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문제 유출 (1)
‘왜 그러지?’
근석과 눈이 마주친 태주가 이어지는 대답에 집중하며 시선에 담긴 의도를 가늠해 보았다.
“어어, 그러니까 태주의 신고식 영상을 보내란 말씀이시죠?”
임성호로부터 파일의 공유를 지시받은 근석이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과장에게 먼저 녹화를 부탁한 쪽은 근석이지만, 태주가 실패하는 모습을 담아내겠다는 당초의 포부와 달리 자신의 흑역사만 기록으로 남기게 된 난감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네. 그럼 오늘 안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근석이 근심 어린 얼굴로 이 과장에게 다가갔다.
“저, 아저씨, 죄송한데, 아까 말씀드린 녹화 파일이요. 지금 좀 받아 갈 수 있을까요?”
“지금? 당연히 되지. 근데 괜찮겠어? 선배들이 보면 한마디씩 할 텐데.”
“하아. 그러게요.”
태주와 같은 회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 근석이 이 과장의 합리적인 추측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선배들이 왔어도 결과는 똑같으니까.”
태주의 플레이를 실시간으로 목격한 이 과장의 말대로 근석의 판단을 나무랄 순 있어도 패배 자체를 비난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학생도 알잖아. 상대를 잘못 고른 것 빼곤 딱히 실수한 게 없다는 거.”
근석의 축 처진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넨 이 과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태주를 향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USB에 넣어서 금방 갖다 줄 테니까.”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과장이 떠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수건 잘 썼어.”
먼저 정적을 깬 근석이 태주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네. 근데 어느 선배랑 통화한 거예요?”
발신자의 정체가 궁금했던 태주가 근석에게 돌려받은 수건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성호 선배. 내가 오늘 신고식이 있다고 얘기했거든.”
“아아, 3학년 임성호 선배님이요.”
“어. 네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한가 봐. 뭐, 중간에 내가 나오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자신의 패배와 태주의 클리어 사실을 따로 전하지 않은 근석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임성호 선배님은 어떤 분이에요?”
회귀 전, 선배들과의 교류가 그리 활발하지 못했던 태주가 가디언 하우스에서의 뒤풀이 당시 간단한 소개 정도만 받았던 성호의 특징에 대해 물었다.
“성호 선배? 으음. 글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칼 같은 사람?”
태주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었던 근석이 범상치 않은 수식어로 임성호의 성격을 규정했다.
“네? 칼 같은 사람이요?”
임성호의 선한 인상을 떠올리며 듣고 있던 태주가 근석의 설명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외적으론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데요?”
“외모만 보면 그렇지. 근데 겪어 보니까 꼭 관상 대로 가는 것도 아니더라고.”
도제식 트레이닝의 스승인 임성호의 까다롭고도 융통성 없는 평가 기준에 질릴 대로 질린 근석이 양쪽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니까 그 선배 앞에선 미운털 박히지 않게 조심해. 한번 아니면 끝까지 아닌 성격이라 눈 밖에 날수록 너만 괴로워지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성호와의 통화 내내 깍듯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태주가 경험에서 우러난 근석의 경고를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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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26기 동기들과 27기 후배들을 가디언 하우스로 불러 모은 임성호가 자신이 본 영상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편집을 거치지 않은 영상의 길이는 고작 30분 남짓.
단체 시청을 마친 성호의 표정은 심각했고, 근석은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으며, 영상을 처음 접한 나머지 열 명의 멤버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극찬을 쏟아내고 있었다.
“와아, 진짜 와 소리밖에 안 나오네. 근석아, 이거 원본 맞지? 편집한 거 아니고.”
A급 어쌔신인 26기 신정욱이 영상 속 당사자인 근석을 돌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아, 네. 원본 그대로입니다.”
선배의 부름에 황급히 고개를 든 근석이 멋쩍은 얼굴로 소심하게 답했다.
“첫 번째 미션인 강풍이야 힘으로 어찌했다 쳐도 안개랑 추위까지 극복한 건 진짜 설명이 안 되는데? 뭐, 마지막 미션인 벼락은 말할 것도 없고.”
3학년 대표로 면접에 참석했던 S급 법사 심수아가 의문이 드는 장면들을 다시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근석이가 아주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네. 심지어 도제식 트레이닝도 안 하기로 했다며?”
A급 힐러인 26기 양한나가 풀이 죽은 근석의 뒤로 바짝 다가가 놀리듯이 속삭였다.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완전 어나더 클래스야.”
영상을 보는 내내 말을 아끼고 있던 A급 전사 홍범영이 동기인 임성호와 동일한 표정으로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그러게. 선배를 능가하는 후배가 1년 만에 또 들어왔네.”
A급 무투가 최성종이 직속 후배인 S급 무투가 배현우를 슬쩍 쳐다보며 헛웃음을 짓던 바로 그때.
“보니까 어때. 다들 뭐 느끼는 거 없어?”
동기들의 감상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성호가 멤버들의 앞으로 나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느낀 점? 글쎄. 그냥 미쳤다?”
A급 힐러인 양한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정제되지 않은 소감을 전했다.
“그래. 같은 궁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미치긴 했지. 근데 그게 다야? 뭔가 위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
“……?!”
태주의 실력에만 감탄하고 있던 아이들이 성호가 주목한 뜻밖의 부작용에 묘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물론 최성종과 배현우의 관계처럼 선배보다 각성 등급이 높은 후배가 들어오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태주의 경우 기존의 S급 후배들과는 달리 도제식 트레이닝의 스승을 비롯한 모든 선배들에게 굴욕을 안겨줄 수 있는 위협적인 실력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나중에 따로 논의하겠지만, 일단은 이번 일을 계기로 선배들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신고식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아. 4학년 선배님들한테는 내가 따로 보고할 테니까 태주랑 있을 때만큼은 다들 입조심하고.”
2, 3학년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킨 성호가 여전히 화면상에 플레이 되고 있는 태주의 활약상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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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의 신고식과 그로 인한 선배들의 긴급 회동이 있던 날로부터 정확히 5일 뒤.
1학기 중간고사의 첫 번째 시험을 앞둔 태주가 토요일 오전의 한산한 캠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함 교수의 예민함이 극에 달한다는 12시까진 아직 30여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왜 아직까지 반응들이 없지?’
시험장을 향해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태주가 신고식의 결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피크닉 선배들의 일치된 태도에 합리적인 의심을 품었다.
‘혹시 띄워주지 말자고 다 같이 짰나?’
신고식 영상이 회자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4학년 선배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던전 실습 시간에서조차 신고식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어찌 보면, 언급을 피한다는 것 자체가 날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지만.’
지이잉!
선배들의 의도적인 회피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태주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어디야?]
아침 9시에 이미 다형으로 시험을 친 세준이 가형의 시험 시간에 맞춰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트레이닝 돔.】
[벌써? 미리 가서 몸이라도 풀게?]
【어. 넌 시험 어땠어?】
9시 테스트의 유경험자인 태주가 다형의 최저점인 C 마이너스마저 과분해 보이는 세준에게 솔직한 후기를 물었다.
[당연히 망했지 ㅋㅋㅋ 하재룡도 뭐 거기서 거기고.]
취업 걱정이 없는 케이스라 성적에 집착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과에 크게 연연하진 않는 세준이었다.
[근데 너 이제 어떡하냐?]
【밑도 끝도 없이 뭐가?】
[아니, 다형이 이 정도면 가형은 미쳤을 거 아니야. 가뜩이나 최저점이 F인데.]
【뭐야, 지금 내 걱정해 주려고 연락한 거야? ㅋ】
바쁘게 엄지를 움직이던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세준의 우려대로 다형에 비해 가형의 난이도가 월등한 건 사실이었지만, 시험 일정이 공지된 날로부터 이미 반복적인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족보 속에 기술된 선배들의 팁과 주의 사항을 충분히 숙지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 겸사겸사? ㅋ 실은 과팅하는 걸 까먹었을까 봐 연락했어.]
【아, 맞다. 그런 것도 있었지.】
[이봐, 이봐, 내가 이럴까 봐 연락했다니까?]
【농담이야. 이따 7시에 제일(Jail) 포차에서 보기로 했잖아. 조소과 애들이랑 5 대 5로.】
[어? 기억하고 있었네? ㅋㅋㅋ]
【근데 초면에 제일 포차에서 만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거기 교도소 컨셉이라며. 손님들한테 이상한 미션도 많이 시키고.】
학교 인근에 위치한 제일 포차 역시 술롱도르의 혜택이 미치는 곳이었지만, 회귀 전후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뭐, 그렇긴 한데 어차피 내가 정한 곳이 아니라.]
【뭐야, 네가 예약한 게 아니었어?】
[ㄴㄴ 장소는 걔네가 고른 거야. 난 날짜랑 시간만 잡은 거고.]
【아, 그래? 그럼 같이 나갈 나머지 두 명은? 다 구했어?]
[너만 빼곤 다 못 껴서 난리였는데, 당연히 구했지 ㅋ]
【누군데?】
[류정웅이랑 윤철용.]
‘어? 류정웅이 간다고?’
세준의 답장을 확인한 태주가 혼밥의 장인이자 자발적 아싸에 속하는 정웅의 깜짝 합류 소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과적으로 너랑 나, 그리고 하재룡, 류정웅, 윤철용이 최종 멤버야.]
【철용이는 그렇다 쳐도 정웅이는 좀 의외네.】
[그렇지? 심지어 어디서 듣고 왔는지 내가 묻기도 전에 와서 자기도 껴 달라 그러더라고.]
공대원 모임 당시엔 식사 장소가 우연히 겹친 관계로 예고 없이 합석하게 된 정웅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과팅에서만큼은 이례적인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뭐지? 성격상 그럴 애가 아닌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의 참석 여부가 정웅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번에도 무슨 할 얘기가 있나?’
냉삼집에서의 1차를 마치고 2차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대화를 요청한 정웅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우연히 마주친 것은 맞지만, 네가 온다는 애길 못 들었으면, 합석도 안 했을 것이라는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웅의 용건은 두 번째 매직 아처가 되겠다는 다소 황당한 선포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결정됐으니까 이따 7시에 가벼운 마음으로 와. 지금처럼 너무 일찍 오진 말고 ㅋ]
【ㅇㅋ】
세준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태주가 대기실로 들어서려던 바로 그때.
“다행히 일찍 왔네?”
복도에서 마주친 함 교수가 태주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뭐? 다행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