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79화 (179/242)

179. 청출어람 (7)

“어?”

시작과 동시에 활을 거둔 태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근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야, 너 뭐해?”

태주와 달리 화살을 생성할 수 없는 근석이 화살통에서 꺼낸 화살 한 발을 활시위에 걸며 물었다.

“활은 원하는 걸 써도 된다고 했죠?”

차단벽이 내려지기 전, 근석으로부터 미리 활의 종류엔 제한이 없다는 확답을 받아둔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문했다.

“어? 어, 뭐, 그랬지.”

입학 이후 줄곧 이종도 교수로부터 받은 활만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근석의 입장에선 활의 교체를 암시하는 태주의 질문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그새 새로운 활을 구매했나?’

활 이외엔 어떠한 장비도 착용할 수 없다는 규칙에 스스로 발목이 잡힌 근석이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활도 하나만 쓸 수 있다고 하는 건데.’

가뜩이나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 각성 등급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인 템빨을 자신이 아닌 태주가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쏴아!

점점 거세지는 빗방울과 사방에서 불어오기 시작한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의 흐름.

휭!

프로그래머의 손끝에서 탄생한 비바람 속 스산하게 남겨진 두 사람이 빗물이 흐르는 고글 너머로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던 바로 그때.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적당한 타이밍을 엿보던 태주의 손에 드디어 썬더 드래곤의 뿔로 만든 전격의 활이 쥐어졌다.

“어?!”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레이드 보우의 등장에 근석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뭐야 그 활은?”

활의 출처가 궁금했던 근석이 격양된 목소리로 추측성 질문들을 쏟아냈다.

“샀어? 아님 교수님한테 받은 거야?”

“아니요. 최근에 선물 받은 겁니다.”

“선물? 누가 줬는데?”

선물보단 뇌물이란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이는 활의 자태에 시선을 빼앗긴 근석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지듯이 물었다.

“태동의 오승훈 대표님과 삼강 하베스트의 하도철 대표님께서 함께 준비하신 겁니다.”

“뭐?! 태동이랑 삼강 하베스트?!”

출처를 숨길 이유가 없던 태주의 솔직한 답변이 오히려 근석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물급 인사들의 등장.

만남은 고사하고, 언론을 통해서나 겨우 접할 수 있는 5대 길드의 수장과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던전 채굴 회사의 대표로부터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인맥이 그냥 미쳤네.’

후배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까 차마 내색을 할 순 없었지만, 싸워보기도 전에 진 것 같은 강렬한 부러움이 근석을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근데 저걸 왜 줬지?’

출처를 알고 나니 선물을 준 이유와 활의 등급이 궁금해졌다.

‘딱 봐도 최소 희귀 등급 이상인데.’

물론 선배로서, 더구나 대결을 앞둔 긴박한 상황에서 후배의 활에 정신이 팔리는 것도 체면상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달싹이던 입술을 애써 다물었지만.

“아무튼 조금이라도 봐주는 티가 나면 가만 안 둘 거니까 저 아저씨 말대로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봐. 나도 실전이란 생각으로 진지하게 임할 테니까.”

태주의 활에 묶여 있던 시선을 간신히 뗀 근석이 정정당당한 승부를 청하던 바로 그때.

콰과과광!

벼락의 시작을 알리는 요란한 천둥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왔다.

푸쉬이이이!

이번엔 벼락이 떨어지는 지점을 예측할 수 없도록 먹구름과 같은 연기가 천장에서 뿜어져 나왔다.

물론 두 사람의 승부가 단순한 피하기 시합이 되지 않도록 도와줄 녀석들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샤아아!

트레이닝 필드 곳곳에 소환된 수십 마리의 뱀이 쉰 소리를 내며 에스(S)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 의외로 쉽지 않겠는데?’

프로그래머의 예리한 의도를 알아차린 태주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기껏해야 1미터 길이에 굵기 또한 김밥 정도에 불과했지만, 움직임이 워낙 기민하고 역동적인 데다 화살로 맞힐 수 있는 범위 또한 제한적이다 보니 오히려 거대한 몬스터들보다 상대하는 것이 까다로울 수 있었다.

‘한눈을 파는 순간 바로 한 방 물리겠어.’

더구나 바닥에 있는 뱀에 집중하다 보면, 벼락이 준비되고 있는 머리 위의 상황에 소홀하게 되고, 반대로 벼락에 대비하기 위해 천장을 올려다보면, 시야에서 사라진 뱀에게 기습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태주는 이 모든 딜레마가 베테랑 프로그래머의 계산된 설정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뭐가 이렇게 징그럽게 많아!”

미간을 찌푸린 채 활시위를 당긴 근석이 비바람에 흔들리는 화살촉을 아래로 조준한 뒤 다급한 첫 발을 날렸다.

쉬이익!

물론 표적과의 거리를 떠나 면적이 넓고 움직임이 없는 나무와 달리 면적이 작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뱀은 피크닉 면접 당시, 치유의 숲 입구에 위치한 나무에 쪽지가 묶인 화살을 정확히 명중시켰던 장본인인 근석에게마저 정조준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샤아아!

근석의 화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뱀이 독니를 드러낸 아가리를 쫙 찢은 채 굴곡진 몸을 순식간에 펴며 달려들었다.

“이런 씨!”

불발과 동시에 뒷걸음질을 친 근석이 황급히 두 번째 화살을 뽑아 들었지만, 화살의 노크 부분을 활시위에 거는 것조차 버벅거릴 만큼 마음이 조급해진 상태였다.

물론 근석의 평정심을 잃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주변에 있는 뱀들을 빠르게 제거해 나가고 있는 태주의 정교한 활솜씨였지만.

쉬이익! 쉬이익!

초반의 엄살도 잠시, 체이싱 애로우를 장착한 태주의 반경 5미터 안엔 잠시 후 사라질 뱀의 사체들만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와아, 이거 공격력 버프가 장난 아닌데?’

근력 120% 증가, 공격력 150% 증가, 치명타 대미지 350% 증가.

금속 소재의 바닥에 화살이 꽂히는 것을 목격한 태주가 활에 부착된 옵션들을 떠올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수리비를 청구하진 않겠지?’

순간, 대한민국에 단 한 대밖에 없던 초정밀 등급 측정기를 박살 낸 바 있는 태주의 머릿속에 현실적인 고민이 스쳐 갔다.

물론 의도적인 파손이 아닌 이상 학생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쉬이익! 파지직!

‘……?!’

명중 시 20%의 확률로 전격 효과가 발생된다는 옵션에 따라 다섯 번째 뱀을 잡음과 동시에 화살촉 주위로 강력한 스파크가 일었다.

‘물이 고인 곳에 쏘면 광역 대미지가 있겠는데?’

아쉽게도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배수 구멍으로 빠져나가 바닥에 고일 틈은 없었지만, 물을 매개로 다수의 객체에게 감전을 유도하는 방법 또한 고려해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벼락은 언제 떨어지는 거지?’

어느 정도 주변 정리를 마친 태주가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콰과과광!

프로그래머가 미션에 적응할 시간을 주려는 건지 아님, 효과음만으로 방심을 유도해 타이밍을 뺏으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경쟁자인 근석에게 천장을 확인할 여유 따윈 없다는 것이었다.

“거 참, 더럽게 성가시네!”

쉬이익! 쉬이익!

태주와 달리 안전지대 확보에 실패한 근석이 뱀을 피해 내달리며 정신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에이 씨, 왜 나만 이렇게 바쁘지?”

출발 지점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태주의 평온한 뒷모습을 마주한 근석이 화살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와중에도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때.

콰지지직!

천장에서 발사된 인공 벼락이 은빛 섬광을 발하며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건가?’

첫 번째 벼락을 외딴곳에 떨어뜨린 것 자체가 프로그래머의 배려라고 여긴 태주가 낙뢰 지점을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신호인 찰나의 섬광에 집중하며 점멸을 준비했다.

“오우 씨!”

물론 동일한 신호를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근석은 불시에 떨어진 벼락의 위력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하아. 내가 이 짓을 왜 한다고 했지?”

긴 한숨을 내쉰 근석이 자신의 완패를 고대하고 있을 프로그래머를 원망하며 CCTV를 노려봤다.

번쩍!

‘어? 저긴.’

실력으로 확보한 여유 속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태주가 먹구름 사이로 드러난 2차 공습 사인에 근석이 있는 곳을 돌아봤다.

벼락의 위치가 프로그래머의 선택인지 랜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자신을 쏘아보는 근석의 곱지 않은 시선을 벌하듯 두 번째 벼락의 시작을 알리는 섬광이 CCTV에 시선을 빼앗긴 근석의 머리 위에서 번쩍였기 때문이다.

콰지지직!

“으아아아악!”

안전상의 이유로 인해 실제 벼락의 세기와 피해 정도를 고스란히 재현할 순 없었지만, 각성자의 우월한 신체 능력을 감안하더라도 전격 마법에 버금가는 대미지는 충분히 가할 수 있었다.

‘완전 정타로 들어갔네.’

보는 사람이 다 흠칫할 정도로 처절하게 터져 나온 근석의 절규를 듣는 순간, 자신의 왼손에 쥐어진 활이 더 든든하게 느껴졌다.

‘조금 당황스럽긴 해도 역시 일요일에 받은 게 신의 한 수였어.’

지금까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벼락을 의식했지만, 활에 부착된 전격 속성 공격 무력화 옵션이 제 기능만 발휘해 준다면, 아래위로 분산된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뱀의 접근만 봉쇄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털썩!

서 있는 것이 버거울 만큼 온몸에 힘이 쭉 빠진 근석이 활로 바닥을 찍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어진 뱀들의 습격.

샤아아! 샤아아! 샤아아!

딱히 도발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사한 뱀들은 접근조차 쉽지 않은 태주 대신 무방비 상태에 놓인 근석을 먹잇감을 삼았다.

‘실전이었으면 열 번도 더 죽었겠네.’

증강현실로 구현된 탓에 독니 자국이 남거나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근석의 입장에선 오히려 후배가 보는 앞에서, 더구나 자신에게 도제식 트레이닝을 받기로 한 태주보다 먼저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크흡!”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근석이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는 태주의 눈빛에 형언할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근석의 곁으로 예의상 다가간 태주가 주위에 있는 뱀들을 잡아내며 영혼 없이 물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쉬이익! 쉬이익!

“당연히 괜찮지. 그냥 잠시 주춤했던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후배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근석이 뻔한 거짓말로 허세를 부리던 바로 그때.

번쩍!

“……?!”

벼락의 공습 사인이 태주의 머리 위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근석이 혼자만 당할 수 없다는 마음에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며 태주의 시선을 묶어두었다.

“근데 그 활이 이종도 교수님이 주신 활보다 더 좋은 거야?”

“네? 아, 이거요?”

그리고 이내 태주의 머리 위로 섬광을 동반한 벼락이 사정없이 내리쳤다.

콰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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