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80화 (180/242)

180. 청출어람 (8)

근석의 질문에 모른 척 대꾸해 준 태주가 머리 위로 떨어진 벼락을 보란 듯이 맞았다.

활에 부착된 전격 속성 공격 무력화 옵션의 성능도 궁금했지만, 얄팍한 눈속임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클래스의 차이를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속성(전기) 공격의 대미지가 80% 감소되었습니다.

벼락을 정통으로 맞는 순간 세 번째 시련 당시와 마찬가지로 패시브 스킬인 저항이 자동으로 발동되었다.

▶ 전격 속성의 대미지가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태주가 확인하고자 했던 옵션이 제 기능을 발휘하였는데, 인공 벼락의 위력으로 인해 100%의 감소율을 보여주지 못한 저항 스킬과 달리 무력화라는 표현답게 활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전기의 느낌조차 받지 못한 태주였다.

‘와아, 이거 장난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던 태주가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는 뛰어난 방어 효과에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근석이 지척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만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갔지만.

“네. 보시다시피요.”

“……?!”

벼락이 내리치는 광경을 목격한 근석이 태주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 한 번 놀라고, 이종도 교수가 준 활보다 좋은 거냐는 시간 끌기용 질문에 답하는 태연한 목소리에 또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뭐지? 방어에 도움이 될 만한 장비들은 미리미리 제거해 놨는데.’

예상을 빗나가다 못해 혼란스러움마저 초래한,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결과물에 말문이 막힌 근석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를 쳐다봤다.

“야, 너 괜찮아? 아프면 아프다고 그래. 괜히 참지 말고.”

의지만으로 참아낼 수 있는 고통이 아니란 건 벼락의 유경험자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지만, 활의 등급이나 버프에 대해 알 리 없는 근석으로선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니요. 생각보다 견딜 만한데요?”

천장을 슬쩍 올려다본 태주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게 견딜 만하다고?’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마저 느껴지는 태주의 상식을 벗어난 반응에 절로 승부욕이 상실될 지경이었다.

“아, 그래? 그럼 다행이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인 벽을 느낀 근석이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콰지지직!

“으아아아악!”

비에 흠뻑 젖은 상태로 총 3번의 벼락을 맞은 근석이 결국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대자로 뻗어버렸다.

철퍼덕!

“선배님, 괜찮으세요?”

뱀들을 남김없이 처리한 태주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근석의 수척해진 몰골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

허세를 부리기는커녕 대답할 여력조차 없는 근석이 마침내 완패를 인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근석의 상태를 확인한 태주가 가까운 CCTV를 향해 손을 흔들며 테스트의 종료를 요청했다.

[“오케이.”]

편파적인 응원을 펼치고 있던 프로그래머가 태주의 사인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며 트레이닝 필드를 정상화시켰다.

곧바로 그친 비바람과 환풍기를 통해 빠르게 걷히고 있는 먹구름.

날씨와 기후를 구현하던 장치들이 벽 안으로 사라지자 이번엔 굳게 닫혀 있던 차단벽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후우.”

허망한 표정으로 누워 있던 근석이 고글을 벗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상대를 잘못 골랐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근석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작년에도 이랬거든. 그땐 뭐 벼락까지 가보지도 못했지만.”

작년엔 직속 선배인 임성호에게, 올해는 대학 생활에서 맞이한 첫 후배인 태주에게 항복을 선언한 근석은 결과적으로 2년 연속 중도 포기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얻게 되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커다란 수건 두 장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태주가 한 장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나머지 한 장은 바닥에 앉아 있는 근석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좋네. 맨손에서 활도 나오고 수건도 나오고.”

후배가 내민 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근석이 수건을 받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네가 두 장 다 써. 난 수건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시작 전, 정정당당한 승부를 청했던 자신이 오히려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뒤늦은 죄책감을 느낀 근석이 수건을 든 태주의 손을 슬며시 밀어냈다.

“네? 자격이요? 아니, 수건 하나 쓰는 데 무슨 자격을 따져요.”

근석의 진지한 거절에 코웃음을 친 태주가 마주 보고 있던 근석의 왼쪽 어깨에 수건을 걸어 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아. 사실 아까 네 머리 위에 벼락이 내리칠 걸 알고도 모른 척했거든. 정확히 말하면, 벼락에 맞도록 유도했던 거고.”

태주의 호의를 염치없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근석이 깊은 한숨을 시작으로 후배에게 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행했던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알고 있었어요.”

“뭐?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태주의 대답에 놀란 근석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달아올랐다.

“근데 왜 아무 얘기도 안 했어?”

“뭐, 위험했으면 알아서 피했겠죠.”

활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고 있던 태주가 근석의 물음엔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뉘앙스로 성의 없이 답변했다.

“……?!”

물론 근석에겐 오히려 태주의 감응 없는 모습이 자신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뭐야,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벼락의 위력을 몸소 보여준 근석으로선 위기감 대신 자신감을 느꼈다는 태주의 피지컬적인 확신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아무튼 선배님 덕분에 아주 좋은 경험 했습니다. 솔직히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벼락을 맞아 보겠어요.”

물기를 제거한 활을 거둔 태주가 수건의 마른 부분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뼈 있는 소감을 전했다.

“어? 어, 뭐,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앞으로 있을 도제식 트레이닝의 어색함을 줄이기 위한 오리엔테이션 정도로 생각하라던 가소로운 조언과 달리 이번 사건을 계기로 태주와의 심리적 거리감이 더 멀어진 근석이었다.

“아 참, 그리고 할 말이 있는데.”

졸지에 어려운 후배가 생겨버린 근석의 말투는 태주가 듣기에도 상당히 조심스러워진 느낌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제식 트레이닝은 없던 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동아리 면접 당시만 해도 피크닉의 전통인 도제 시스템에서 제외되는 것보다 더한 굴욕은 없다는 생각에 강한 트레이닝 의지를 드러냈지만,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격차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니 무엇이 더 굴욕적인 상황인지를 저절로 깨닫게 된 근석이었다.

“성빈 선배 말대로 A급 궁수가 S급 매직 아처를 가르치는 게 무리이기도 했고.”

피크닉의 25대 회장인 민주엽을 대신해 면접관으로 참석했던 A급 전사 조성빈의 우려를 떠올린 근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전 어차피 선배님 의견을 따를 생각이었으니까.”

딱히 배울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원만한 선후배 관계를 위해 트레이닝을 승낙했던 태주로선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결단이었다.

“그래. 그럼 선배들한텐 내가 따로 얘기할 테니까 일단 가서 밥이나 먹자. 뭐 먹을래?”

“으음. 전기 구이 통닭?”

“야, 너 진짜.”

태주의 농담에 웃음이 터진 근석이 수건을 휘두르려던 바로 그때.

“어이, 학생! 이거 받아 가야지!”

통제실에서 나온 프로그래머가 근석의 휴대폰을 머리 위로 흔들며 다가왔다.

“아, 맞다. 내 휴대폰.”

방수 기능은 있어도 벼락까진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맡기고 왔던 근석이 프로그래머를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용케 세 번이나 버텼네?”

휴대폰을 건넨 프로그래머가 근석의 팔뚝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네. 이제야 속이 후련하세요?”

“에이, 말은 바로 해야지. 이게 어디 내 속 후련하자고 시작한 일인가? 학생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

“……?!”

이번에도 역시 프로그래머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입담에 말문이 막힌 쪽은 근석이었다.

“참고로 벼락은 랜덤으로 내린 거니까 원망할 거면 내가 아닌 저놈을 원망해.”

근석의 억울함을 꿰뚫어 본 프로그래머가 바짝 세운 검지를 천장을 향해 흔들며 묻지도 않은 해명을 했다.

물론 프로그래머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 통제실 안에서 조작(操作)을 한 건지 조작(造作)을 한 건지에 대해선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아, 그리고 좀 전에 어디서 전화가 오던데?”

“네? 전화요?”

프로그래머의 말에 최근 기록을 연 근석이 불과 2분 전에 걸려온 임성호의 부재중 전화 한 건을 확인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선배와의 통화가 편할 리 없는 근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프로그래머의 발걸음은 태주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 아주 눈이 다 호강했어.”

태주의 팬이 된 프로그래머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내가 여기서만 11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학생처럼 벼락을 맞고도 멀쩡한 경우는 트레이닝 돔에서의 커리어를 통틀어서 처음이야. 한마디로 유일무이.”

“아닙니다. 바쁘신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극찬을 쏟아내던 프로그래머와 가볍게 손을 맞잡은 태주가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네며 겸손하게 말했다.

“이야, 역시 손아귀 힘이 장난 아니네. 살짝만 잡았는데도 벌써 욱신거리는 거 같아.”

태주의 남다른 악력과 나이답지 않은 포스에 감탄한 프로그래머가 사용 허가를 받은 근석에게조차 알려준 적 없는 자신의 정체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난 이 과장이야, 이원식 과장,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 같은데, 앞으로 잘 부탁해.”

근석의 처신에서도 알 수 있듯 관계가 틀어져 아쉬운 쪽은 언제나 부탁을 하는 입장인 학생들이었지만, 놀랍게도 태주에게만큼은 한없이 호의적인 이 과장이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통제 구역으로 가득한 트레이닝 돔에서의 든든한 조력자 한 명을 얻게 된 태주가 이 과장의 얼굴을 익히며 눈빛을 교환하던 바로 그때.

“네, 선배님, 휴대폰을 지금 확인했습니다.”

임성호에게 전화를 건 근석의 태도는 상당히 깍듯했다.

물론 영상 통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가짐이 조심스럽다는 건 그만큼 상대의 존재를 어려워하고 있다는 방증이었지만.

“네? 아, 네. 신고식 때문에 못 받았습니다. 아니요. 통제실에 있었던 건 맞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네. 신고식은 지금 막 끝났습니다.”

스피커폰이 아닌 탓에 임성호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었지만, 근석의 대답만으로도 어떠한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 눈치껏 파악할 수 있었다.

“네?!”

물론 화들짝 놀란 근석이 왜 태주를 돌아보는지에 대해선 쉽게 짐작할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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