보는 달달 외우고 왔고?”
태주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은 함 교수가 뼈 있는 질문으로 대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
“네? 족보요?”
순간, 매년 같은 유형의 던전을 출제하고 있는 함 교수가 족보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고득점을 얻게 되는 상황을 견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 수요일. 시험 일정이 잡히자마자 학과 사무실에 가서 족보를 받아 갔다며.”
“네. 그날 마침 족보를 찾아가라는 문자가 왔거든요.”
태주가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인 수령이었음을 정정하며, 족보에 대한 의존도를 강조하려는 함 교수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차분하게 반박했다.
“보니까 어때. 확실히 도움이 돼?”
“아직 시험 전이라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거짓말.”
함 교수가 태주의 신중한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벌써 눈치챘잖아. 던전의 구성이 매년 똑같다는 걸.”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출제자인 함 교수의 직설적인 화법은 늘 상대방의 평정심을 깨뜨리는 재주가 있었다.
“뭐, 어차피 상대평가라 족보의 도움이 없이도 A+는 받겠지만. 그렇지?”
“아니요. 선배들의 후기만 봐도 쉽지 않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지.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신태주란 인간은 늘 겸손하고, 그 겸손이 자신의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태주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함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단정적인 추측을 쏟아냈다.
“외람되지만, 부정할 수밖에 없는 말씀만 해주시네요.”
“아니. 내 말이 맞아. 그리고 단 한 번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지. 월요일에 있었던 웨더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신고식이 그랬듯.”
“……?!”
함 교수의 일방적인 견해를 반박하던 태주가 생각지도 못한 예시의 등장에 또 한 번 흠칫했다.
“제 영상을 보셨습니까?”
선배가 완패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영상의 특성상 동아리 밖으로 유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기고 있던 태주가 함 교수의 시청 루트를 물었다.
“이원식 과장이 가는 곳마다 네 칭찬을 해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거든. 그래서 원본 영상을 보여 달라 부탁했지.”
물론 영상을 유출한 인물은 따로 있었지만.
‘역시 이 과장님이셨구나.’
흑역사를 남긴 근석의 입장에선 충분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영상의 사본을 얻는 과정에서 원본의 삭제를 요청하거나 결과에 대한 침묵을 당부한 적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신고식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한들 이 과장의 처신을 함부로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놀라움의 연속이더군. 참을성 없는 내 시선을 30분이나 잡아둘 만큼.”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함 교수가 태주의 플레이를 본 소감을 솔직하게 밝혔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임성호를 주축으로 한 선배들의 의도적인 견제로 인해 압도적인 승리를 얻고도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한 태주였지만, 칭찬에 대한 고마움을 떠나 자신의 실력적인 한계를 섣불리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아니. 사력을 다한 사람은 티가 나게 돼 있어. 땀, 눈빛, 호흡, 안색, 표정, 자세, 말투, 멘탈. 아무리 포커페이스에 능해도 본능적인 반응 전부를 기계처럼 통제할 순 없거든.”
물론 함 교수 역시 태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위인은 아니었지만.
“근데 넌 아니야. 내가 준 반지는 물론, 마력이 깃든 장비들을 모두 제거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 마치 선배가 준 말도 안 되는 미션조차 너의 수준엔 못 미친다는 것처럼 말이야.”
놀랍게도 모두가 태주의 경이로운 퍼포먼스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함 교수의 예리한 시선은 퍼포먼스 과정에서 드러난 크고 작은 용태의 변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너도 네 한계가 어디쯤인지 정확히 모를 거야. 입시 당일에 기적처럼 2차 각성에 성공했고,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라는 유례없는 클래스까지 얻게 됐지만, 그 강함의 끝을 알기 위해선 결국 한계에 부딪혀 봐야 되니까.”
‘뭐지? 설마 난이도를 다시 높이려는 건가?’
순간, 빌런 미션 당시,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테스트에서 동등하고 공정한 기준을 적용해 달라 했던 자신의 요구 사항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함 교수가 약속을 파기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은 태주였다.
물론 함 교수의 개인적인 호기심에 의한 불필요한 검증 과정을 수업 시간마다 거쳐야 했던 태주로선 재고의 여지가 없는 소모적인 주제였지만.
“그럼 교수님께선 한계에 부딪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 태주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질문자의 포지션부터 가져왔다.
“한계? 당연히 있었지.”
4차 각성 법사의 체면상 인정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함 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민감한 질문에도 대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나를 게이트가 아닌 교문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그 한계에 부딪혔을 때니까.”
찰나의 회상에 잠긴 함 교수의 고백에선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의외네요. 교수님 같으신 분께서 좌절을 겪으셨다는 게.”
학과 내에서 염세주의자로 통하는 의욕 없는 눈빛의 함 교수가 한때나마 성장을 갈망했었다는 것만으로도 태주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놀랄 거 없어. 각성자든 아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뜻밖이라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함 교수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설교를 이어가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한계의 기준점이 다르다는 정도? 누군가는 나처럼 5차 각성에 이르지 못해 좌절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S급의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채 좌절을 맛보게 되지.”
‘하긴, 내가 딱 후자에 해당하는 케이스였지.’
함 교수가 든 현실적인 사례에 공감한 태주가 E급 궁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했던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뭐, 멀리서 볼 것도 없이 잠시 후 있을 가형 던전에서도 분명 한계에 직면하는 녀석들이 속출하겠지만.”
가형 던전에 지원한 용기 있는 학생은 태주를 포함해 총 17명.
그중 3분의 1이 조금 넘는 인원인 6명은 클래스별 최고의 실력자인 피크닉의 신입부원들이었지만, 함 교수는 대다수 혹은 거의 모든 지원자가 자신이 준비한 던전의 난이도에 좌절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네. 하지만 던전의 유형에 대비하고 온 지원자는 저 혼자만이 아닐 겁니다.”
태주는 새터나 동아리 등을 통해 선배와의 친분을 쌓은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조언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정보의 수준이 족보에 비해 체계적이지 않을뿐더러 던전의 난이도상 알고도 당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문제 유출에 버금가는 정보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매년 똑같은 던전으로 변별력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태주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함 교수는 오픈 북 테스트에 가까운 선후배 간의 노하우 전수 사실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방심.”
태주의 예상과 달리 함 교수가 드러낸 강한 자신감의 원천은 출제자가 준비한 함정이 아닌 도전자의 마음가짐에 있었다.
“때론 어설픈 지식으로 인한 자신감이 무지로 인한 긴장감보다 더 해로운 법이거든.”
변별력의 정체를 밝힌 함 교수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인간이란 동물이 원래 그래. 위험이 가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에 대한 욕구 때문에 기댈 구석만 있으면 바로 경계심을 풀어버리지. 족보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는 만큼 방심하기 쉬운 거고.”
“방심이라……. 정작 중요한 단어는 족보에 없었네요.”
던전의 공략 방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던 태주가 그 어떤 선배도 기술한 적이 없는 궁극적인 함정의 발견에 헛웃음을 지었다.
“후기를 남길 만한 자격들이 없으니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 또한 좁을 수밖에.”
“네? 그게 무슨.”
태주가 족보의 신뢰성을 의심케 하는 함 교수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껏 가형 던전을 통과한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거든.”
“……?!”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족보에 기술된 팁과 후기 그 어느 곳에서도 테스트의 통과 여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최종 보스가 2페이즈로 넘어갈 때 외적인 변이가 일어나고 무지막지하게 강해진다는 설명까지만 되어 있었어.’
2페이지가 끝이라는 생각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던 태주의 입장에선 3페이즈 이후를 고려해야만 하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 내 수업에 한해서만큼은 실패한 녀석들이 남긴 실패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뜻이지.”
물론 태주에게 있어 난감하다는 것이 곧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근데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저에게만 알려주시는 거죠?”
태주는 자신의 탈락을 누구보다 고대하고 있을 함 교수가 다른 사람도 아닌 족보로 인해 누구보다 방심하기 쉬운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만 힌트를 공개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왜냐고? 이번에도 적당히 할까 봐.”
태주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간 함 교수가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경고하듯이 말했다.
“최선을 다해 보기도 전에 죽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물론 네가 아니라 내가.”
마치 태주의 한계를 확인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가 준비되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 함 교수가 태주의 한쪽 어깨를 짚으며 기대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